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장>, K-도터를 아십니까
“세기말적 가부장제에 작별을 고하다”라는 타이틀대로, <이장>은 각자 쌓인 것도 얽매인 것도 많았던 자매들이 입을 열어 말하고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하며 가부장제의 관성에서 함께 벗어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글ㆍ사진 최지은(칼럼니스트)
2021.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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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장>의 한 장면

K-팝, K-방역, K-좀비의 시대를 맞아 오늘은 ‘K-도터’ 얘기를 해보려 한다. 트위터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표현인 ‘K-도터’, 즉 ‘한국의 딸(daughter)’이 혹시 ‘국가대표’ 같은 건가 싶다면 오해다. K-도터는 대개 자조적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다. 지난 칼럼에서 다룬 웹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한국에서 수많은 아들과 딸은 같은 집에서 다른 세상을 산다. 아들 없이 딸만 있는 가정의 자매에게는 “대가 끊겨 큰일”이라는 타박과 “그러니 (부족한 딸인) 너희가 (존재만으로도 효의 완성인 아들보다) 더 효도해야 한다”는 압력이 가해진다. 이처럼 가정 안팎의 성차별적 토양에서 자라온 딸들은 분노, 서글픔, 억울함, 원한, 그리고 본의 아니게 내면화된 책임감, 인정욕구, 효(!) 강박 등 다양한 감정이 끈끈하게 엉겨 K-도터인 자신을 구성하는 동시에 구속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영화 <이장>은 바로 그 K-도터들의 이야기다. 첫 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덕담을 가장한 망언에서 알 수 있듯 K-도터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짐을 진 자로 불리는 ‘K-장녀’ 혜영(장리우)은 범상치 않게 속 썩이는 아들 동민(강민준)을 혼자 키우며 직장에 다니는 싱글 맘이다. ‘장녀답게’ 성실히 살아온 게 분명해 보이지만 가장이자 양육자로 고군분투하다가 한계에 부딪힌 그에게 아버지의 묘를 이장해야 한다는 문자가 날아오며 딸들의 여정은 시작된다. 참고로 K-도터의 분노를 유발하는 대표 키워드로는 ‘명절, 제사, 조상’ 등이 있다. 

한때 누구보다 가까운 존재였지만 어느 순간 보면 놀라울 만큼 다른 인간이 되어 있다는 게 동기간의 신비일 것이다. 수더분하고 느긋해 보이지만 결혼 생활에 닥친 위기를 숨기느라 심란한 금옥(이선희), 야무지게 살려 애쓰지만 하필 부모에게서 독립하지 못한 남자와 결혼을 앞두어 속 터지는 금희(공민정), 학내 성폭력을 고발한 페미니스트이자 언니들에 비해 과격한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혜연(윤금선아) 등 네 자매는 성격도 사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친구나 직장 동료보다도 애매한 타인이 된 서로를 견디며 목적지로 향하는 이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이장 보상금 5백만 원이다. 


영화 <이장>의 한 장면

그러나 큰아버지가 네 자매의 막냇동생이자 ‘장남’ 승락(곽민규) 없이 이장은 불가능하다고 억지를 쓰면서 사태는 꼬이기 시작한다. 집안의 실질적 기둥은 돈 필요할 때만 연락하다 잠적하기 일쑤인 승락이 아니라 혜영인데도 가부장제의 화석 같은 큰아버지는 아들 타령을 멈추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승락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난 자매들의 피로, 짜증, 환멸 가득한 표정은 왠지 친숙하다. 종일 전을 부치고도 제사상에 절하기를 허락받지 못했거나 여자끼리 작은 상에서 식은 음식을 데워 먹어야 했을 때 우리의 얼굴에 떠올랐을 바로 그 표정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승락의 전 여자친구 윤화(송희준)가 등장하면서 여정은 좀 더 복잡해지는데 “며느리 생기면 유학파도 유교파가 되는 게 한국 시부모들이야.”, “고추가 무슨 벼슬이에요?” 등 신랄한 대사와 배우들의 연기가 착 붙어 지루할 틈이 없다. 무엇보다 스트레스를 눌러 참다못해 얼굴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듯 지쳐 보이는 혜영 역 장리우 배우의 존재감이 인상적이다. 

가족의 일이란 게 대개 그러하듯, 어떤 문제는 간신히 정리되고 어떤 문제는 남겨진 채 영화는 막을 내린다. 다만 “세기말적 가부장제에 작별을 고하다”라는 타이틀대로, <이장>은 각자 쌓인 것도 얽매인 것도 많았던 자매들이 입을 열어 말하고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하며 가부장제의 관성에서 함께 벗어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가부장제의 수혜자였지만 가부장의 자리를 회피하고 싶어 하는 승락, 가부장제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미래 세대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동민 등 세상의 변화 속에서 스스로 변화해야만 하는 남성들을 묘사하는 방식에는 남성인 정승오 감독의 고민도 드러난다. 정신 차려 보면 다가와 있을 설을 앞두고 K-도터로서 전의를 다지기 좋은 영화다. 자매들이 큰아버지의 반대를 넘어 아버지의 유골을 화장하기로 하듯, 그냥 좀 태워 보내야 할 것들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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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칼럼니스트)

대중문화 웹 매거진 <매거진t>, <텐아시아>, <아이즈>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괜찮지 않습니다』와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