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으로 말하다
“손수건을 흔들면 님이 오신다기에 흔들었던 손수건 노란 손~수~건”
태진아의 ‘노란 손수건’. 빨간 손수건이나 보라, 검정 손수건이 아니라 왜 노란 손수건이어야 했을까. 노란색은 안전을 뜻한다. 님이 오신다니 님이 안전하게 돌아오길 바라며 노란 손수건을 흔든다. 세월호 사건 이후 노란 리본 달기 캠페인을 한 이유도 희생자들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의미였다.
인간은 대체로 다른 동물보다 후각이나 청각은 약하지만 시각이 예민하여 다양한 색을 인지한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색으로 소통한다. 장례식에 조문을 갈 때는 가급적 검은 옷을 입고, 소방차는 빨간색이며, 신호등의 색깔은 붉은 색과 초록색 계열로 만들어졌다. 각각의 색은 마음속에 어떤 형태와 느낌을 전달한다. 향토색이라고 할 때 핑크색을 떠올리진 않는다. 주로 흙과 초록색 식물이 어우러진 이미지를 연상한다. 시각 장애인에게 색을 설명할 경우 붉은색은 뜨겁거나 따뜻하고 푸른색은 차갑다고 설명한다. 육체노동자와 사무직 노동자를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라고 부르듯이 색은 때로 계층을 상징한다. (물론 나는 ‘블루’와 ‘화이트’로의 계층구별은 남성 노동자를 바탕으로 한 언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정치에서 빨간색은 빨갱이라는 의심을 받을 일이 없는 정치 집단, 곧 레드 콤플렉스에서 자유로운 집단이 사용한다. 한국의 국민의힘, 미국의 공화당은 모두 빨간색을 쓴다. 최순실이 박근혜 정부에서 정부 상징 색을 오방색으로 바꾸었듯이, 색의 의미는 종종 정치적이며 무언가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는다. 정치인이라면 각자 넥타이와 마스크 등의 색깔을 소속 정당의 색깔로 맞춰주는 정도는 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인간은 색깔을 ‘읽기’ 때문에 언어 속에서 색은 여러 역할을 해왔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은폐된 진실을 갈구할 때 많이 쓰이는 말이다. 2008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미사를 통해 널리 알려진 이 문장은 성서의 요한복음 1장 5절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에서 따왔다. 2014년 세월호 사건 이후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라는 노래도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로 시작하고 그 뒤에 이어지는 문장은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이다. 어둠과 빛-거짓과 참이 대구를 이룬다. 어둠은 거짓이고 빛은 참이다. 어둠은 검정으로, 빛은 흰색으로 그려진다. 이 ‘정의로운’ 문장에 괜히 부적절한 시비를 거는 듯하여 망설여졌지만, 이 문장의 의도를 이해하면서도 한계를 동시에 알아갈 때 오히려 ‘다양한 진실’이 더 잘 보이리라 생각한다.
흑과 백
색깔로 표현하기는 시각적 수사와 언어적 수사를 동시에 사용하는 방식이다. 색의 이름을 들을 때 시각적 연상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여성 생리용품 이름은 청결한 느낌을 주기 위해 ‘화이트’로 짓는다. 다른 어떤 색보다도 특히 흰색과 검은색이 절대적인 대비를 이룬다. 과거의 명예를 잃고 변질된 사람을 향해 속어로 ‘흑화되다’라고 하고, 과거의 수치스러운 경험은 ‘흑역사’라고 한다. 검정을 뜻하는 ‘흑’은 이처럼 타락과 악을 상징한다. 타락과 악은 때로 유혹적이다. <백조의 호수>에서 순수의 상징인 백조 오데트의 반대항에는 흑조 오딜이 있으며 그는 매력적이지만 사악하다. 모든 색은 보색이 있다. 빨강과 초록은 보색이지만 이 둘은 도덕적으로 적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흰색과 검정색은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반대를 뜻한다. 흰색과 검정색은 일반적으로 색상환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 색들은 색이면서도 색이 아니다.
흰색과 검은색은 인간의 이분법적 사고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색깔들이다. 흰색이 순수와 선함, 고결함을 뜻할 때 검은색은 오염되고 타락하고 더럽고 거짓된 성질이다. ‘회색분자’는 상당히 부정적 의미로 쓰이는데 회색이 바로 이분법적 틀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분법적 대립은 인종을 구별하는 언어에서 특히 강한 정치적 효과를 발휘한다. 백인은 정말 피부가 흰색인가. 흑인은 오직 검은색인가. 내 피부는 노란색과 거의 무관하지만 아시아인이기에 노란색(황인종)으로 구별된다.
