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키기 연습』은 20년가량 거식증을 겪어온 저자 박지니가 ‘환자’가 아니라 ‘화자’로서 써낸 수기다. 소설 같기도 일기 같기도 한 이 책에 회복과 치유의 감동적인 서사는 없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지난한 싸움, 거식증과 저자가 함께 만들어낸 위태로운 삶이 있을 뿐이다.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저자에게 있어, 거식증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해내야만 할 깊고 본질적인 진실, 좀더 많은 지식으로 번역해내야만 할 경험이다. 무엇 때문에 거식증이 찾아왔는지, 어떻게 나을 수 있을 것인지보다, 다만 ‘이게 무엇인지’를 저자는 오랜 시간 공들여 탐구하고 기록했다.
오랜 시간 동안 묵혀왔던 이야기를 드디어 책으로 내시게 되었네요. 출간 이후 좀 후련해지셨는지, 뭔가 달라졌는지, 달라졌다면 어떻게 달라졌는지 여쭤볼게요.
2008년부터 써왔다는 건, 그때부터 글쓰기 수업 시간에 발표하거나 공모전에 내기 위해 깨작깨작 완성했던 단편 분량의 글 여러 편을 묶어 만든 책이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흐릿하게 기억하고 있는 일들을, 그때는 정말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때 써뒀던 덕분에 『삼키기 연습』이라는 책을 늦게나마 내놓을 수 있었던 거지요.
결국 책은 나왔고, 이제 저는 다시 세상 속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살아가고 있어요. 책이 나오고 한 주 동안은 불면증과 기면증 증상이 갑자기 극심해질 정도로 힘들었는데 이젠 그렇지도 않고요. 『삼키기 연습』은 이제 ‘남의 일’이고, 책 속의 서사들도 ‘작아진 옷’이라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지금 다시 책을 쓴다면 전혀 다른 얘길 쓸 수 있을 거예요.
‘삼키기 연습’이라는 제목이 의미심장한 것 같아서 설명을 한번 들어보고 싶어요. ‘삼키기’를 ‘연습’한다는 건 어떤 일인가요?
편집자님과 일주일 정도 집중적으로 카톡을 주고받으며 제목을 고민했어요. 꽤 오래 포기하지 못했던 ‘길 잃은 아이들의 식탁’부터 ‘기대 저버리기의 예술’ ‘중력 삼키기 연습’ 등등 많은 아이디어가 나왔고, 마지막에 제가 ‘슬픔 삼키기 연습’을 제안했는데 편집자님이 단호히 ‘슬픔’을 걷어내주셨어요.
언젠가 간호사 선생님이 한 아이 이야기를 해주신 적 있어요. “한 끼 식사면 칼로리가 이렇죠? 저 그냥 밥 말고 초콜릿으로 먹을게요. 그 칼로리, 초콜릿으로 주세요.” 삼키고 소화시키는 게 그 정도로 무서운 일이 되어버린다는 거죠.
‘삼키기 연습’이란 어쩌면 월트 휘트먼의 시 구절, “나는 내 자신에 모순된다. 나는 크며 다수多數이다(I contradict myself, I am large, I contain multitudes)”라는 인식을, 체득할 때까지 받아들이고 다시 받아들이는 과정일지도 모르겠어요.
책을 보면 트위터에서 많은 시간을 쓰신 게 느껴져요. 감사의 말에서 ‘트위터의 전 세계 사람들’을 언급하시기도 했고요. 선생님에게 있어서 트위터란 무엇인지를 풀어 설명해보신다면?
지금의 저에게 트위터는 관심 분야의 최신 논문과 정보를 시시각각 얻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뉴스피드’에 더 가깝지만, 오래전의 병원 홈페이지 게시판과 섭식장애 커뮤니티, ‘프로아나pro-ana’ 포럼을 기억하고 있어요. 서로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는 것, 속내를 나눌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기쁨과 해방감, 소속감을 주는 일이었어요. 그 안에서는 최소한 내가 ‘이상한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328쪽에서 ‘섭식장애로부터의 회복이라는 모호한 목표’에 관해 짚어주셨어요. 선생님에게 ‘회복’이란 무엇인지, 선생님의 언어로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가정할 수는 있어도 ‘합의’되기는 어려운 개념이 아닐까 싶어요. ‘목표 체중에 도달하는 것’으로 ‘회복’을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있지만, 극심한 환자의 경우 체중 회복을 뒷전으로 둔다면 상황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거든요. 요즘 정신질환이 같은 ‘질병’이냐, 삶의 ‘어려움’ ‘인생의 고비’ 정도로 칭하는 것이 옳냐를 두고 연구자들이 한창 토론하고 있는데, 이 역시 부분적으로는 언어의 한계 때문에 불거진 질문이 아닐까도 싶고요. 어떤 사람이 거식증 치료를 받고 살이 좀 붙어 돌아오면 주변 사람들은 “회복되니까 훨씬 좋아 보인다”고 말을 건넬 수 있지만, 정작 당사자는 죽음 외에 어떤 선택지도 없는 것 같다는 막막한 상황에서 혼자 말을 잃는 중일 수도 있어요. 섭식장애의 강박적이고 중독적인 습관에서 탈출하진 못했지만 스스로를 환자 이상으로 느끼는 중일 수도 있고요.
