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은 ‘밤’이라는 단어가 267번 등장하는 밤의 책입니다. 실제로 밤에 쓰인, 밤이라서 쓸 수 있었던 책이라고 오은 시인은 말하는데요. “밤이면 자유로워졌어요. 어떤 형식이든 괜찮고요. 흐물흐물 기어서 가도 되고, 담 넘듯 넘어가도 되고, 여기 있다가 갑자기 저기로 가도 되는 거죠.”라고 말하는 시인에게서 길어진 밤의 용언들을 좀 보세요. 그립다, 깊다, 서성이다, 달뜨다, 잠잠하다, 빛있다, 만나다. 결국 『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을 읽는 일은 시인이 선택한 말을 어루만지는 일, 그 말이 만든 세계를 따라 적는 일, 덕분에 착해지는 일이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계속 착해지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려고 했다는 오은 시인은 그리하여 이 책을 “낮에 바쁘게 살아서 자기 감정을 헤아리지 못했던, 그래서 밤에 짬을 내 오늘 어떤 마음이었는지 돌아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시인의 문장을 따라 적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둔 책이니까요. 시인의 문장을 가만가만 기록하면서 내가 지나쳤던 나와 정성껏 마주하는 건 어떨지요.
밤이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책이었어요
『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의 만듦새도 그렇고, 시인님 글의 온도와 필사라는 요소가 무척 잘 어우러져서요. 선물하기 정말 좋은 책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에는 그저 얼핏 소설의 느낌이 나는 에세이집을 생각했어요. 연재했던 글이고, 글의 구성이 비슷비슷하게 짧아서 엽편처럼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요. 편집 과정에서 필사 콘셉트가 들어간 거예요. 그제야 필사가 어떤 의미일지 생각하게 됐죠. 그간 출간된 필사책들을 살펴보니까 명언이나 고전, 혹은 소설 등에서 발췌된 중요한 문장을 쓰면서 나의 삶을 응시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더라고요. 그 가운데 작가 개인의 책을 내는데 그 문장을 같이 쓸 수 있도록 필사 자리를 만들어 둔 책은 처음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 기획은 책을 편집한 김소연 편집자님의 것인데요. 처음에는 그게 될까, 싶었지만 눈 밝은 편집자께서 따라 쓰면 좋을 구절을 뽑아주신 걸 보고 생각이 달라졌어요. 이런 구절이 있었나 싶기도 하고(웃음) 실제로 손으로 써보니 달랐거든요. 마음이 차분해지기도 하고요. 문장을 쓸 때 그 안에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들이 새롭게 되살아나는 느낌도 들어서 저도 이상한 경험을 한 거죠. 그래서 단순히 문장을 따라 쓴다는 의미에 더해 필사의 정점에는 어쩌면 깊숙한 곳의, 해결되지 않은 감정과 상황을 마주하는 의미가 있을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저도 따라 적어봤거든요. 무심코 읽고 지나쳤던 문장까지도 손으로 쓰니까 아주 다르게 다가오더라고요.
맞아요. 책에 발췌된, 김소연 편집자님이 뽑아준 문장들이 읽자마자 뭉클하거나 대단히 심금을 울리는 문장은 아닌데요. 적어보면 다른 것 같아요. ‘너와 함께한 시간들을 다시 사는 것 같았다’(172쪽) 같은 건조한 문장도 손으로 쓰면 ‘너’에 해당하는 사람이 떠오르기도 할 테고요. 다시 사는 기분은 어떤 느낌일지 생각해보게 될 것 같아요. 필사는 천천히 이루어지는 작업이잖아요. 아무리 쓰는 속도가 빠른 사람이라도 말하는 것보다는 느리니까요. 때문에 가만가만 이 문장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주는 게 필사의 매력이란 생각을 이번 책 덕분에 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밤이잖아요. “낮의 그림자가 뻗어나가는 것이라면 밤의 그림자는 드리우는 것에 가깝다.”(22-23쪽)는 문장을 읽으면서 밤이 끌어안는 이미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는데요. 시인님께는 밤이 어떤 밀도와 질감의 시간인가요?
