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10일 새벽 0시 1분경, 박원순 시장이 북악산 숙정문 산책로 인근에서 타살 혐의가 없는 싸늘한 주검으로 경찰에 의해 발견됐다. 그 전날부터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인 박원순 서울시장이 갑자기 실종됐으며 미투 관련한 이슈일 거라는 뉴스들이 쏟아지는 때였다. 박원순 위력 성폭력 사건 피해자인 김잔디 씨(가명)는 그날 이후 박 시장 지지자들로부터 끊임없는 2차 가해를 당하게 된다. 『나는 피해호소인이 아닙니다』는 그날의 진실을 밝히고, 몸과 마음의 상처를 극복해 나간 생존의 기록을 담은 책이다. 이 인터뷰는 책이 발간되기 일주일 전인 2022년 1월 14~17일 사이에 김잔디 저자와 서면으로 진행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을 성폭력으로 고소한 다음 날 박 시장이 극단적 선택을 함으로써, 그의 지지자들에게 전례 없는 2차 가해를 당하셨습니다. 이 책 출간으로 다시 사람들에게 주목받게 되는 것이 부담도 되셨을 테고 일말의 두려움도 있으셨을 텐데요. 그럼에도 이 책을 출간하겠다고 결심하신 계기가 있으신가요?
인간에게는 누구나 ‘잊혀질 권리’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특별히 성폭력 사건 피해자에게 있어 ‘잊혀질 권리’는 더욱 간절한 소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잊혀질 권리보다 ‘제대로 기억될 권리’가 먼저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대로 기억되어야, 제대로 잊혀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은 사건 발생 이후부터 제가 복직을 하게 되기까지 468일간의 기록이며, 저는 이 책을 통해 한 명의 존엄한 인간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피해호소인’이라는 저열한 신조어의 대상이 되신 주인공이십니다. 그 외에도 꽃뱀, 살인녀, 기획 미투 운운하는 박 시장을 지지하는 세력들에 의한 공격이 지속적으로 집요하게 이뤄지면서 극심한 공포와 고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계속된 자살 충동에 내몰리셨던 것이 책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어떻게 그 고통스러운 상황을 견뎌낼 수 있으셨는지요?
죽음에 대하여 한 번이라도 생각해봤던 사람은 그 위기의 순간을 이겨냈다고 해서 죽음이라는 생각에서 영영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번에는 조금 더 쉽게 조금 더 자주 위태로운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여전히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쉽고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어렵다고 해도 저는 살고 싶습니다. 살겠다고 결심한 후로 저는 계속해서 제가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통해 저는 다른 사람들이 규정 짓는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제가 바라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으며, 힘든 순간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피해사실과 이후의 치유 과정, 성폭력 피해자로서의 소회를 솔직히 고백하는 책을 출간하는 용기를 보여주시면서도 언론이나 일반 대중에는 여전히 본인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계십니다. 다소 불편한 질문일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 성폭력 근절 운동과 양성평등 운동에 극적인 모멘텀을 가져오기 위해서 작가님의 신분을 드러내실 계획은 없으신지요?
저는 신분을 드러내고 법적 절차를 진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피해를 인정받기 위해서, 신빙성을 얻기 위해서 얼굴을 공개하라는 공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이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요구에 부응하면 이후에 있을 다른 성폭력 피해자들에게도 동일한 공격과 요구가 이어질 것이라는 마음에서 저는 철저히 익명으로 사건을 진행했습니다. 온라인상에 사진이나 실명이 공개되는 일로 괴로울 때면 차라리 저의 신분을 공개하고 당당하고 멋지게 사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직 저는 우리 사회를 위한 일보다는 스스로를 돌보는 일에 전념해야 할 시기인 것 같습니다. 출판은 저를 위한 치유와 회복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용기를 내게 된 것입니다.
유력 대선 주자인 박원순 시장을 고소하는 용기를 내시면서 바랬던 것을 “잘못한 사람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잘못을 뉘우치고, 진정한 사과를 해서 결국 나의 상처가 회복되고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문장도 “그럼에도, 나는 시장이기 이전 인간이었던 박원순을 감히 이해해보려고 했다.”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4년간의 성적 괴롭힘뿐만 아니라 2차 가해까지 겪으셨으면서도 인간에 대한 ‘용서와 이해’를 말씀하시는 마음의 힘이 놀랍습니다. 이에 대해서 말씀 부탁드립니다.
