언스플래쉬
연말정산 시즌이다. 이제 막 돈 벌기 시작한 사회초년생은 아직 연말정산이 낯설고 어렵다. 그저 ‘13월의 월급’이라니 얼마가 되든 돈을 받겠구나, 생각할 뿐. 하나라도 더 챙겨보고자 웹 서핑을 시작한다. ‘연말정산’이라고 검색하니 ‘연말정산 꿀팁’, ‘달라진 연말정산! 알면 더 받는다’ 같은 제목의 게시글이 수두룩하다. 특히 청년혜택이 크단다. 꽤 받을 수 있는 거 아니야? 조금 설레기 시작한다. 증빙만 가능하면 1년 동안 납부한 주택청약금의 일부와 월세 일부를 돌려받을 수 있단다. 연말정산액 받으면 파마해야지. 벌써부터 받지도 않은 돈으로 할 일과 살 물건에 기분이 좋다.
주택청약 보상을 살핀다. 어라, 분명 돌려받는다고 했는데 왜 이 정도지? 기대보다 적다. 매달 퍼붓는 돈이 얼만데. 내심 속이 상하지만 어쩔 수 없다. 대신 월세 납입 증명서를 꼼꼼히 챙긴다. 지난 1년 동안 이체한 금액을 합산하니 속이 쓰리다. 아, 고단한 서울 살이여. 한강 다리를 지날 때마다 ‘그때 내가 저 동네 집 하나라도 샀더라면 지금 내가…’ 또는 ‘저렇게 아파트가 많은데 저 중에 내 집 하나 없네’로 시작하는 엄마의 푸념을 들으며 속물적이라고 내심 흉봤는데. 어머니, 용서하세요. 제가 너무 어렸네요.
약간의 오기가 생겨 청년 주택 청약에 대해 조금 더 찾아본다. 금액보다 기간이 더 중요하고, 연말정산 세액공제가 가능하며… 등등. 하지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분양 대상 우선순위 항목으로 스크롤을 내린다. ‘1순위: 신혼부부’. 아예 신혼부부 특별분양이라는 제도가 있다고. 아, 이번 생에는 안 되겠네. 내친 김에 다른 청년 주택 정책도 살펴본다. 모두가 1순위 신혼부부. 아니, 대한민국에서 반려동물과 함께 늙어갈 비혼 청년은 청년도 아니란 말인가? 화가 뻗친다. 차라리 위장결혼이나 해버릴까? 헛된 상상도 해본다. 흔하고 뻔하다고 웃어넘겼던 계약결혼이나 동거 로맨스가 스쳐 지나간다. 작가님, 결국엔 키스하며 끌어안는 남녀 주인공을 보며 혀를 찼던 저를 용서하세요. 제가 너무 몰랐네요. 대한민국에서 살아남으려면 젊은 남성과 여성이 결합하여 한 집에서 ‘정상 가족’을 꾸려야 유리하다는 사실을.
그렇다고 드라마처럼 계약결혼을 할 수는 없는 일.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대출 받아서 보증금이랑 합쳐 월세를 전세로 돌릴까? 매월 납부해야 하는 상환금이 월세보다 더 적으니 월 기준으로 계산하면 이득이다. 게다가 적어도 지금은 적금보다 부동산 수익률이 더 높으니까. 하지만 웬만한 조건의 집은 나 혼자 대출 받아서는 전세로 구하기 어려웠다. 이래서 다들 때 되어 좋은 사람 만나면 그냥 결혼하는 걸까? 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큰 이유이기도 하겠지.
“그냥 결혼이 부동산으로 유지되는 거란 생각을 했어. 도무지 감당 안 되는 금액의 집을 사고, 같이 갚으면서 유지되었을 뿐인 게 아닐까.”
_정세랑, 「이혼 세일」, 『옥상에서 만나요』 222쪽
그렇다고 결혼을 감행하기에는 아직 잔재하는 가부장적 전통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대출이든 결혼이든 벌써부터 미래를 저당 잡히기도 싫었다. 인기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세희 : 인생에서 이 집과 고양이, 그리고 저 자신. 이 세 가지만이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 이상의 비용과 에너지가 드는 일은 할 필요가 없죠.”
