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정 ‘퓨즈 서울’ 대표의 커리어는 이 장면에서 전환점을 맞는다. 어느 날, 남동생의 바지를 우연히 입어본 것. 동생의 바지는 놀랍도록 편했다. 대체 옷에 어떤 차이가 있기에 착용감이 이토록 다른 것일까. 여성복과 남성복을 하나씩 비교해가며 연구한 김수정 대표는 주머니의 개수부터 주머니의 깊이, 사용되는 원단의 재질과 원단의 봉제법까지 여성복과 남성복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려서부터 옷을 좋아했고, 거의 평생을 옷에 관심을 가져왔음에도 이런 차이를 이제야 발견한 것이 화가 났다는 김수정 대표. 그가 집중한 것은 오직 제대로 된, 좋은 품질의 옷이었다. 남성복에 비해 터무니없이 나쁜 품질의 옷들, 소비자를 기만하는 것에 불과한 옷들은 더 이상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여성복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어느 여성복 제작자의 고군분투기이자 여성복 시장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편견과 불평등을 낱낱이 드러내는 고발기이다.
편견이 진짜 무서웠어요
출간 제안을 받았을 때,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밝혔어요. 책 한 권을 쓸 만큼 그동안 얘기가 많이 쌓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옷 제작을 하면서 공장이랑 부딪칠 일이 너무 많았어요. 그러면서 겪은 에피소드를 누군가한테 꼭 말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었죠. 그럴 때마다 SNS에 이야기를 쓰기도 했는데요. 문제는 그렇게 해도 이야기들이 결국 휘발되고,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 없다는 것이었어요. 때문에 이야기들을 글로 남겨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죠. 어느 날 우연히 출간 제안을 받았는데 바로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최근 몇 년간 여성복의 낮은 품질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는 목소리들이 많아졌다고 느꼈는데요. 대표님은 언제 처음 여성복과 남성복의 차이를 인식하셨어요?
남동생 바지를 우연히 입어본 게 계기였어요. 입자마자 느낌이 되게 다른 거예요. 착용감이 애초에 다르더라고요. 여성복, 남성복이 겉보기에는 비슷하잖아요. 그래서 이유를 찾아보려고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했어요. 일단 남성복은 밑위가 엄청 길어요. 또 주머니가 말도 안 되게 깊었고요. 차이를 보면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어요. A라는 브랜드와 B라는 브랜드가 다르다면 이해를 할 텐데요. 보편적으로 모든 제품에 여남 차이가 발견되니까 나중에는 화가 났어요. 이걸 나만 알면 안 되겠다 생각해서 그렇게 공부한 내용을 SNS에 올린 거고요. 유튜브 등에 출연해서도 계속 문제라고 얘기한 거죠.
워낙 의류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져왔기 때문에 충격이 더 컸을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부터 옷을 만졌으니까요. 10년 넘게 옷에 관심을 가져왔고, 옷을 사랑했던 사람이라 옷을 다 안다고 착각을 했던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화가 났어요. 내가 뭐라도 하지 않으면 누구도 바꿔주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시작한 게 ‘퓨즈 서울’이라는 브랜드였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에요.
변화를 만드는 과정, 대표님의 고군분투도 인상적이에요. 아무리 제작 의도를 명확히 설명해도 ‘여성복처럼’ 샘플을 만드는 공장들을 겪어야 했잖아요.
제작을 하면서도 이해가 안 됐어요. 그냥 남성복처럼 만들면 되지 않을까 했던 것뿐인데 왜 ‘여성복’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가면 갑자기 옷이 달라지고 단가가 확 올라가는지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공장을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데 너무 애를 많이 먹었어요. 저희의 시도가 처음이라 더 그랬을 거예요. 공장 사장님들이 다들 연세가 많으시거든요. ‘지금까지 이런 거 아무도 안 했는데 네가 해서 성공시킬 수 있겠어’ 하는 입장이어서 처음에는 안 해주려고 했던 거죠. 다행히 저희가 몇 번의 성공을 거듭하면서 주문량도 많아져서요. 지금은 그냥 원하는 대로 해주세요. 처음에 그 장벽을 무너뜨리는 게 너무 힘들었죠. 이해시키는 과정 말이에요.
