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예스>에서 격주 화요일마다 ‘김지용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아직도 고민’ 상담 칼럼을 연재합니다. 독자 분들의 사연을 받아 채택된 고민에 따뜻한 처방을 드립니다. 익명으로 신청이 가능하며, 간단한 소개(연령 등)와 함께 고민을 보내 주세요. eumji01@yes24.com |
독자에게 온 사연
29살 여자입니다. 20대 중반에 대학을 들어가서 이제 4학년입니다. 제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 해낸 일 중에 그저 살아있다는 것을 해낸 사람입니다. 어렸을 때 가정폭력을 겪었고 10대 후반부터 우울증을 앓아왔습니다. 최근에는 선천성 희귀질환을 진단받았고 조금 모아놓은 돈도 마음과 몸의 치료에 쏟아 붓고 있습니다.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꾸준히 약을 먹고 상담을 하며 주요 우울도 검사에서도 수치가 확 내려갔습니다. 수면 사이클도 잡혔고 생활도 안정적으로 변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연락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즐겁게 대화를 했어요 제가 우울증을 오랫동안 앓아왔던 것도 이해해준 친구였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 주었던 친구에요. 그 친구는 본인이 ADHD가 아닐까 걱정하였고 제가 병원에 가보라고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그 친구는 다행히 ADHD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부러웠고 축하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자랑 사귀게 될까 봐 자기가 ADHD가 아니길 바랐고, 혹시나 자신이 ADHD가 맞을까 봐 병원 가기가 무서웠다는 얘기를 정신질환자인 제게 얘기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공감해주고 이해해주어야 하는 걸까요? 저는 다시 무너져 내렸습니다. 저는 정신질환자라는 말에 꽂혀버렸습니다. 아 나를 정신질환자라고 부를 수도 있겠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우울증이면 어떡할 것 같냐고 물어봤습니다. 제가 정신질환자라는 말에 불편함을 드러냈습니다. 친구는 저에게 얘기할 때 너무 긴장된다고 합니다. 혹시나 실수를 할까 봐, 자신의 얘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고도 했습니다. 정신질환자 얘기를 저한테 한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얘기를 한 거라고.
듣는 정신질환자로서 참 슬펐습니다. 저는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친구와의 우정을 지속할 수 있을까요? 우울증이 있는 사람에겐 우정과 사랑이 너무 필요로 한데 저는 트라우마가 너무 많고 우정과 사랑을 원하는 것조차 거부됩니다. 제 세계에는 사랑과 우정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폭력가정에서 자랐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혼을 했습니다. 몸은 선천성 질환으로 꾸준히 관리를 해야하며 마음도 우울증으로 꾸준히 관리를 해야합니다. 저에게는 사랑은 현실이죠, 라는 말이 너무 비수처럼 다가옵니다. 저한테 마치 너는 사랑을 할 수 없다고 못 박는 것 같습니다. 정말 많이 노력을 하고 있는데 결국 현실적으로 저는 거부됩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요? 마음을 내려놓고 싶은데 내려놓아지지가 않습니다. 평범한 사람처럼 친구를 사귀고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지용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처방전
이 사연을 받고 시간이 꽤 지났는데, 지금은 마음이 어떨지 모르겠네요. 아직도 크게 아파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안타까워요. 그런데 죄송하단 말부터 드리고 글을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빠르게 가지도 않은 이 답장이 회복 중인 상처를 어루만지기는커녕 더 자극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이런 아픔이 있을 땐 공감의 과정이 가장 우선이고, 충분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공감의 단계를 넘어 분석과 냉철한 조언을 드리는 것이 일반적인 과정입니다. 상처가 클수록 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이 지면에서 그 과정을 모두 담아낼 수는 없어요. 그래서 저는 욕심을 부려보았습니다. 앞의 단계를 건너뛰기로요. 그게 진정 독자 님을 위한 것이지 않을까…라는 제 나름의 변명을 담아 글을 시작해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독자님은 분명 현재 있는 그대로보다 상황을 더 암울하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왜 내게는 작은 행복도 허락되지 않지?’라는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독자님의 세계에 사랑과 우정은 분명 존재하며, 지금의 아픔은 누구에게나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들입니다. 고백하건대 전 이 정도의 아픔을 겪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에 걸리고 힘들어요. 당신을 괴롭히는 이 지독한 현실이 세상에 많고 많은 아픔 중 하나이기에 그저 받아들여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자기연민의 늪에 스스로를 빠뜨리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요.
