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먹어보는 거예요, 이거.” 녹진한 초코가 조금씩 흘러나오는 크루아상을 먹으면서 설영이 말했다. 도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고 아마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신바가 아니었으면 설영은 그걸 먹어볼 생각을 안 했을 거다. 이런 건 책도 사람도 아무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으니까. 그때 신바는 이렇게 답했었다. “누군가의 처음을 함께할 수 있는 건 정말 뭔가 마음이...... 가득 차는 일이네요.”
안녕하세요. <오은의 옹기종기> 오은입니다. 한정현 작가님의 장편소설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에서 한 대목을 읽어드렸습니다. 『줄리아나 도쿄』 이후 3년 만에 나온 한정현 작가님의 두 번째 장편소설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에는 시간도, 공간도 뛰어 넘는 깊은 사랑과 아픔을 품고 오늘을 다채롭게 살아가는 소수자들의 눈부신 삶이 펼쳐집니다. 서로를 지탱하는 그 모습이 아름다워 책장을 덮고 한참을 앉아 있었는데요. 오늘 <책읽아웃 – 오은의 옹기종기>에 한정현 작가님을 모십니다.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이름들을 기억하는 일, 그 자체로 인정받아야 마땅한 존재들을 이야기하는 일에 대해 대화 나누겠습니다.
<인터뷰 – 한정현 편>
오은 : 사실 작가님은 <책읽아웃> 출연 이력이 있습니다. 2019년에 <어떤,책임>에서 전화 연결로 짧은 인터뷰를 했는데요. 혹시 기억하시나요?
한정현 : 기억해요. 당시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라 옥상에서 전화를 받았어요. 굉장히 정신이 없었고요.(웃음) 마냥 기뻤죠. 『줄리아나 도쿄』에 대해 피드백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 기뻤어요. 어떤 이야기를 해야 좋을까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했고요. 결론적으로 제가 생각한 건 하나도 답을 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어요.(웃음)
오은 : 이제 작가님 소개를 해드리겠습니다.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있지만 어쩐지 멈추고 싶게 만드는 작가가 되고 싶다 말하는, 소설가. 어릴 적, 천둥 번개가 치는 날이면 잠을 못 잤는데 어머니가 손을 잡아주면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특이하다는 말을 정말 많이 듣던 어린시절. 그때의 경험으로 한정현은 지금도 ‘별나다’는 말을 듣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가 외웠던 최초의 서사는 <그때 그 사람>이고, 최초로 이야기의 힘을 느낀 건 여섯 살 겨울, 메르헨 동화 <착한 마녀>를 읽었을 때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아름다워”라고 중얼거렸던 기억이 있다. 꾸준한 덕후의 삶을 살아왔다. 탐정소설과 추리소설 마니아였고, 고등학생 시절, 그의 반려존재들은 SETI와 외계 종족이었다.
몇 번의 고배를 마신 후, 201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당선 전화를 받았을 때, 작업 중인 소설은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반가운 마음을 눌렀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쓰고 있었다. 많이 울었다. 그러나 청탁이 많지 않았다. 후회는 하되 미련은 남기지 말자고 자주 다짐하는, 추진력 좋은 한정현은 그래서 소설을 투고해버리기로 한다. 첫 장편소설 『줄리아나 도쿄』는 그가 직접 출판사에 “신인 작가의 책도 출판하시나요?”라는 메일을 보내며 출간으로 이어졌다. 소설이 안 써지면 논문이나 관련 서적들을 찾아 읽는다. 지금 좋아하고 즐기게 된 것들은 모두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책 덕분이다.
손글씨도, 취미도, 좋아하는 음식도, 옷도 여러 개. 눈은 무서워한다. 언제나 주인공보다는 조연들을 좋아했고, 아무 일정도 없는 날 익숙한 곳을 걷는 것, 어묵, 단정학을 좋아한다. '사랑밖에 난 몰라형' 인간이다. 가진 것 중 최고 역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정현은 낙관한다. 사랑이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어릴 때 특이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요?
한정현 : 초등학교에 가서 그 말을 듣기 시작했던 것 같은데요. 저는 질문을 진짜 많이 했어요. 선생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다 질문을 했던 것 같아요. 제가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서 자랐는데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질문을 하면 되게 좋아하셨거든요. 그러니까 어린 마음에 그냥 질문이 좋다는 생각을 한 거죠. 제가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손을 들고 질문을 하면 선생님 말에 대꾸를 한다고 받아들이는 분들이 좀 많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별나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되었던 것 같고요. 별나다는 말이 콤플렉스처럼 남아서 별나지 않으려고 엄청 노력하면서 고등학교 때까지 지냈던 것 같아요.
