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희 칼럼] 영화번역가 전망이 어떻게 됩니까?
영화번역가를 희망하는 학생들을 만나는 자리면 늘 듣는 질문이다. 초중고, 대학교를 막론하고 저 질문은 수입이 어떻게 되냐는 함께 무조건 나온다. 미안하지만 글에 앞서 영화번역가를 꿈꾸는 사람들의 희망을 대번에 깨고 시작하자.
글ㆍ사진 황석희(영화번역가)
2020.03.04
작게
크게

황석희1.JPG

 

 

“저는 꿈이 영화번역가인데 주변에서 번역가는 전망이 어둡다고 합니다. 해도 될까요?”

 

영화번역가를 희망하는 학생들을 만나는 자리면 늘 듣는 질문이다. 초중고, 대학교를 막론하고 저 질문은 수입이 어떻게 되냐는 함께 무조건 나온다. 미안하지만 글에 앞서 영화번역가를 꿈꾸는 사람들의 희망을 대번에 깨고 시작하자. 전망과 수입이 문제가 아니고 일단 영화번역가가 되는 것 자체가 어렵다. 여기서 어렵다는 말은 열심히 노력하면 될 수 있다는 수준이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영화번역가는 무리해서 작업한다고 해도 한 달에 6~7편 넘게 번역할 수 없다. 사실 한 달에 6~7편이면 엄청난 속도를 가진 번역가고 영화번역가에겐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속도다. 정말 활발히 활동하는 번역가라고 하면 최소 2편에서 5편 사이를 번역한다. 개봉관 작품들을 번역하기 전 케이블티브이에 나가는 작품들을 6년 번역했는데 그 시기엔 1.5일에서 2일에 한 편씩 번역하곤 했다. 그땐 그 속도가 아니면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웠고 마감도 영화 한 편에 3일 이상 주질 않았다. 그 속도를 생각하면 지금도 매달 10편 번역하는 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개봉관 영화 번역 작업과 케이블티브이 영화 작업은 해야 할 일의 양이 다르다. 미편집 본이 버전 별로 와서 몇 개 버전을 번역해야 할 때도 있고 수입사와 번역본을 주고받으며 의견을 수정하고 내부 시사에 참석해서 자막을 확인하는 등 일정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이런 일정을 생각할 땐 활발하게 활동하는 영화번역가가 한 달에 소화하는 양이 최소 2편에서 5편인데 그 페이스로 활동하는 영화번역가는 국내에 5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중 과반수는 20년 정도 개봉관 영화 번역 업계에서 활동 중인 번역가들이다. 영화번역가를 희망한다면 그 5명 안에 들어야 하는데 기존 번역가들이 20년씩 자리를 지키는 시장에 진입하는 게 얼마나 어려울지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영화번역가가 50명, 100명이라면 진입할 틈이 있겠지만 그래 봐야 5명인 시장에 진입하겠다는 건 누가 봐도 무리다.

 

그렇다고 영화를 번역할 기회가 영영 없는 것은 아니다. 영상번역 경력을 차근차근 쌓아서 영화제 작품들을 번역하면 된다. 운이 좋다면 영화제에서 작업한 자막 그대로 개봉을 하는 일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영화제 측에서 받은 자막이기 때문에 번역가 크레딧은 거의 올려주지 않는다.

 

또 하나 영화를 번역할 기회는 넷플릭스나 아마존 프라임 같은 OTT 서비스의 오리지널 영화다. 아마존 프라임 영화들은 아직까진 국내 수입사에서 가져오고 있지만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들은 넷플릭스 콘텐츠를 번역하는 번역가들이 작업한다. 넷플릭스 콘텐츠를 번역하는 번역가들은 저 위에서 말한 케이블티브이 번역가 풀과 같다고 봐도 된다. 요즘은 케이블티브이 작업 물량이 OTT 서비스 작업 물량보다도 적을 것이다. 전엔 이미 개봉했던 작품이 케이블티브이에서 상영하는 경우를 빼면 케이블티브이 번역가들은 영화를 번역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실력만 인정받으면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들을 번역할 기회들도 얻을 수 있다. 그 작품들 중엔 짧게나마 영화관에서 개봉하는 것들도 있으니 OTT 서비스가 들어오기 전엔 상상도 못 하던 기회가 생긴 것이다. 정식 개봉작을 작업한 것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내 이름이 개봉관 스크린에 올라간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프리미엄이다.

