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오은): 오늘 주제는 ‘이것이 진짜 페이지터너 아니겠어요?’예요.
캘리: 요즘에는 책장 넘어가는 게 아까울 정도로 잘 읽히는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정말 많은 것 같아요.
프랑소와 엄: 외국 작품을 읽을 때 페이지터너 느낌으로 읽을 수 있으려면 좋은 번역이 진짜 중요하죠. 그래서 저는 번역가의 책을 가지고 왔습니다.
캘리가 추천하는 책
현호정 저 | 사계절
구수정이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고 예언한 사람의 이름은 북두(北斗)다.
북두칠성에 북두를 쓰는 그는 근방에서 가장 용한 입시 전문 점쟁이었다. 종이에 사주를 풀어 확률을 계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해진 진실을 선언하는 반신(半神)이었다.
구수정은 열아홉살 소녀예요. 대학을 어디 가게 될지 궁금해서 입시 전문 점쟁이인 북두를 찾아간 거죠. 원래 북두는 사람들이 찾아가면 방석에 엉덩이를 대기도 전에(웃음) 어느 대학에 가는지 얘기해 주는 사람이래요. 그런데 구수정한테는 대뜸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어”라고 말하는 거죠. 이 소설은 ‘단명소녀’인 구수정이 죽음을 피해서 끝에 끝까지 달려가는 이야기예요.
이야기 설정의 매력만큼이나 구수정이라는 캐릭터의 매력이 대단하거든요. 북두가 구수정에게 죽는다고 얘기하잖아요. 그 얘기를 듣고 구수정이 제일 먼저 한 말이 뭔 줄 아세요? “싫다면요?”예요. 너무 멋있죠. 그 말에 북두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죽음이라는 게 먹구름이 오는 것과 같아서 소나기 내리는 것처럼 확 달려오는 게 죽음이니까 이보다 빨리 달리면 마치 비를 안 맞을 수 있는 것처럼 죽음을 좀 늦출 수는 있다고요. 그러면서 수정한테 남동쪽으로 가라고 말하죠. 수정은 그 말을 듣고 곧 길을 떠나요. 연명하는 길 위에서 수정은 하늘을 나는 개도 만나고요. 사지가 모두 눈으로 되어 있는 눈-인간도 만나고, 입이 모기의 것인 모기-인간도 만나요. 그밖에도 저승의 신이나 소인 같은 다양한 존재들을 만나거든요. 이 소설에는 이렇게 강렬하고 개성 있는 캐릭터들이 마구 등장하고요. 계속 폭발하는 이야기예요.
구병모 작가님이 ‘몽환과 비현실의 세계에 단도직입으로 다가서는 천연덕스러움이 돋보였다’고 추천사를 쓰셨는데요. 소설에서 주인공 수정이 길을 떠나잖아요. 그러다 소설이 갑자기 환상의 세계로 확 들어가거든요. 그게 아무런 설명도 없고요. 독자한테 준비를 시키는 것도 전혀 없어요. 그런 박력 같은 게 현호정 작가님께 있는 것 같고요. 이 소설에는 그런 호방함, 그냥 막 날아가고 뛰어가고 싸우는 일들이 가득 담겨 있어서 진짜 정신 못 차리고 읽게 되는 것 같아요. 잠깐 완전히 다른 세계로 옮겨가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해요.
불현듯(오은)이 추천하는 책
임진아 저 | 미디어창비
이 책의 구성은 이렇습니다. 먼저 두세 편의 만화가 나오고요. 그 뒤에 임진아 작가님이 그것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쓴 짧은 글이 등장해요. 만화에서는 ‘생활견 키키’가 상황을 주도하거나 멋진 말들을 쏟아내는 역할을 하고 있고요. 글은 ‘반려인 진아’가 이런 상황에서 느꼈던 것들을 담담하고 따뜻하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어제 유희경 시인님이 나오셨잖아요. 유희경 시인님의 첫 시집이 『오늘 아침 단어』죠. 이 책의 제목은 『오늘의 단어』예요. 그리고 유희경 시인님의 최근 산문집 『세상 어딘가에 하나쯤』은 서점의 사계절을 다루고 있는데요. 『오늘의 단어』는 우리 일상의 사계를 다루는 책이에요. 또 있죠. 유희경 시인님의 첫 산문집 제목이 『반짝이는 밤의 낱말들』이거든요. 이렇게까지 말하면 감을 잡으셨을 텐데요. 시인의 책들, 『오늘 아침 단어』, 『반짝이는 밤의 낱말들』, 『세상 어딘가에 하나쯤』은 어쩌면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을 작게 나누는 일이었던 것 같고요. 임진아 작가님의 『오늘의 단어』는 오늘 하루를 통틀어서, 아침부터 잘 때까지 모두 아우르는 책이라서서요. 유희경 시인님의 책이 미분하는 책이라면 임진아 작가님의 책은 적분하는 책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두 분 책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다는 것. 이렇게 다정한 사람들이 세상에 있구나, 또 한 번 안도하게 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머릿말에 “키키와 진아는 함께인 시간이 소중하기에 하루를 성실히 관찰합니다. 