인권 의식이 발달하면서 많은 언어들이 인종에 대해 언급할 때 색을 강조하지 않는 방식으로 변해왔다. Black은 African으로, Yellow는 Asian으로 부르며 지리적 위치가 색을 대신한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색’이라 부르던 색은 ‘살구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살색은 한 가지 색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색이 살구색으로 이름을 바꿔가는 동안에도 여전히 누군가는 사람을 부를 때 ‘검둥이’나 ‘깜댕이’와 같은 말을 고집한다. 그 반대인 ‘흰둥이’는 ‘검둥이’처럼 사람을 향해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흰둥이는 주로 개나 동물의 이름에 한정된다. 다시 말해 동일한 인격체로 여길수록 색깔로 표현하지 않는다.
백인은 ‘백(white)’이라는 색이 들어가지만 이때 흰색은 ‘색깔 없음’을 뜻하는 의미도 가진다. 그래서 비백인을 ‘색이 있는(colored)’ 사람으로 분류한다. ‘백인’에는 어떠한 비하나 멸시의 의미가 담겨 있지 않다. 흰색은 언제나 도덕적 우위를 점한다. 보수적이고 교양 없는 백인을 경멸적으로 이를 때면 ‘레드넥’이라고 불러 그들의 ‘색깔 있음’을 강조한다.
색과 인종주의
이처럼 색깔과 인종주의는 생각보다 관계가 치밀하게 얽혀 있다. 아프리카를 ‘검은 대륙’이라 부를 때 이 언어 안에 인종주의적 편견이 없다고 우길 수 있을까.
“검은 대륙의 코로나, 더 암울하다” 2020.12 <경향신문>
“검은 대륙의 코로나... 속수무책” 2021.1
20년 전 뉴스라면 다행이지만 최근에도 우리는 아프리카를 ‘검은 대륙’이라 호명하는 언론과 마주한다. 넬슨 만델라는 수없이 ‘검은 대륙의 대통령’으로 불리곤 했다. ‘하얀 대륙’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 어쩌다 러시아를 ‘하얀 대륙’이라 하지만 이는 사람이 아니라 추운 날씨와 눈이 많이 쌓인 설경을 뜻한다.
백인 재현의 정치학을 파헤친 리처드 다이어가 『화이트』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인간 집단을 가리키는 말로 색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분명 더 좋은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색깔로 표현하기는 때로 존재를 물화한다. 인격체를 물화하기에 익숙해지면 고등학생들이 아프리카의 장례 문화를 패러디하며 얼굴에 검은 칠을 한 것이 왜 문제인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에서 할머니 베이비 석스는 말년에 색깔만 찾았다. 노예였던 그에게 색깔은 어떤 의미였을까. 피부색으로 모든 것이 규정되던 비인격체 흑인이었던 그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닌 신분이 되자 세상의 색깔을 읊는다. ‘색이 있는’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도 색을 보며 즐기는 존재이다.
미셸 오바마의 2016년 전당대회 연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백악관’ 안에 있는 ‘흑인’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문장이었다. “매일 아침 나는 노예들이 지은 집에서 일어나 내 딸들, 아름답고 지적인 젊은 흑인 여성 두 명이 백악관 잔디밭에서 개들과 노는 걸 봅니다.” 백악관과 가장 거리가 먼 존재처럼 여겨지는 젊은 흑인 여성들이 개들과 노는 모습을 전달하는 한 문장만으로도 시대의 변화를 압축적으로 설명한다. 게다가 그는 ‘아름답고 지적인’이라는 형용사를 넣어주었다.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에서 “흑인은 아름답다”는 문화운동의 구호였다. 이는 1930년대 프랑스 식민지의 흑인 작가들이 주체가 된 네그리튀드 운동에서 비롯되었다. 악하고 열등한 상징으로 쓰이는 검정에 대한 관념을 바꾸기 위해서, 검정이 검정을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서, 검정 안에는 여러 색이 포함되어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다.
흑과 백의 선명한 분리, 나아가 백의 뚜렷한 도덕적 우위는 다른 모든 ‘색깔’이 백을 선망하도록 만든다. 흑과 구별되려면 백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비백인은 인종주의를 내면화한다. 지금, 여기에서 ‘화이트’가 아닌, ‘색깔 있는’ 우리가 다른 색깔에 대해 꾸준히 차별적 언행을 쏟아내는 이유이다. 이분법적 인종주의 구도 안에서 아시아인은 보이지 않는 인간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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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영(예술사회학 연구자)
프랑스에서 예술사회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며 예술과 정치에 대한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여자 사람, 여자』(전자책),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