분명 친구의 말은 세심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해서 안 되는 말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그 말을 꺼내기 전에 ‘혹시나 네가 상처받을까 염려되기는 하는데…’라는 식의 배려가 더해졌다면 좋았겠죠. 그런데 돌이켜보면 세심하지 못한 말들, 우리 모두 매일 하면서 살아가지 않나요? 전 독자님의 그 상처받은 감정에는 공감하지만, 오랜 기간 서로를 위로해온 소중한 친구와의 우정을 지속하기 힘들다는 그 생각의 결론에는 동의할 수 없어요. 이것으로 인해 관계가 끝난다면, 그리고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내 세계엔 사랑과 우정이 없다는 그 말이 진정 현실이 되어 버리겠죠.
같은 상황을 두고 독자님과 저의 시선은 왜 이리 다를까요? 독자님이 받은 큰 상처에 왜 저는 그 정도의 일은 아니라고 말하는 걸까요? 이는 독자님에게 완벽한 대상을 바라는 강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너무 강한 소망은 ‘완벽하지 못하면 없는 것과 똑같아’라는 식의 생각의 오류, 흑백논리에 빠지게 만들죠. 독자님에겐 친구가 없지 않습니다. ‘세심하지 못한 발언으로 내게 상처를 준, 그러나 오랜 기간 신뢰를 쌓아왔던 좋은 친구’가 있죠.
이 완벽한 대상을 바라는 마음은 과거의 결핍으로부터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마침 제가 어제 읽은 책의 저자분이 아마도 독자님과 비슷한 과거를 가지고 계신 것 같아요. 어린 시절 힘들었던 가정사, 그래서인지 지금은 아예 연을 끊어버린 가족들, 최근에 받은 희귀난치병 진단까지. 이분의 마음도 힘든 길을 겪었습니다. 고백하며 다가오는 친구의 말도 의심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스스로의 세계에서 사랑을 없앴고, ‘넌 좀 사람 질리게 만드는 데가 있어’라는 말을 친구에게 듣기도 했죠. 『별것 아닌 선의』의 저자 이소영 교수님은 이런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상흔이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던 게 아니라, 나 스스로 자기연민의 고치를 만들어 거기 숨고자 기억을 붙들고 되새김질했던 셈’이라고.
자기연민. 이 역시 듣는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이기에 진료실에서 가급적 꺼내지 않으려 하지만, 가끔씩은 고민 끝에 꺼내게 됩니다. 전 자기연민은 그 자체로 필요했기에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해요. 상처받는 자아를 달래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생겨난 적극적인 자기애, 일종의 방어 기제라고요. 그 정도로 힘든 상황이어야만 나의 아픔 또한 정당화될 수 있으니까. 내가 힘든 것이 약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상황 때문이 될 수 있으니까요.
자기연민의 고치 속, 그 좁은 세계에서는 사랑도 우정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아픔과 어둠 밖에 보이지 않죠. 하지만 그것을 뚫고 나오면 많은 것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실제로 독자님의 우울증은 호전되고 있고, 완벽하지는 않아도 충분히 좋은 친구가 곁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고치 속에 갇힌 사이 지나친 사랑이, 앞으로 다가올 사랑이 아직은 눈에 띄지 않은 것뿐 아닐까요?
글을 마무리하는 이 순간까지도 고민이 많았어요. 공감의 심정 만을 가득 담은 글을 다시 쓸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아예 다른 사연에 답장을 드릴지. 저의 섣부른 조언이 독자님의 상처를 더 아프게 하지는 않을지. 이런 고민을 담은 제 글이 너무도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독자님의 삶에 분명히 함께 하고 있을 우정과 사랑을 찾아내는데 작은 도움이 되길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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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용(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책 <어쩌다 정신과의사>를 썼고 팟캐스트 <뇌부자들>을 진행하고 있다.
rahong
2021.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