어제는 어떤 단어가 머물렀을까, 오늘 우리에게 다가온 단어는 무엇일까 신경 씁니다. 같은 하루가 주어져도 같은 하루를 살지 않습니다. 각자의 계절에는 서로를 닮은 분위기가 담겨 있을 뿐이지요.”라는 대목이 있어요. 저는 “같은 하루가 주어져도 같은 하루를 살지 않습니다”라는 부분이 너무 좋았어요. 이 다짐을 어떻게 수행하는지가 책에 담겨 있기도 하거든요. 권태가 있는 분들은 빨리 하루가 지나가서 휴가가 오길 기다리잖아요. 그러니까 이 책의 페이지들을 빨리빨리 넘겨서 어디에 도착할지 가늠해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 속에 임진아 작가님이 발견한 사금파리처럼 반짝거리면서도, 작기 때문에 들여다보지 않으면 있는지조차 몰랐던 순간들이 가득합니다. 물론 저처럼 계절을 빨리 달려서 빨리 봄을 맞이 해야지, 하고 끝까지 한달음에 읽는 경우도 있겠지만요. 하루에 한 계절씩 소화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아요. 그래도 한 계절을 소화할 때 페이지터닝은 확실히 된다는 점을 말씀드릴게요.
프랑소와 엄이 추천하는 책
권남희 저 | 마음산책
이 책은 원래 2011년 4월에 1판 1쇄가 출간되었는데요. 10년 만에 개정판이 나왔어요. 에세이 개정판이 나오기가 쉽지 않잖아요. 이 책은 아마 독자들이 꾸준히 찾아 주셨기 때문에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책 첫 장을 열면 이런 글귀가 나옵니다. ‘문장이 손끝에 착착 감기는 느낌. 마치 내가 쓴 글을 옮기는 듯한’이라고요. 이것은 일본 문학 번역을 전문으로 하면서 갖게 된 권남희 번역가님의 직업관이 담긴 문장인데요. 저는 이 에세이를 착착 감기는 느낌으로 읽었어요.
사실 해외 문학을 읽을 때 페이지터너가 가능하게 하는 사람은 번역가니까요. 번역가도 자기 문장을 굉장히 잘 써야할 텐데요. 이 책을 읽으면 문장이 진짜 좋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권남희 번역가님의 글은 약간 궁상맞고, 너무 솔직하기도 하고, ‘이 정도 스타 번역가인데도 이렇게 생각을 한다고?’ 싶을 내용도 있는데요. 어떤 이야기를 쓰든지 불쾌감이 없어요. 약간 구차해 보이는 얘기일 수도 있고, 속 좁아 보이는 얘기일 수도 있는데 읽고 나면 기분이 너무 좋아지는 그런 문장을 구사하는 분이더라고요. 진짜 좋았어요.
번역가 지망생들이 알고 있으면 좋을 팁도 잘 정리가 되어 있는데요. 번역가가 되려면 전공은 상관없다는 말씀을 해주시고요. 외국어만 잘하면 번역가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는 답변이 굉장히 구체적인데요. 도움이 되실 것 같아서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진입 장벽이 낮긴 하다. 하지만 무작정 발을 들이밀 게 아니라 자신의 성향과 능력을 먼저 파악했으면 한다. 자신이 책 읽기를 좋아하는지, 글을 잘 쓰는지, 한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서 우직하게 일을 할 수 있는지, 하루 종일 사람 구경 한 번 못하고 수다 한 번 안 떨어도 입안에 가시가 돋지 않는지, 일주일 내내 바깥에 안 나가도 좀이 쑤시지 않는지, 편집자나 출판 관계자들과 원만하게 지낼 수 있는 사교성은 있는지, 나만의 벽을 높이 쌓아 놓고 타인의 침입을 거부하고 있진 않은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번역가님은 기본적으로 어려운 글, 딱딱한 글을 싫어한다고 해요. 그래서 에세이도 이렇게 쓰시는구나 생각했고요. 권남희 번역가님의 모토가 무학자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글쓰기라고 하거든요. 그러면서 덧붙이신 말도 되게 재미있습니다. “물론 내 머릿속에 주체할 수 없이 방대한 지식이 들어 있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 지식을 드러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의 뇌 속에는 딱 세상 사는 데 필요한 만큼의 지식만 저장되어 있어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쉬운 글이 나온다. 대상을 누구로 하여 글을 쓰건.” 이 책을 보면서 한 번쯤 번역가님을 만나서 대화 나누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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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선
읽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