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들어가면 벽면 전체가 백색 분필로 쓴 수학 풀이로 빼곡하다.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의 젊은 수학자 김상현 고등과학원 교수의 연구실 풍경이다. 세상 만물의 쓸모를 주장하는 지금, 그래서 수학의 쓸모를 외칠 때, 그보다는 수학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수학은 상상』의 저자 김상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보통은 학창시절의 벽돌책인 『수학의 정석』을 떠올릴 만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수학은 어렵고 골치 아픈 것일 텐데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수학자에게는 다를 것 같습니다. 어떤 계기로 수학에 흥미를 느끼고 수학자의 삶을 살게 되었나요?
제 성장의 단계마다 시의적절하게 만났던 좋은 선생님들 덕분이죠. 자기가 학교에서 배운 걸 하나둘 집에서 풀어 놓던 형들, 어려운 문제도 오래 씨름해 보라고 격려하시던 학교 선생님들, 그리고 대학 교수님들. 돌이켜보면 다들 제게 무언가 가르치려 하지 않으셨어요. 그보다는, 여기 이렇게 멋진 수학이 있네. 혹시 더 알고 싶니? 이렇게 제 호기심을 자극시키는 분들이었죠.
평생 수를 공부해온 분에게는 문자의 나열인 책을 쓰는 일은 새로운 영역일 것 같아요. 책을 쓰게 된 계기와 소회가 어떠신가요.
200년 전 사람들이 현대의 기계문명, 전자통신기술, 생명공학을 본다면 “마술”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을 거에요. 이 찬란한 기술을 우리는 매일 체험하죠. 비행기에서, 인터넷에서, 병원에서. 그런데 이에 비견할 만큼의 놀라운 혁신이 수학에서도 일어났다는 것을 아시나요? 안타깝게도 이러한 발전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어요. 고등학교 과정에서는 19세기 이후의 수학을 거의 다루지 못하고 있거든요. 21세기의 학생들이 18세기의 수학에 머무르는 현실, 어떻게 하면 이 간극을 좁힐 수 있을까? 현대 수학은 무얼 다루는지, 수학자는 어떤 문제를 아직도 풀고 싶어하는지. 이러한 이야기를 다루고 싶은 열망에서 시작한 책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금방 쓸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제가 2020년에 했던 EBS 강의를 조금만 수정하여 원고를 만들려던 심산이었거든요. 하지만 어느 정도 쓰고 나서 독자의 입장에 되어 읽어보니 가독성이 영 떨어지더군요. 어마어마한 노력을 더해가며 다시 써야 겨우 읽을만해지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아찔했어요. 나는 누구고 여기서 무얼 하는 거지. 연구와 육아만 해도 하루가 어찌 가는 줄 모르는데 말이죠. 그래도 결국 처음부터 완전히 다시 썼어요. 작은 오류도 없어야 하는 수학책과 누군가에게 재밌게 읽히기를 기대하는 대중서적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심정으로 여러 번 다시 쓰며 윤곽을 잡아갔습니다. 그래도 완성된 책을 보니 뿌듯합니다.
식당 배달부를 하면서도 끝내 수학을 포기하지 않은 이탕 장, 시력을 잃고도 20세기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수학자가 된 폰트랴긴 등 장애와 두려움에 맞선 수학자들을 이 책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수학자란 어떤 사람들일까요?
수학자는 오직 재미만을 추구하는 사람이에요. 현실의 제약이 없는 자유로운 상상에 빠져 사는데, 재미가 없는 일을 할 리가 없죠. 그리고 수학자는, 현실이 고단하더라도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잔잔한 마음의 호수를 바라보다가 미세한 물결처럼 상상의 연쇄가 일어나서 순식간에 멋있는 수학을 완성하곤 하죠.
사실 우리 모두는 이미 상당한 수준의 수학자입니다. 책에도 나오듯이 우리가 걸어가면서 친구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것부터가 이미 엄청난 수준의 기하학적 프로세스예요. 공을 주고받거나 계단을 올라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리고 수 세기 전이었다면 초일류 수학자만이 알 만한 내용을 우리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학은 왜 딱딱하고 재미없는 과목으로 알려졌을까요? 시험의 압박 때문에, 경쟁의 비인간성 때문에 수학을 적대의 대상으로 보게 되는 것이라 생각해요. 마음이 온갖 소음으로 시끄러우니 수학 자체를 보지 못하고 수학 시험만 걱정하는 거죠.
그래서 이 책은 천천히 읽을 것을 권하고 싶어요. 맑은 눈과 고요한 마음을 준비물 삼아 차분히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예쁜 상상의 연쇄가 독자의 마음 속에도 일어날 겁니다.