4년간의 성적 괴롭힘뿐만 아니라 잔인했던 2차 가해도 주로 정치인, 학자, 고위공무원, 시민운동가와 같은 권력자에 의해 자행되었습니다. 영향력이 큰 그들의 발언이 있을 때마다 지지자들은 부화뇌동했습니다. 힘이 있는 사람들이 저를 괴롭히는 상황이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이렇게 겨우 살아내고 있는 작고 낮은 사람을 어떤 이유에서 그토록 괴롭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저를 괴롭히는 사람의 자리가 높을수록 제가 느끼는 잔인함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권력이 있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훌륭하고 정상적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이 저를 괴롭힌다고 해서 그로 인해 제가 더욱 크게 고통받고 위축되는 것이 우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씩 의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저보다 우월한 사람이 아니라 모두가 평등한 존재라고 인식하고, 어쩌면 제가 그들보다 더 건강한 사고방식을 가졌으며, 더 강인한 존재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들이 불쌍하고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존엄한 인간으로서 그들의 잘못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 저에게도, 그들에게도, 더 나은 세상에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제가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과 별개로 그들이 스스로 부끄러움을 깨닫는 사람이기를 기대하는 마음은 내려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에 대한 기대 없이는 미래에 대한 희망마저 포기해야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 가장 놀라운 도전은 성폭력 사건이 벌어진 그리고 그 관계자들이 여전히 근무하는 서울시청 현장으로 복귀하시는 장면입니다. 잘 못 한 것이 없기에 피할 이유도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결단이십니다. 한편으론 성폭력 피해자분들이 김잔디 작가님처럼 큰 용기 없이도 일상으로 복귀하실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힘을 모아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피해자들의 일상 회복에 대해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절대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제가 들은 말 중 ‘가장 진부한 위로의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들었던 말이기에 ‘영혼 없는 위로’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진부하고 영혼 없는 말을 계속 듣다 보니 제 마음과 귀가 열리고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이 왔습니다. 아마 그때가 비로소 내가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된 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은 나 스스로가 나의 잘못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다른 사람들의 위로가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내가 아직 나의 상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나의 상황을 온전히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고, 내 인생에서 일어난 일을 인정하고 지우고 싶은 기억과 상처 또한 나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차츰 하나씩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저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직장으로의 복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다른 선택지가 있다면 그 길로 가면 됩니다. 다만 원래의 직장으로의 복귀를 통해 동료와 상사들의 위로와 연대를 경험하는 것이 저에게는 치유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지금 30대 초반의 나이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공무원으로서 그리고 평범한 시민으로서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요? 책을 보니 글쓰기가 유려하고 문학적인 감수성까지 엿보입니다. 향후 작가로서 다른 책을 집필하실 계획 같은 건 없으신지요?
프롤로그에 밝혔듯이 저는 미래에 대한 계획 없이 오늘만 살기로 했습니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으로 타고났기에 제가 처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막연한 희망을 품고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곧 예상치 못한 공격에 부딪혔고, 그렇게 반복되는 잔인한 상황에는 전혀 내성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유리병에 담긴 흙탕물처럼, 시간이 조금 지나 겹겹이 가라앉고 정리된 감정들은 새로운 자극에 의해 또다시 쉽게 탁해지고 혼란스러워졌습니다. 매번 새롭고 더욱 잔인하게 저를 괴롭히는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제 작은 마음에 품었던 꿈과 희망이 무너지는 것을 비참하고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을 거듭 경험하면서 저는 그냥 주어지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살기로 했습니다.
먼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고통을 생각할 여력도, 견뎌낼 힘도 없기에 저는 오늘 저에게 허락된 에너지를 온전히 오늘을 사는 데에만 집중해서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낸 오늘과 오늘이 모여 언젠가 내일을 꿈꿀 수 있는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김잔디 (가명) 대한민국 서울시 공무원. 3대째 공무원 집안에서 나고 자라서 약간은 원칙주의자. 말 많고 투닥거리며 사는 평범한 가정환경. 가훈은 ‘정직하게 살자.’ 어릴 때부터 잘 웃어서 아빠는 나에게 ‘방글이’라는 애칭을 지어주었다. 몹시 아플 때도 웃어서 꾀병이나 엄살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학창 시절엔 벌서거나 매를 맞아도 웃어서 혼나기도 할 정도. 착한 사람 콤플렉스. 실제로는 썩 착하지 않은데 착하다는 평가에 집착하는 성격. 눈치가 빨라서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잘 파악하고, 파악된 상대방 의중을 무시하지 못한다. 그만큼 예민하다. 한의원에서 침을 맞으면 살짝만 찔러도 모든 혈 자리에서 피가 솟구친다고. 물과 밤을 좋아한다. 한강의 야경, 바다의 야경을 좋아하고, 물멍을 자주 한다. |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