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늦게까지 회식을 한 다음날이었다. 어디 큰 술독에 몸을 푹 담갔다가 뺀 듯이 알코올 냄새가 폴폴 풍기는 몸뚱이를 이끌고 사무실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 키득대고 있었다. 그중 한 선배가 이제 막 사무실에 들어서는 나를 발견하고 말했다.
“이야~ 용자(용감한 사람) 오셨네.”
내가 왜 용자인지 몰라 어버버하고 있자, 그 선배가 장난기 가득 섞인 얼굴로 본인의 휴대폰 화면을 내 얼굴 가까이 들이밀었다. 놀랍게도 동영상 속의 나는 회식 자리에서 나보다 직급이 한참 높은, 그러니까 나의 상사의 상사쯤 되는 B 앞에 앉아 목소리를 한껏 높이고 있었다. 그것도 반쯤 풀린 눈을 한 채 말이다.
“B님은 저희가 말하는 건 항상 안된다 하시고오~ 보고도 여러 번 하게 하시고오~”
영상 속의 나로 보이는 그 고주망태는 B에게 한 달 내내 팀 사람들 모두를 야근에 몰아넣었던 프로젝트에 대해 하소연하고 있었다. 아뿔싸, 영상을 보니 지난밤의 기억이 조금 돌아오는 것도 같았다. 얼굴이 확 달아오르면서 정수리 쪽에서 식은땀이 분출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B는 내가 보고 때 마주하는 ‘어려운 상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까지만 했으면 참 좋을 뻔했다. 몇 초 뒤 나는 야무지게 주먹을 쥐고 상사의 머리를 ‘콩’ 하고 쥐어박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장면은 정말이지 비현실적이었다. 영상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일제히 커졌다. 어떤 선배는 너무 웃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나는 차마 더 볼 수가 없어 영상을 정지시키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선배들은 ‘괜찮아, 괜찮아.’ 했지만 나는 내 자리로 돌아가 깊은 절망에 얼굴을 파묻었다.
회사에서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라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나는 평소에 절대 선을 넘지 않는 사람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항상 깍듯이 대했으며, 그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늘 애쓰고 있었다. 혹시 무례하게 느껴질까 봐 친분이 아주 깊은 사이가 아니고서는 살갑게 굴지도 않았다. ‘상사 머리 때리기’ 사건 전까지는 그렇게 내가 설정한 바운더리 내에서 모든 인간관계가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평소 저녁 회식은 당돌하게 거절하는 막내였는데, 고된 프로젝트가 끝나고 오랜만에 회식에 참여해서 벌어진 일이라 더욱 억울했다.
그날, 나는 상사 B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숨어 지냈다. 선배들은 중간중간 내 책상에 와서 ‘사람 다시 봤어.’ 하면서 나를 놀렸다. 다행히 어제 회식 분위기는 유쾌했던 것 같았는데, 나는 B에게 사과를 드려야 할지, 아니면 그냥 모른 척 넘길지 고민하면서 초조하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퇴근 시간 즈음, B에게 메시지가 왔다.
‘괜찮으면 저녁이나 같이 먹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회사 앞 일식집에 B와 어색하게 마주 앉아 지난밤의 결례를 고개 숙여 사과드리고 있었다. 내가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쩔쩔매자 B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매일 퇴근 시간이나 기다리는 깍쟁이 90년대생인 줄 알았는데, 어제 보니 일에 대해 열정도 크고, 하고 싶은 말도 속 시원히 하더라. 다음부터는 술의 힘 빌리지 말고 언제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전날의 숙취가 채 가시기도 전에 B와 나는 또 정답게 술잔을 기울였고, 그로부터 2년이 흐른 지금, B는 나의 인생 선배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사람을 사귈 때 보이지 않는 선 같은 것은 잘 설정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선을 훌쩍 잘 넘어버린다. 선을 잘 지키면서 사는 세계는 늘 안전하겠지만, 딱 그만큼의 인간관계를 유지하게 될 것임을 안다. 여기가 나의 일터라고 계속 마음의 울타리를 단단히 쳐놨으면 나는 평생 B와 같은 사람과는 가까워질 수 없었을 것이다. 너무 무례하지 않은 선에서 따뜻한 태도로 마음의 벽을 먼저 허물어 보는 것, 때로는 먼저 살갑게 다가가기도 하는 것. 그런 태도가 내 인간관계를 더 풍요롭게 한다고 믿는다. 나는 앞으로도 꾸준히 선을 넘어보려 한다.
단, 술의 힘을 빌리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모범피 모범생이 아니고 싶은 모범생. 글쓰고 디제잉하고 요가를 합니다.
* 나도, 에세이스트 공모전 페이지
http://www.yes24.com/campaign/00_corp/2020/0408Essay.aspx?Ccode=000_001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모범피(나도, 에세이스트)
불치의 사춘기를 앓으며 디제잉하고 글 쓰고 요가를 합니다.
-
2020.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