저 역시 아직 만성 섭식장애가 매 순간 삶의 질을 좀먹고 있어요. '손상되어가는impaired' 삶을 붙들고 있는 거죠. 이게 ‘회복’일까요? 깔끔한 해피엔딩이 아니란 건 확실한데요.
섭식장애, 넓게는 정신질환에 관해 엄청나게 많은 자료들을 찾아다니고 아카이빙하신 것으로 보여요. 연구자스러운 면모가 돋보이는 부분인데요, 섭식장애와 관련해서 최근 가지고 계신 화두는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지식을 쌓기’ 위해 노력한 적은 없어요. 순전히 호기심을 추진력으로 움직여온 것뿐이죠. 관심 갖고 있는 주제는 많답니다. 최근엔 뇌의 측두두정 접합temporoparietal junction 활동에 관한 연구가 흥미로웠어요. 한 사람이 자신과 세상을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인식’에 관한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인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알고 싶어요. 두뇌와 몸과 사회적 과정, 모든 차원을 아울러서요.
혹시 편견으로 인해 거식증 보유자들이 자주 듣게 되는 부적절한 말들은 어떤 게 있을까요? 편견이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직접 경험한 사람의 시점에서 들어보고 싶네요.
거식증과 프로아나는 동일 개념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프로아나'란 말이 ‘거식증’과 경계를 잃고 뒤섞이면서 그러잖아도 편견에 시달리던 거식증이란 질환에 나쁜 뉘앙스만 더해졌어요. 둘은 별개의 집합이고 교집합이 있을 뿐이에요. 섭식장애는 외모에 대한 맹목적 집착과 허영심의 문제가 아니에요. 회고록 『하루에 사과 하나』를 쓴 엠마 울프도 2013년 기고한 칼럼에서 고모할머니 버지니아 울프의 깡말랐던 시절 사진과 그의 일기를 접하고 떠올린 생각을 토로하면서 이 지점을 건드렸어요. 버지니아 울프가 살찌는 것에 대해 가졌던 공포는 어디서 왔냐는 거죠. 연예 잡지나 ‘44사이즈’가 퍼지기 전이었는데요. ‘의지’에 관한 언급 또한 그렇지요. 저널리스트 마리아 샐러비츠는 중독자들이 자유의지 없는 비윤리적인 사람으로 너무 쉽게 여겨진다고 이야기했어요.
‘통념적 언어’를 무작정 꺼내 쓰는 것은, 진정한 앎의 기회를 놓치게 하고 모든 것을 윤리적 비난과 훈계의 문제로 후퇴시켜버릴 뿐이에요.
섭식장애 환자 중에서 젊은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유의미하게 높다는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있는 것 같아요. 왜 유독 젊은 여성들이 섭식장애에 쉽게 노출되는 걸까요?
초등학교 5학년 무렵 학교 앞 문구점에서 뭔가를 환불 받아야 할 일이 있었어요. 저는 극도로 숫기 없는 아이였지만 엄마가 명령한 거라 거역할 수가 없었죠. 문구점 주인에게 쭈뼛쭈뼛 사정을 이야기했는데, 냉랭한 얼굴로 안 된다는 거예요. 완전히 얼어서 결국 눈물이 터져버렸는데, 주인이 이렇게 말했어요. “난 여자 눈물엔 약한데.” 그런 ‘여자’란 과연 무엇일까요? 시비와 정의의 영역에서 취급되지 않고 그저 남자를 눈물로 현혹하기나 하는 ‘여자’인 제 자신이 싫었어요.
여성은 어린 시절부터 다양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자신이 ‘수치스러운’ 존재라고 인식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정신의학적 ‘증상’이라는 것이 인체의 생화학적 메커니즘과 사회문화적 맥락이 맞물리는 지점에서 결정되는, 소위 ‘증상 풀pool’에서 선택되는 것이라고 할 때, 섭식장애가 주로 젊은 여성에게 이토록 오랫동안 들러붙어 있었다는 건 여성의 몸과 존재가 수치스러운 무언가로 여겨지는 통례가 문화 속에 고고하게 유지되어 오고 있다는 증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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