수학을 잘하는 비법이 있을까요? 『수학은 상상』이라는 제목을 보면 ‘상상하는 힘’이 그 열쇠인 듯 합니다. 제목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합니다.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 나온 제목이긴 합니다만, 상상이라는 키워드는 빠진 적이 없어요. 세상에 없는 것을 생각한다는 사전적인 의미보다는 그 어원에 주목했어요. 한자로 풀어보면 모양(像)을 생각(想)한다는 뜻이죠. 영어의 imagination 역시 마음 속에 그림을 그린다는 어원을 가지고 있어(image)요. 상상이라는 단어를 통해, 수학은 마음 속에 떠오르는 그림이라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어요. 수를 다룰 때에도, 도형을 다룰 때에도, 확률을 다룰 때에도. 일견 복잡한 수학도 결국 잘 이해하고 나면 명확한 하나의 그림이라는 거죠.
학교에서, 직장에서, 교양으로… 우리가 수학을 공부하는 계기는 다양하지만, 마음 속에 그림을 그려보는 작업은 모두 도움이 되어요. 그래프나, 도식이나, 마음 속의 시뮬레이션 등. 적어도 수학의 경우, 이렇게 그림을 통하여 이해하면 강렬한 지식을 마음에 남길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코로나19로 일상생활의 모든 것이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수학 혹은 수학자로서도 코로나19로 인한 변화가 있었을까요?
어느 때보다 세상이 좁으면서도 멀게 느껴집니다. 이제 강연이나 학회가 거의 모두 온라인에서 일어나니까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이 없이 자주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논문을 읽다가 막히면 그 저자와 직접 면담하여 물어볼 수도 있지요. 자기가 새로 발견한 수학적인 지식을 동영상 강의로 퍼뜨리는 일은 더 잦아지고 쉬워졌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나라에 있는 연구자를 직접 보는 일은 더 어려워졌죠. 직업 수학자에게 중요한 것은 깔끔하게 완성된 그림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스케치 단계에 불과한 프로젝트에 뛰어들어 함께 완성하는 일이거든요. 그런데 온라인으로 만나는 경우에는 불완전한 상태의 지식, 궁금증, 시행착오 같은 것들이 거의 공유되지 않아서 아쉬워요. 결국 직접 만나는 전통적인 학회나 세미나도 부활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현재 교수님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수학 난제는 무엇인가요?
지난 십 년 동안은 원, 그러니까 동그라미의 대칭성을 연구해 왔어요. 이 동그라미라는 것은 유클리드 시절부터 수학자들이 마르고 닳도록 다뤄왔지만 아직도 신비의 대상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무한히 많은 점들이 가지고 있으니 이 동그라미가 수많은 질문을 남기는 것도 자연스럽지요. 동그라미를 잘 늘어나는 고무줄로 생각했을 때 어떤 변형이 가능할지, 그 수많은 변형을 한꺼번에 잘 설명할 수 있는 구조는 무엇인지를 연구해 왔어요. 동그라미와 더불어 조금 더 높은 차원(예를 들면, 구면)에서도 비슷한 구조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수능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지금도 수학 문제풀이에 고민하는 수험생과 학생들에게 부담감을 떨어트릴 수 있는 조언을 해주세요.
저도 시험은 참 싫어했어요. 내 자신이 계량화, 서열화되는 그 기분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어요. 중요한 시험 전날에는 한숨도 못 자곤 했지요. 그런데 조금 더 성장하다 보니 산다는 것 자체가 끝없는 평가의 연속이더군요. 직장에 들어가도 다른 사람의 평가 때문에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어떤 때는 급격한 내리막!) 롤러코스터를 타고는 해요.
그럴 때 도움이 되는 생각은 나 자신에게 말해 주는 거에요. “너는 너 자체로 소중한 사람이야. 네 존재가, 살아있음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몰라. 세상은 너를 평가하려 하겠지만, 그것은 너 자신을 규정짓는 것이 아니야. 너 자신을 더 믿어야 해. 너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만큼, 너 자신도 좀 더 사랑해 주고 위로해 주길 바랄게.”
여러분들도 오랜 기간 학교를 다니며 잘 준비해 왔어요. 남은 짧은 기간 머리를 더 복잡하게 하지는 마세요. 스스로를 믿어주고, 마음을 고요하게 가지세요. 그리고 어려운 미로도 거꾸로 풀다 보면 쉬울 때가 있죠?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출제자는 교과서의 어떤 부분을 가지고 이 문제를 만들었을까 생각해 보세요.
*김상현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 서울과학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터키에서 열린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은메달을 수상하는 등 어릴 때부터 수학과 사랑에 빠져 있었다. ‘수학이 직업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 속에서도,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자!’는 철없는 생각으로 서울대학교 수학과에 입학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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