저는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는 사람이고요. 사람을 만나면 입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 사람이기도 해요.(웃음) 그러니까 밤은 복기하는 시간이죠. 낮에 내가 한 말에 앞에 있던 사람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게 어떤 말이었는지 생각해보고요. 얼마 전에도 그랬지, 몇 년 전에도 그랬던 것 같은데, 그 사람도 그 심정이었을까, 하고 계속 거슬러 올라가봐요. 결국 밤이라는 시간은 과거를 돌이켜 보는 시간이에요. 미래를 내다보는 시간일 줄 알았는데 말이죠. 어릴 때는 밤이 되면 커서 뭐가 될지 생각했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는 밤에 앞으로 다가올 내일을 꿈꾸는 게 아니라 오늘 내가 어떤 일을 해왔는지를 돌이켜보고 복기하게 되는 것 같아요.
책에 “부디 너는 지금의 나보다 좀 더 나은 사람이었으면 해.”(46쪽) 하고 당부하는 구절이 있는데요.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해주는 말이고요. 어떻게 하면 괜찮은 사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썼던 문장이에요. 그 외에도 이 책에 밤의 복기와 반성이 많이 담겨 있기도 해요. 다시 말해 밤이라는 시간은 낮의 소란스러움에서 벗어나 가만히 사색에 잠기면서 내가 오늘 한 일부터 시작해 궁극적으로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면 좋겠는지를 생각하는 시간 같아요. 『밤이면 착해지는 사람들』은 밤이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책이었어요.
“못다 한 말이 너무 많아서 쓸 때면 어김없이 겸허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밤에 착해진다. 밤에만 착해진다.”(26쪽)라는 문장이 제목과 닿아 있어요. 이 문장은 쓰는 일에 대한 문장이기도 했는데요.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사색하는 그 시간에 다름 아닌 글을 쓰는 마음은 어떤 마음인 것인지 듣고 싶어요.
『유에서 유』에 실린 시의 제목이기도 해요. 「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이라는 시의 마지막 부분에 ‘밤에는 착해지는 사람들이 있었다/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이 있었다’라는 구절을 썼는데요. 저는 실제로 밤에 글을 많이 써요. 왜 낮보다 밤에 작업이 잘 될까, 생각해보면 밤은 나의 결점을 드러내도 괜찮을 것 같은 시간이라 그랬던 듯해요. 혼자 있는 시간이 기니까 그럴 때 조금 더 진솔하고 내밀한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낮에는 가장을 할 수 있지만 밤에는 그럴 필요 없이 아주 솔직하게 감정에 충실해질 수 있고, 밤에 깃들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그런 생각에서 밤에 착해질 수 있다고 표현했어요.
그렇다면 ‘착해진다’는 건 진솔해지기 때문일까요?
밤에 착해진다는 건 반성한다는 의미인데요.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사람들은 다 착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걸 안 하는 사람들은 제자리에 머물거나 더 나빠질 뿐이죠. 앞으로 착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완전히 다를 거예요. 정확히는 밤에만 ‘착한’ 사람들이 아니라 ‘착해지는’이잖아요. 과정이고요. 사실 날이 새도 언제나 착한 상태로 눈을 뜨지 않을 수 있지만요. 그럼에도 계속 착해지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려고 했어요.
제약에서 가능성을 발견하는
문장 사이의 공백도 있고, 여백도 많은 글이라서 집중해서 읽게 하는 글이잖아요. 어떤 글은 사진 한 장을 보는 것 같고요. 그런 글이 모여서 활동 사진처럼, 영화처럼 되는 글이기 때문에 어떻게 쓰인 것인지 궁금했는데요. 역시 밤이라 가능한 글쓰기였네요.