특별히 기억나는 사례가 있다면 좀 더 들려주세요.
남성 슬랙스 공장에 갔을 때예요. 미리 말씀을 드렸죠. 여자들이 입을 옷이고, 기존 남성복 슬랙스처럼 밑위가 길게, 품질 좋게 만들고 싶다고요. 그러니까 공장에서 “이런 거 여자들 안 입어. 이런 거 하지 마.”라는 거예요. 또 한 번은 자켓 공장을 갔는데요. 그곳이 남성용 자켓을 만드는 곳이었어요. 여성복과 남성복의 여밈 방향이 다르잖아요. 다른 것은 오직 그것뿐인데 여성용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니까 2,000원을 더 받겠다고 하더라고요. 진짜 말문이 턱 막혔어요. 다 똑같고 차이라고는 여밈 방향 하나였는데 말이죠. 편견이 진짜 무서웠어요.
유행은 소비자가 복종하는 것
“남성복은 착용자가 ‘활동성이 많은 사람’이라는 전제하에 만들어진다”(9쪽)는 부분이 의복 차이를 말함에 있어 가장 중요할 것 같아요. 사회적 편견이 옷에도 부여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충격적인데요.
여성복은 주머니가 깊지 않아도 가방을 들기 때문에 괜찮다는 인식이 있는 거예요. 한편 남자들은 가방 드는 걸 귀찮아하고, 활동성이 많으니까 주머니가 많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고요. 이건 편견이죠. 실제로 그런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냥 그렇게 ‘여겨지는’ 편견을 가지고 옷을 만들어왔던 거죠. 저는 패션 시장이 굉장히 보수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아주 오래되어 온 만큼 보수적이어서 아직도 그런 편견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마 이 책의 내용을 불편해 할 여성복 업체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시중에 나와 있는 SPA 브랜드가 출시한 여성복과 남성복의 차이를 하나씩 분석해놓은 챕터도 인상적이었어요. 하나같이 여성복의 품질이 떨어지더라고요. 대표님이 가장 놀랐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봉제가 그랬죠. 사실 봉제 같은 건 전문가가 아니면 잘 모르지만요. 저는 옷을 만지면 늘 원단 재질과 봉제를 중심으로 보거든요. 그런데 자켓 하나에도 남성복에 들어가는 패턴이나 봉제랑 여성복에 들어가는 패턴이나 봉제가 다른 거예요. 셔츠만 해도 여성복은 그냥 ‘오버로크’인데 남성복은 ‘쌈솔’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너무 놀랐어요.
남성복은 봉제에서도 차이가 났다. 티셔츠는 오버로크 제품이 다수였으나 바지나 아우터, 특히 셔츠류는 대부분 ‘쌈솔’ 방식으로 봉제되어 있었다. 쌈솔은 오버로크처럼 원단 끝의 올이 풀리지 않게 하는 봉제법이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오버로크에 비해 작업이 훨씬 더 까다롭다. 오버로크는 단 한 번의 박음질로 마무리되는 반면, 쌈솔은 박음질을 한 뒤 다림질을 하고, 다시 한 번 박음질을 해야 해서 무려 세 번이나 손이 간다. 손이 많이 갈수록 당연히 봉제 단가도 올라간다. _(73쪽)
그래서 “여성들도 제대로 된 원단으로 만든 제대로 된 옷을 입을 권리가 있다.”(53쪽)고 하신 거겠죠. 사실은 여성들이 그동안 입어온 것이 제대로 된 옷이 아니었던 거고요.