 

글을 시작하고 여기까지 영화번역가를 꿈꾸는 이들의 희망을 참 무자비하게도 깨버렸다. 아주 의도적으로 짓궂게. 괜히 성의 없는 사람에게 말해주기 싫은 심보랄까.

 

지금부터는 내가 생각하는 영화번역가 되는 방법을 가설로 풀어보겠다. 가설이라고 하는 이유는 아직까지 이 방법으로 영화번역가가 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기존 번역가들은 대부분 영화사 지인의 소개로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 방법을 추천할 순 없고 내 경우는 워낙 예외적이어서 더욱 추천하기 어렵다.

 

현재 영화번역가가 되는 방법 중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것은 바로 위에 쓴 것처럼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를 통해 개봉관에 데뷔하는 것이다. 정말 이슈가 되는 작품들만 홍보를 위해 짧게 개봉하기 때문에 평소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이나 수입, 배급 관계자들이 그 작품을 위해 상영관을 찾을 확률이 높다. 혹은 그 작품의 배급을 담당하는 한국 배급사에서 자막을 눈여겨볼 수도 있겠다. 이때 좋은 활약을 보이는 게 지금으로선 개봉관에 다가설 확률이 가장 큰 방법이다.

 

좋은 자막으로 인상을 남긴다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감수자를 거치기 때문에 온전한 내 번역을 선보이기도 어렵겠지만 이 정도 기회는 아예 사다리조차 없던 예전에 비하면 정말 큰 기회다. 게다가 여기까지는 영화 번역에 재능만 있다면 시간과 노력으로 움켜쥘 수 있는 자리다. 그 기회를 어떻게 살릴지, 그 기회가 어떻게 이어질지는 장담할 수 없고 여러 운이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거기까지는 노력으로 갈 수 있다. 내가 개봉관에 진출하려 애쓰던 6년 동안엔 상상도 못 하던 기회다. 노력으로 갈 수 있는 자리가 눈에 보였다면 그렇게 막막하진 않았을 텐데.

 

흔치 않은 예로 수입사에 들어가서 이런저런 경력을 쌓고 사내에서 번역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지만 개봉관 경력으로 꾸준히 이어지는 예는 아직 보지 못했다. 영화사에 있는 지인이 덜컥 소개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이것보다 좋은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

 

전망이 좋지 않다고 해서 좇을 수 없다면 꿈이라고 할 수 없는 것 아닐까. 앞이 캄캄해도 아주 어렴풋하게 보이는 희망 하나를 바라보고 바보같이 좇아야 꿈이다. 전국 5명 안에 들어야 한다면 전망이 문제가 아니라 이뤄낼 가망이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가망 없는 길을 뚫어내겠다는 바보 정도는 돼야 억지로라도 길이 생기지 않을까. 전망이 계산에 들어간 시점부터 꿈이란 말은 어불성설이다.

 


 

 

롱 웨이 다운제이슨 레이놀즈 저/황석희 역 | 밝은세상
그의 10대 시절이 그대로 녹아 있는 책이다. 어느 날 저자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레이놀즈와 다른 친구들은 소중했던 친구의 집 거실에 모여들었다.

 

 

 

 

 

배너_책읽아웃-띠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YES24 채널예스

#영화번역가 #황석희 영화번역가 #롱 웨이 다운 #영화사
0의 댓글
Writer Avatar

황석희(영화번역가)

번역가이자 남편, 아빠이다 2005년부터 번역을 시작하여 주로 영화를 번역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보헤미안 랩소디>, <캐롤>, <데드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