하나 더 있다면, 연재를 한 매체 덕분에 가능한 글이었어요. KBS 클래식FM에 이상협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당신의 밤과 음악>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거기에 시인들이 에세이를 연재하는 코너가 있었거든요. 저는 2020년부터 2021년까지 매주 한 꼭지를 썼죠. 이 코너의 구조를 보시면 알겠지만, 글 한 편의 앞부분을 읽은 뒤 중간에 클래식 곡이 나와요. 그런 다음 뒷부분이 나오는 거예요. 두 묶음인 셈이죠. 이것이 제게 형식적 실험의 장이 됐어요. 앞부분과 뒷부분에서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수도 있고, A와 B가 있을 때 앞부분을 A의 입장 뒷부분을 B의 입장으로 다룰 수도 있고, 3인칭 관찰자로 진행하다가 주인공 시선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잖아요. 음악이 흐르는 시간이 일종의 휴지가 되어주니까요. 음악을 듣고 나면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테고요. 그것이 형식이 준 자유 같은 것이었죠.
사실은 제약이잖아요. 분량이 정해져 있고, 형식이 고정되어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것이 저에게는 가능성이었던 거예요.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어요. 또 원래도 글을 밤에 쓰지만 이 글만큼은 정말 밤에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요. 모두 밤에만 쓴 글들이에요.
연재 당시 코너 이름이 ‘한밤중에 찾아온 용언’이었죠. 목차를 보면 알 수 있을 텐데, 이처럼 다채로운 용언에서 시작하는 글이라면 오은 시인님만큼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생각해요.
워낙 단어를 좋아하는데요. 단순히 밤 콘셉트로 밤에 벌어지는 일들을 쓴다고 하면 범위가 너무나 커지잖아요. 그 가능성이 좋은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제약에서 가능성을 발견하는 쪽이어서요. 그렇다면 키워드를 주자고 생각했어요. 용언, 그러니까 형용사와 동사 가운데 밤과 걸맞다고 생각하는 것을 골라서 머리를 싸매 보자고 저 스스로에게 미션을 부여했던 거죠.
『뭐 어때?』의 ‘작가의 말’에 “연재가 없었어도 나는 쓰는 사람이었을 테지만, 연재가 없었다면 나는 조금 덜 성실하게 쓰는 사람이이었을 것이다.”라고 쓰셨어요. 자의든 타의든 매일 밤의 시간, 그러니까 쓰는 시간을 보내서 어느 시절의 나를 책으로 묶는 일이 사람 오은에게도 무척 중요한 일일 것 같아요. 일종의 삶의 태도로 쓰는 일이라는 것 말이에요.
아직도 제 첫 시집을 제일 사랑해요. 이유는 이제는 절대 그렇게 쓸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때만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고요. 그래서 『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 역시 최대한 수정하지 않고 담았어요. 5년 전에 썼던 이 글들을 책을 준비하면서 다시 보는데, 다르더라고요. 그때의 오은과 지금의 오은이 달라졌으니까요. 하지만 그래서 더 손을 대기가 싫었어요. 책 내는 사람의 가장 큰 장점은 아카이빙이 된다는 점 같거든요. 그 시기에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어요. 첫 시집 이 2009년에 출간되었는데 그 시집을 7년 정도 썼으니까요. 7년간의 오은이 담긴 거잖아요. 2013년에 나온 두 번째 시집을 보면 4년 동안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할 수 있고요. 누군가 시인이 되고 제일 좋은 점을 물으면 저는 일기를 따로 안 써도 된다고 말해요. 내가 고민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들을 글에 담게 되니까요.
