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고서야 알았다. 집안이 얼마나 적막한지. 갑자기 훅 하고 쓸쓸한 생각이 몰려와서 괜히 거실과 주방의 전등을 몇 번인가 껐다 켰다 반복하다, 그냥 그대로 주욱 켜두기로 했다. 정말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낮에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시가로 떠날 때만 하더라도 이런 순간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마감이라는 급한 용무가 따로 있긴 하지만 어쨌든 집에 홀로 남을 수 있음에 얼마나 쾌재를 불렀던가.
결국 심난한 마음에 글을 쓰다 말고 밖으로 나왔다. 목적지도 없이 밤거리를 정처없이 걷는 동안 삼삼오오 어울리는 이들의 즐거운 얼굴만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이 세상에 나만 혼자인 듯 하여 마음이 한도 끝도 없이 가라앉았고, 곧이어 그런 스스로가 어처구니 없어 웃음이 나왔다. 사람이란 참으로 이상하기도 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혼자만의 시간이 생기길 그토록 간절히 바랬건만, 아이들과 씨름할 때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혼자가 되면 소원이 없겠다고 그리도 되뇌었건만, 막상 혼자가 되자 이렇게나 누군가를 그리워하다니.
캐럴라인 냅의 『명랑한 은둔자』를 읽는 동안 몇달 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혼자이고 싶어하면서 혼자인 것이 못내 두려운 상태, 편안함과 불안함이 공존하는 상태, 세상 모두는 저 바깥에 있고 나만 홀로 진공관 속에 갇힌 듯한 상태, 사람을 꺼리면서 사람을 그리워하는 참으로 모순적인 상태. 이러한 상태를 가리켜 캐럴라인 냅은 ‘고독’의 즐거움과 ‘고립’의 절망감이 혼재된 상태라 이야기한다.
2002년, 42세의 나이에 폐암으로 사망한 미국작가 캐럴라인 냅은 전형적인 ‘내향형’ 인간이었다. 조심스럽고 수줍은 성격으로 대개의 사람과 만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며 꺼려하였던 냅은 자연히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지냈는데, 그와 같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홀로 있을 수 있다는 안도감과 홀로 견뎌야 한다는 압박감을 동시에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압박감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대상에 중독되었다고.
실제로 냅은 대학시절 몇 년 간 심각한 거식증을 앓았고, 훗날에는 오랜 기간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리기도 했으며, 여러번의 나쁜 연애를 거치는 동안 연애 상대에게 심한 의존과 집착을 통해 자기 파괴적인 행위를 하기도 했다. 『명랑한 은둔자』는 이러한 냅의 에세이 모음집으로 냅이 그처럼 암담한 시기를 통과하며 겪었던 일들에 대한 일종의 회고록이다. ‘고독’의 즐거움과 ‘고립’의 절망감 사이의 위태로운 토로가 보여주듯 모순과 양면성으로 가득한 글들이 실려 있다. 부모에 대한 애착과 원망, 절식과 폭식, 알코올에 대한 심각한 의존,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혐오. 사실 생각해보면 책의 제목부터가 그러하다. 『명랑한 은둔자』라니.
혹자는 이런 경험을 한 냅을 두고 참으로 극단적이며 불안정한 사람이라 여길 수도 있겠으나 흥미롭게도 냅은 오히려 완벽주의에 강박적인 성격이었다. 그러니까 스스로에 대한 규율과 통제 욕구가 지나치게 강했던 나머지 조금이라도 흔들린다고 느끼면 그대로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곤 했던 것이다. 얼핏 모순적으로 느껴지지만 시험 공부를 완벽하게 못할 것 같을 때 아예 그만두어버린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터.
나 역시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 같은 일은 일찌감치 포기해본 경험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일까. 책을 읽는 동안 마치 나의 마음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아 깜짝 놀란 적이 여러 번이었다. 술을 마시는 이유, 몸에 대한 강박, 인간 관계에서의 불안, 누군가와 친밀해지고 싶은 욕구와 밀어내고 싶은 욕구 사이에서의 위태로운 외줄타기, 인정욕구와 자기혐오. 중독을 두려워할수록 점점 더 강하게 빠져드는 마음 같은 것 말이다.
다행히도 냅은 여기 실린 글들을 쓸 즈음에는 거식증은 극복하고 술은 끊었는데, 거식증에 시달렸던 계기와 극복한 동기, 술을 마셨던 이유와 끊게 된 이유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불안과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금이라도 스스로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기 위해 굶거나 술을 마셨고, 나중에는 굶거나 술을 마시는 것으로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음식을 먹기 시작하고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맨 정신’인 상태의 냅은 음식이나 술에 관심을 돌리지 않고, 운동이나 특정인과의 관계로 도피하지 않고 스스로를 직면하기 시작한다. 위험을 감수하면서, 기꺼이 취약해질 준비를 하면서.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내내 불안과 우울, 내적 혼돈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책을 읽으며 덩달아 우울해지거나 어두워지는 대신 알 수 없는 용기를 얻었다. 이 책을 번역한 김명남 번역가는 냅의 글을 하나의 키워드로 요약하라면 ‘변화’를 꼽을 것이라고, 냅의 글은 늘 나쁜 습관이나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나는 오히려 ‘용기’를 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그대로 직면하는 용기,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내면의 혼돈과 불안을 그대로 수용하는 용기.
늘 생각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관계’는 다 어렵지만, 결국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스스로와의 관계인 것 같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그런 면에서 냅의 책은 훌륭한 가이드북이 된다. 마치 ‘나’ 사용설명서 같다고나 할까. 내가 아는 모든 쓸쓸한 이들, ‘고독’과 ‘고립’의 경계 사이에서 늘 헤매는 이들에게 한 권씩 선물하고 싶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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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혜(작가)
작가. 에세이『다정한 무관심』,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