오은 : 이제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가 어떤 책인지 작가님께서 직접 소개해 주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한정현 : 두 인물이 있어요. 먼저 사고로 8개월간의 기억을 잃어버린 연구자 ‘설영’은 환상통까지 얻게 되면서 더 이상 회사를 다닐 수가 없어 일본에 가게 돼요. 너무 가진 것 없으니까 일본에서 교수가 되고 싶어서 열심히 생활하는, 그런 욕망을 가진 여성 인물이죠. 또 한 인물은 강남에서 성형외과 봉직의, 월급 의사로 일하고 있는 ‘연정’이고요. 결혼 때문에 경력이 단절되었다가 마음으로 낳은 아이를 잃으면서 다시 일터로 돌아오는데요. 연정 역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여성이에요. 이 두 명에게 ‘셜록’이라는 이름으로 알 수 없는 기호가 가득한 메일이 배달돼요. 마침 설영이 모종의 이유로 한국에 돌아오면서 셜록을 찾게 되고요. 그와 관련해 셜록의 주치의가 연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돼면서 함께 ‘왓슨’이라는 이름으로 셜록이 보낸 메일에 얽힌 역사적 사건, 사회 문제를 추적해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잃어버린 기억과 잊지 못한 기억을 찾게 되는 이야기예요.
오은 : 작가님에게는 ‘기억’이라는 키워드가 중요한 것 같아요. 『줄리아나 도쿄』 때도 그랬고요.
한정현 : 『줄리아나 도쿄』 때만 해도 중요한 일은 기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요. 사실 어떤 사람에게는 기억을 하는 것이 고통이 될 수도 있잖아요. 흔히 “네가 정말 억울하면 그것을 발화 해야 한다”는 말을 하죠. 또 어떤 고통을 당한 사람이 침묵할 때 “할 말이 없으니까 침묵하겠지, 기억을 안 하는 거겠지”라고도 하는데요. 말을 하고 싶어도 혹은 기억을 하고 싶어도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기억을 못하거나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런 다양한 각도에서 이야기 하고 싶어서 기억을 잃은 사람과 기억을 정말 잊고 싶지만 잃어버리면 안 되겠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을 그려봤어요.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에서는 기억을 다각도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오은 : 제목이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예요. 마릴린 먼로가 어떤 역할을 할지 기대하면서 보기도 했거든요. 마릴린 먼로라는 인물이 상징하는 여성 혐오의 양상이 서사의 한 줄기잖아요.
한정현 : 추앙 받는 여성,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혐오 받는 여성의 대명사를 생각해봤어요. 사실 마릴린 먼로의 작품을 본 사람은 없어도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나 그 이미지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죠. 더구나 마릴린 먼로의 자료를 찾다 보니까 한국과도 인연이 깊더라고요. 수많은 가정폭력 희생자이기도 했고요. 어떻게 보면 한 명의 스타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여성들이 인생에서 겪게 되는 자질구레한 이면 기호로도 사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오은 : 이 작품을 다 읽고 나서 나 자신으로 온전히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고민하게 됐어요. 또 작가님의 작품 안에는 자기만의 공동체를 이루려고 애쓰는 사람들도 등장하죠. 이게 한정현 작가님의 작품에 굉장히 중요한 요소 같기도 하거든요.
한정현 : 가족 찾기는 저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예요. 제도적인 가족이라고 하면 결혼을 해서 아이를 꾸리는 형태를 상상하실 텐데요. 저는 그냥 저랑 말이 잘 통하고, 소설 속 설영과 신바처럼 어떤 면에서는 다르지만 가치관이 닮은 면이 있어서 우당탕탕 즐겁게 같이 살아갈 수 있는 게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너무 중요한 문제예요. 그래서 생활동반자법이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한 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제도적 결혼도 포함이 되죠. 연정의 경우처럼요. 또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에 대해서는 설영과 연정을 통해 좀 더 구체화하고 싶었어요.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이 일상 안에서도 가능하다, 자기 자신으로 사소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진짜 많다는 생각을 했고요.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오은 : <오은의 옹기종기> 공식 질문 드리도록 할게요. 청취자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단 한 권의 책은 무엇인가요?
한정현 : 배수아 작가님의 『독학자』라는 책은 저의 바이블 같은 책인데 절판이 됐어요. 그래도 중고로 찾아보시거나 도서관에서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고요. 오늘 추천하는 책은 로베르토 볼라뇨의 『부적』이라는 책입니다. 남미도 한국처럼 군사독재 정권에 탄압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는데요. 멕시코 시티에서 13일 동안 화장실에서 갇혔다가 생존한 여자 분을 모티브로 쓴 소설이에요. 살아가기 위해서 문학 안에서 생존하고, 분투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부분은 너무나 영원히 망가져버린 여성의 이야기거든요. 이 작품이 이런 대사가 나와요. “내가 미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유머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해자 입으로 그런 말을 하니까 굉장히 울림이 크더라고요. 청취자 분들도 한 번 읽어보시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한정현 1985년 출생. 201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소녀 연예인 이보나』, 장편소설 『줄리아나 도쿄』가 있다. 오늘의작가상,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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