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이다. 열흘도 더 전에 꽃 시장에서 데려온 꽃들이 여전히 싱그럽게 웃고 있다. 수년 전 우연히 보고 한눈에 반해, 매년 겨울이 오길 기다려 집에 이 꽃만 주구장창 들여놓는다. 꽃의 이름은 버터플라이 라넌큘러스. 정말 나비가 팔랑팔랑 날갯짓을 하듯 절로 아름답게 흐드러지는 우아하고 멋진 꽃이다.
억울하다. 이렇게 사랑하는 꽃을 뒤로하고 꼬박 한 주를 끙끙 앓기만 했다. 갑자기 스트레스성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들의 집단 공격을 받아 종일 병상에 누워 커튼 속 꽃무늬만 헤아렸다. 화병의 물을 갈아줄 때가 됐는데, 줄기 끝을 잘라줘야 하는데, 어서 돌보지 않으면 모두 시들어 죽어버릴 텐데…… 흐물흐물해진 몸속에 불안과 초조만 잔뜩 피어오른 지독한 일주일을 보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겨우 정신이 들어 살펴보니, 꾹 다물었던 작은 꽃봉오리들이 그새 시들기는커녕 화병 안의 물을 모두 삼키고 활짝 피어나 있었다. 전보다 더 풍성하고 해사한 다발로 자라나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뭉클했다. 꽃들은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만 살아내고 있었다. 늘 그랬듯 자신을 소중히 지켜내며 어린 봉오리들까지 모두 부지런히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래. 그럼 그렇지. 누가 누굴 걱정하고 앉았니…… 나나 잘하자. 제발 나도 꽃처럼, 잘 좀 살아보자, 쫌!
역시 꽃은 늘 옳다. 꽃을 보고 있으면 꽃에 어울리는 좋은 생각들이 떠오르고, 좋은 에너지도 생겨난다. 그래서 꽃을 정말 좋아한다. 꽃을 선물로 받는 것도 좋아하지만, 주는 것도 진짜 좋아한다. 꽃을 사는 것도 좋아하는데, 키우는 것은 더 좋아한다. 시시각각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는 꽃의 모든 시절을 다 좋아한다. 꾹 다문 봉오리들이 절로 피어나는 순간부터, 최선을 다한 잎들이 자연히 고개를 떨구는 순간까지. 꽃이 있는 풍경에는 늘 애틋한 감동이 있다. 피고, 지고, 다시 피어나는 생명이 선사하는 친밀하고도 생경한 감격이 꽃 속에 늘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늘 가까이에 꽃을 두려고 노력한다. 꽃을 통해 손쉽게 자주 벅차오를 수 있어 정말 좋다.
늘 꽃을 좋아했던 건 아니다. 딱히 싫어했다든가 하는 건 아니고, 그냥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또 무엇이든 쉽게 깊이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건(싫은 마음을 애써 품는 건) 참 쉽지 않은(귀찮아 죽겠는) 내 성향을 고려해볼 때, 뭔가에 무관심하다는 건 뭐랄까, 그 상대가 내 우주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나 마찬가지기 때문에……(차라리 싫다고 해). 아무튼 짧지도 길지도 않은 생의 대부분 동안, 나는 꽃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 채 그냥 살아왔다. 내가 자라나느라 바쁘고 정신없어서, 내 삶을 살아내는 것으로도 충분히 숨차고 버거워서 보지 못한 것들이 어디 꽃 하나뿐일까 싶지만.
그래도 꽃을 볼 때면 이따금 떠오르는 다정한 기억이 하나 있다. 꼬마 시절, 동과 동 사이에 크고 작은 놀이터와 화단이 꽉꽉 들어차 있는 아늑한 대단지에 살았는데, 그 땐 하루 일과가 얼마나 단순하고 알차게 구성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아침밥을 먹고 나면 자전거를 끌고 나가 단지 구석구석을 자유로이 누비고 다녔고, 점심밥을 먹고 나서는 놀이터로 달려가 한껏 뛰어 다니며 모래와 땀으로 잔뜩 치장했다. 해질녘이 되면 근처의 폭신한 풀밭에 기어들어가 네잎클로버를 찾거나 이름 모를 풀벌레들을 구경했다. 그리고 너무 늦기 전에 저녁밥을 먹으러 들어갔다. 인생에서 가장 즐겁고 알찬 하루를 보내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에는, 아직 해가 질 때도 안 됐는데 홀로 풀밭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것도 아주 속상한 마음으로. 어쩌다 그런 심정이 되었는지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눈물을 꾹 참으며 느꼈던 슬픔과 서러움만큼은 아직 생생하다. 나는 한참을 그렇게 속절없이 풀만 뜯고 있었는데, 문득 멀리 풀밭 한가운데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는 언니들 몇 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모습이 보였다. 다들 쉴 새 없이 손을 꼼지락거리며 뭔가에 한껏 몰두하고 참견하는 풍경이 무척 즐거워 보였다.
그 뒤로는 파편적으로만 기억이 난다. 그중 한 언니와 문득 눈이 마주쳤던 것 같고, 언니들 몇몇이 다가와 혼자 뭐하느냐고 물어봤던 것도 같다. 그러다 어느새 나도 언니들 사이에 끼어 앉아 있었다. 언니들은 하얀 꽃을 한 아름 따다가 반지며, 팔찌며, 커다란 화관까지 만들었는데, 누군가 내 손에도 그 하얀 꽃을 들려주었다. 그 꽃의 이름이 화단마다 흔하게 만발했던 토끼풀꽃이라는 것은 아주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꽃줄기를 반으로 갈라 다른 꽃줄기를 넣어 반지로 엮는 법을 알려준 한 언니의 손가락이 아직도 기억난다. 꽃을 만지던 그 언니의 손길이 얼마나 거침없고 정확했는지, 어찌나 부드럽고 섬세했는지도 모두 생각이 난다. 그날 오후 내내, 나는 언니들을 따라 열심히 토끼풀꽃 반지를 만들었다. 무엇이든 단숨에 멋지게 만들어내는 언니들의 손처럼, 내 손도 언젠가 멋진 손으로 자랄 수 있을까 상상하면서. 절망과 상심은 어느새 사라지고, 마음 한가득 벅찬 기대가 차올랐다.
그리고 운명처럼 꽃에 빠져들……만큼 인생이 단순하게 흘러가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따금 그날을 떠올리며 친구들과 꽃으로 이것저것 만들어보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어쩌다 한 번씩은, 꽃으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소소한 사건들을 마주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느지막이 혼자 하교하던 중 친해질 기회가 없었던 한 친구가 학교 화단에 핀 사루비아꽃을 따먹는 것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던 일이라든가, 배낭여행 중 같은 방을 쓰게 된 다른 나라 친구가 어제는 하늘이 너무 예뻐서, 오늘은 맛있는 점심을 먹어서 같은 이유로 매일 꽃을 사와 고단한 창가를 밝혔던 일이라든가 하는. 꽃잎 물들어가듯 절로 좋은 마음이 우러나는 순간들이 내게도 이따금 생겨났다.
가만. 그런데 지금 보니, 실은 꽃 때문이 아니라, 꽃과 함께 다가와준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좋아진 거였구나. 꽃 속에 사람이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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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가은(영화감독)
영화 만드는 사람. 좋아하는 게 많습니다. 단편영화 <손님>(2011), <콩나물>(2013), 장편영화 <우리들>(2016), <우리집>(2019)을 만들었습니다.
steal0321
2021.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