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보라는 항상 같은 문장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안녕하세요. 농인 부모로부터 태어난 것이 이야기꾼의 선천적 자질이라고 굳게 믿고,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이길보라입니다.” 글이든 영화든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말을 할 수 있게 된 이후부터 통역을 했으니까요. ‘너희 부모님은 왜 말을 못해?’, ‘부모님은 들리는 거야?’, ‘말은 할 수 있는 거야?’ 그게 아니라, 들리지 않지만 말은 할 수 있고, 말은 할 수 있지만 음성언어가 되지 않아. 동시에 청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그러는지를 부모님에게 전해야 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자가 됐어요.” 열여덟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8개월간 동남아시아를 여행한 후 『길은 학교다』를 썼고 그사이 첫 다큐멘터리 <로드스쿨러>를 만들었다. 아버지 이상국, 어머니 길경희와 자신의 일상을 담은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를 만든 다음에는 동명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올해 초 개봉한 <기억의 전쟁>은 전쟁, 정확히는 비남성의 시선으로 본 베트남 전쟁에 대한 기록이다. 두 영화 사이에 있었던 일은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에 담았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네덜란드 필름아카데미 유학비를 모금한 일, 학생이면서 동시에 감독으로 산 경험 등을 적었다. 부제는 ‘삶의 지도를 확장하는 배움의 기록’이다.
어젯밤 트위터에 <책읽아웃>과 관련한 맨션을 올렸어요. 오늘 영상 촬영도 한다면서요?
어제 갑자기 연락이 왔어요. 영상을 찍고 자막도 넣자. 라디오나 팟캐스트에 출연하면 그 점이 늘 아쉬웠죠. 부모님은 들을 수 없으니까, 농인들은 들을 수 없으니까. 어제 제안을 받고 ‘같이 바꿔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았어요. 그동안 헛일을 한 건 아니구나 싶기도 했고요.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에필로그에 이런 문장이 나와요. “이 책은 단순한 유학기 혹은 헬조선 탈출기라기보다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직접 다 해본 경험의 기록이다.” 그 기록을 공유하고 싶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예술가로서 삶의 지속 가능성을 타진해보고 싶어서 네덜란드로 갔어요. 이 책에 명확한 깨달음이 나와 있지는 않아요.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을 보고 시도와 모험을 하겠죠. 그 사람이 누군가와 그 경험을 나눌 테고요. 그러다 보면 우리가 또 하나의 궤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아버지의 “괜찮아, 경험” 한 마디가 네덜란드행의 동기였던 걸로 알고 있어요.
아버지는 이렇게 해서 시간을 버리고, 저렇게 해서 돈도 버렸지만, 그럼에도 “괜찮아, 경험” 하고 유쾌하게 넘어가며 살고 계신 거예요. 나보다 훨씬 오래 살았고 훨씬 많은 경험을 했는데, 아직도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고요. 그러니 나도 더 배우자. 그렇게 된 거죠.
영화와 책을 보고 ‘아차!’ 싶었어요. 이 사람은 ‘부캐’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이 모든 게 이길보라 안에서 하나로 응축된 상태라는 걸 알겠더라고요.
맞아요! 하지만 다양한 역할을 하는 건 아주 긍정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가령 제 배경이 풍성해진 데는 농문화와 청문화를 동시에 경험한 유년 시절이 있었어요. 저는 농사회에 속하기도 하고, 청사회에 속하기도 하고, 둘 모두에 속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죠. 그렇지 않았다면 열여덟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동남아시아로 떠날 수 없었을 거예요. 어릴 때부터 잘 모르면서 괜히 그곳 사람들이 좋았어요. 저에게 전혀 다른 두 세계를 오가는 건 굉장히 아름다운 일이에요. 친숙한 일이기도 하고요.
이번 책에 스승 어딘이 쓴 필름아카데미 추천사 전문이 나와요. “이길보라의 작업 스타일은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그것을 바탕으로 영상 작업(다큐멘터리)을 하고 다시 그 둘을 결합해 책을 출간하는 형식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그렇게 해왔어요.
저한테는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에요. 영화도 글에서 시작하니까요. 하지만 두 결과물을 똑같이 만들지는 않아요. 글이 할 수 있는 일과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은 달라요. <반짝이는 박수 소리>의 경우, 영화의 내러티브 바깥에 있는 이야기들이 책이 됐어요. 엄마 아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영화 안에 넣을 수는 없었거든요. 그런가 하면 엄마 아빠가 어떤 표정을 써서 말하는지는 영화로 보여주는 게 효과적이고요. 이렇게 웃는 사람이구나, 이렇게 우는 사람이구나. 그 모습을 눈으로 봐야 선입견을 내던지고 캐릭터를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
이길보라의 ‘본캐’는 무엇일까요?
다양한 매체를 매개로 이야기하는 사람. 누군가는 “어떻게 책도 쓰고 영화도 찍어요?” 하고 묻지만, 저에게는 모든 것이 한 덩어리예요. 아름다운 일들을 기록하고 말하기 위한. 그런가 하면 저는 활동가의 정체성도 가지고 있어요.
활동가라고요?
작년부터 코다(CODA, 농인 부모 아래서 태어나 자란 사람)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지금은 책 『서로 다른 기념일』의 북 토크를 꾸려보려는 중이고요. 일본 농인 사진가 부부가 코다 아이를 키우면서 한 기록을 담은 책인데, 아주 좋아요. 북 토크는 쉽지 않을 거예요. 일본 수어와 한국 수어가 다르고, 또 청인들도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해서요. 무엇보다 코로나잖아요. 이 많은 문제를 끌어안고 어떻게 잘 해낼까, 이런저런 상상을 하면 즐거워져요.
도대체 이 많은 일은 언제 다 하는 거죠?
계획 세우기를 좋아해요. 잘 지키기도 하고요. 하지만 주말에는 반드시 쉬어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산에 가고 바다에 가죠. 평일에도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 사이에만 일하고요. 단, 글은 새벽에 써요. 요즘은 프리랜서의 생활 방식을 만끽하고 있어요. 알람을 맞추지 않고 잘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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