지호: 근데.. 그럼 이 집은 대출이 언제까지..?
세희: 이제 30년만 갚으면 됩니다.
지호: 30년이요? 아니, 그럼 평생을 이 집만을 위해 일해야 되는 건데 그게 좀 허망하지 않나 해서요.
세희: 대한민국에서 부동산만큼 확실한 게 있습니까?
_윤난중, 『이번 생은 처음이라 대본집』
tvN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의 두 주인공 세희와 지호는 하우스 푸어(house poor)다. 사전적으로 하우스 푸어는 ‘자기 집이 있지만 빈곤층에 있는 사람’을 뜻한다. 세희가 바로 여기에 속한다. 무리한 대출을 받아 안전한 집을 얻었지만 매달 대출을 갚느라 아끼며 사는 사람. 지호는 사전적 의미가 아닌 말 그대로 하우스 푸어, 즉 집이 없는 사람이다. 월세를 받아야 대출 갚으며 살아갈 수 있는 세희와 보증금 없는 월셋집을 구하는 지호는 서로의 조건이 맞아 계약 결혼을 한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호황기인 1988년 즈음에 태어나 불황을 겪고 88만원 세대로 불리게 된 세대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점점 더 먹고 살기 어려운 현실 때문에 사랑을 감정 소모와 비용으로 셈하게 된 세대. 지호의 친구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집이나 결혼 비용이 없어 결혼하지 못하거나 먹고 사는 일에 치이고 또 대기업의 남성중심적 문화에 시달려 연애를 꺼린다. 그 결과 이들 모두 청년 임대 사업에서 차순위로 밀리고 마는데…
물론 드라마가 이렇게 끝맺지는 않는다. 하지만 드라마에 공감했던 수많은 시청자는 드라마와 달리 정책 혜택에서 소외되고 만다. 생존을 위해 선택한 선택지가 어려운 현실을 심화시키는 셈이다. 그래서 요즘 논의되는 법이 ‘생활동반자법’이다. ‘파트너등록법’으로도 불리는 ‘생활동반자법’은 현행 민법에서 가족의 범위를 배우자와 직계혈족, 형제자매로 제한하는 것과 달리 혈연 또는 결혼이라는 제도로 묶이지 않아도 서로의 생활에 의무와 권리를 갖는 동반자와의 법적 관계를 인정한다. 이미 프랑스나 독일 등 유럽을 중심으로 아시아까지 ‘생활동반자법’과 유사한 제도가 도입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몇몇 의원을 중심으로 입법 촉구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생활동반자법’은 사회경제적으로 비혼을 결심하는 청년들이 늘어난 현 사회의 필요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다양하고 풍부한 미래를 상상하도록 돕는 단계이기도 하다. ‘생활동반자법’이 제정되면 남녀뿐만 아니라 동성끼리 위장으로 서로를 동반자로 등록하는 드라마가 나올지도 모른다. (물론 위장이 바람직하다는 건 아니다.) 깔대기처럼 하나의 선택지로 향할 수밖에 없는 사회가 아닌 다양한 형태로 안전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사회에서 자란 아이들이 꾸릴 미래는 또 다를 것이고. 하지만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이 아플 때 혈연이나 결혼 관계가 아니어도 수술 동의서에 서명할 수 있다. 보다 촘촘한 보호망 속에서 함께할 수 있다.
“생활동반자 보호법이 빨리 통과되어야 할 텐데. 요즘은 내가 원했던 것도 사실 결혼이 아니라 법의 보호를 받는 동거가 아니었나 싶더라고.”
_정세랑, 「웨딩드레스 44」, 『옥상에서 만나요』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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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은 처음이라 세트윤난중 저 | 열림원
모두가 내일을 알 수 없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초상이다. 이번 생이 처음인 어른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조금 서툴러도 괜찮다고. 너만 그런 게 아니라고. 우리 모두 이번 생은 처음이니까.
이정연(도서MD)
대체로 와식인간으로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