맞아요, 게다가 여성복은 유행이 엄청나게 빠르잖아요. 요즘 여성복에서는 크롭티가 유행인데요. 솔직히 말해서 만드는 입장에서는 크롭티라는 게 정말 가성비가 좋아요. 일단 원단이 적게 들어가니까요. 그렇지만 사실 입기에는 너무 불편한 옷이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유행하는 것들은 소비자가 만든 거다, 수요가 있으니까 이런 유행이 나오는 거다, 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기업들이 만드니까 소비자가 어쩔 수 없이 그걸 사는 거예요. 유행은 소비자가 복종하는 거라는 말이 있는데요. 그게 맞아요. 요즘은 니트를 사러 가도 전부 크롭티니까 그럼 소비자는 크롭티를 살 수밖에 없잖아요. 여성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선택권이 필요하고요. 저희가 더 품질 좋은 의류들을 선보이고 있는 이유도 거기 있어요.
같은 맥락에서 책에서는 레깅스를 언급했죠. 결코 편하기만 한 옷이 아니라고요.
지금은 유명 스포츠 브랜드 매장에 가서 보면 여성 스포츠웨어는 전부 레깅스죠. 운동복이 필요해서 매장에 가신 분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게 레깅스뿐이라 차선책으로 남성용 운동복을 입으시는 분들도 많은데요. 사실 레깅스 불편해요. 입고 벗는 것도 불편하고, 세탁도 신경 써야 하고, 금방 망가져요. 만약 훨씬 튼튼하고 관리도 편한 스포츠웨어가 선택지에 있다면 레깅스 시장은 이렇게 크지 않았을 것 같다고 항상 생각해요. 제가 여성용 런닝 팬츠를 만든 이유도 같은데요. 착용감이 편하고, 너무 몸에 붙어서 민망하지도 않고, 품질 좋은 스포츠웨어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따진다면 일단 사이즈가 다양하지 않아요. 여성복은 대개 55, 66, 77 정도로 구분되거나 S, M, L가 다잖아요. 여성의 신체가 그 셋에만 해당하는 게 아닌데 말이에요. 심지어 ‘프리 사이즈’라고 된 제품들도 보면 다 너무 작고요.
프리 사이즈도 마찬가지로 제작자 입장에서는 너무 좋은 거예요. 재고 관리가 너무 쉽고요. 제작 공정에 있어서도 좋아요. 그냥 한 가지로 만들면 되잖아요. 그런데 같은 프리 사이즈여도 남성복과 여성복이 다르거든요. 제가 비교를 해봤을 때가 2018년 정도였는데요. 여성복은 거의 가슴 단면이 46cm였어요. 이 마저도 최근에는 더 작아지는 것 같고요. 50cm 넘어가면 좀 크게 나왔다, 오버핏이다, 라고 할 정도죠. 반면에 남성복은 기본적으로 가슴 단면이 55-60cm였어요. 사실 그게 진짜 프리죠. 프리라는 단어를 붙일 거면 정말 자유로운 사이즈여야 하는데 왜 여성복은 프리라는 단어 안에 사람들을 맞추게 하는 건지, 참 답답해요.
빨리, 많이 만들어야 자주 소비하니까
만들 수 있는데 안 만들어온 것은 “소비자 기만”(204쪽)이라고 분명히 적으셨어요. 옷을 제작하고 유통하는 입장에서 소비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도 있을 것 같아요.
브랜드를 운영하면서 생기는 딜레마가 저희 옷이 너무 크다는 얘기를 들을 때예요.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생각하는 건 저희가 만드는 옷이 너무 큰 게 아니라 지금까지 여성들의 몸이 너무 작았던 게 아닌가 하는 것이거든요. 여자들도 더 운동해서 근육도 키우고, 많이 먹고, 좀 튼튼해야 되는데 사회가 너무 마르기만을 강요하잖아요. 미디어든 뭐든 다 그렇죠. 저는 여전히 성인 여성들은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운동하고, 더 많이 건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편으로는 간혹 죄책감을 가지시는 분들이 계세요. 나는 크롭티, 레깅스 입고 있는데 내가 잘못한 건가 하는 식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는데요. 절대 안 그러셨으면 좋겠어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유행이라는 게 어쩔 수 없이 소비자가 복종하는 것이니까요. 자신을 탓하지 마시고 그런 제품 만들어낸 기업들을 탓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제일 분노하게 되는 것은 단연 여성복의 제작 의도가 “더 잦고 많은 소비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79쪽)이라는 합리적인 의심이에요. 이에 대해 대표님은 ‘여성세’라고 말하기도 하셨죠.
일단 어떤 브랜드를 가든지 여성복이 남성복에 비해 세 배쯤 종류가 많아요. 매장 사이즈도 훨씬 더 크고요. 그것을 어떻게 보면 선택의 폭이 더 넓은 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요. 결국에는 더 많은 소비를 일으키기 위한 것이거든요. 빨리, 많이 만들어야 소비자가 더 자주 소비를 하니까 계속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는 거예요. 남성복에 들어가는 쌈솔 봉제 같은 것을 여성복에 넣으려면 봉제 시간도 오래 걸리고, 너무 튼튼하니까 새로운 소비가 안 일어날 테고요. 그것이야말로 여성세인 거죠.
심지어 세탁비까지 차이가 있었어요. 남성복은 그만큼 “제품 규격화가 잘 되어 있”(169쪽)다는 것이고, 그동안 여성 소비자들은 부당한 소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죠.
저도 세탁소에서 셔츠 세탁비가 1,000원이라는 광고를 보고 갔던 건데요. 제 셔츠는 남성복 공장에서 만든, 남성복 원단과 봉제를 사용한 셔츠였고요. 심지어 그 옷은 여밈까지도 남성용 방향을 했었어요. 공장에서의 갈등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도 여성인 제가 입는 옷이라고 하니까 세탁소에서 세탁비를 더 받아야 한다는 거예요. 화가 나서 그곳을 나와 다른 지점으로 갔죠. 거기서 이 셔츠가 남동생 옷이라고 말을 하니까 그냥 1,000원이라고 하더라고요. 충격이었어요. 사실 남성용 셔츠는 사이즈 체계가 어느 정도는 규격화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기계로 대량 세탁을 할 수 있는 거고, 그 가격이 가능했던 건데요. 여성복은 사이즈가 워낙 천차만별이라 공정화를 할 수 없어요. 그런 여성세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이제는 소비자들이 문제를 인식하고, 변화의 목소리를 서서히 내고 있는 것 같아요. 대표님도 “’젠더’를 고려한 가치 소비 시장이 크게 성장할 것”(131쪽)이라고 분석하셨거든요. 실제로 어떤 변화를 목격하고 계신가요?
결국에는 많은 사람들이 선택을 하게 되면 패션 시장은 움직일 거예요. 그렇게 되면 조금 더 튼튼한 의류들이 보편화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어느 SPA 브랜드를 가도 여성용과 남성용 옷의 품질 차이 없이 옷을 살 수 있는 시대가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사실 쉽진 않을 것 같아요. 가장 큰 이유는 수익성이죠. 지금 이대로도 옷이 팔리니까요. 저희가 성공 사례를 계속 남기면 대기업들도 하나둘 뛰어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제일 좋은 건 저희가 대기업이 되는 거고요.(웃음)
여성복 쇼핑몰을 운영하다가 제대로 된 옷을 만들겠다는 생각에 ‘퓨즈 서울’을 운영하게 됐고요. 이후에도 속옷, 운동복, 생활한복 등으로 영역을 넓혀왔어요. 오프라인 공간도 생각하고 계시던데, 어떤 계획이신가요?
저의 최종 목표는 많은 사람들이 이 가치를 이해할 수 있도록 여성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다가가는 거예요. 이렇게 질 좋은 의류를 만들었잖아요. 이것을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구매를 해주셔야 하거든요. 단순히 의류를 판매하는 행위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카페를 만들든 게스트하우스를 만들든 궁극적으로는 여성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스며들 수 있는 브랜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고요. 그런 공간에서 질 좋은 의류를 체험해보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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