그러니까 쓰는 일은 성실하게 해주는 것 같아요. 가만히 있으면 한껏 게을러지고 싶은데요. 써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못해요. 제가 모스크바에 가서도 칼럼을 썼거든요. 출장 중에 마감이 있었는데 칼럼은 또 시의성이 중요하니까 미리 써두지 못하겠더라고요. 지면이 없었다면 지금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지금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가 나한테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할 여유가 있었을까 싶어요. 『뭐 어때』에 담긴 글을 비롯해 <경향신문>에 칼럼을 10년 썼는데요. 참 감사하죠. 마찬가지로 『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에 실은 글을 쓰게 한 KBS 라디오 클래식FM에 감사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은 유희경 시인님의 『천천히 와』와 쌍둥이 같은 책이기도 해요. 각 책의 뒤에 서로의 글이 들어가 있고요. 이 책에 실린 유희경 시인님의 글을 보면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에 실린 「어깨가 넓은 사람」이 곧바로 연결되는데요. 그러면서 오은 시인님이 이 글을 받고 엄청 기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실제로 그 시를 모티브로 쓴 글이라고 해요. 제가 읽은 유희경 시인님의 『천천히 와』는 기다림에 대한 책이었거든요. ‘천천히 와, 나는 기다릴게’ 이런 느낌이라 저는 기다리는 사람으로서의 유희경, 그리고 유희경의 작품들을 연결시켜서 썼는데요. 원고를 편집자님께 보내고 유희경 시인님의 원고를 읽었어요. 읽자마자 제가 보낸 원고를 다시 써야 되는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웃음) 정말 유희경 시인님이 마음을 쏟아 부어주셨잖아요. 더욱이 『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은 차오르는 이야기들이고, 감정이 출렁출렁한 이야기인데 마지막에 마음이 넘치는 글이 놓인 거죠. 그렇지만 『천천히 와』에 보낸 글을 다시 쓸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안 될 것 같아요. 그저 지금 저의 최선이 담겼다고 봐주셨으면 해요.
비 온 뒤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글과 그림과 그리움의 어원이 ‘긁다’에서 비롯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셋 다 뾰족한 것을 들어 흔적을 남기는 행위와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그리워서 글을 쓰는 사람도, 그림을 그리다 문득 그리워지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리움이 더해지는 것이지요.”(34쪽) 같은 문장을 읽으면서 덕분에 독자는 단어의 여러 방향을 감각할 수 있어요.
책에 담은 용언 중 어떤 것은 1년 내내 한 번도 발음하지 않는 것도 있어요. ‘두근거리다’ 같은 말은 가끔 쓰지만 ‘달뜨다’나 ‘혼잣소리하다’ 같은 말은 거의 안 쓰잖아요. 그렇지만 어떤 말인지는 알죠. 저는 단어를 선별할 때 우리가 알긴 하지만 잘 안 쓰는 단어가 있으면 했어요. 아예 생경한 단어보다는 들어봤고, 뜻도 짐작할 수 있는 단어, 하지만 한 번도 소리 내어 발음해 보지는 않은 단어 말이에요. 제가 이런 것들을 선보일 때 행복한 사람이라 그렇기도 해요. 원고를 보내고 나면 다음 주까지 시간이 생기잖아요. 그동안 단어를 고르는 게 너무너무 즐거운 과정이었어요. 그리고 옆에는 당연히 국어사전이 함께였죠. 펼치면 물론 용언만 있는 건 아니지만 예문에 용언이 나오기도 하니까 거기서 어떤 것을 얻을 수도 있었고요. 그렇게 공부를 하면서 하나씩 썼어요.
시인님의 문장이 다 좋지만 특히 이 문장이 너무 좋았어요. “나는 비 온 뒤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155쪽)
비가 온 후를 생각하면 단순히 가뭄이 해소되는 것도 떠오르지만요. 흙에 물이 스며드는 과정에서 흙 알갱이가 여기 저기로 이동하는 미세한 변화도 떠올라요. 우리가 어떤 일을 겪고 나면 겉으로는 똑같은 표정과 똑같은 행색인 것 같아도 안쪽은 법석이고 있거나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잖아요. 그것을 보여주는 게 비 온 뒤 풍경 같거든요. 또 비 온 뒤의 날씨를 너무 좋아하기도 해요. 갠 날씨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비가 올 때는 너무 싫지만, 이 비가 개고 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는 편이라서요. 비 온 뒤 산책할 때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거죠. 냄새도 좋고요.
제가 생각하는 비 온 뒤 같은 사람은 정확히는 어떤 일을 끝마치고 개운함을 느끼는 사람이에요. 마치 반신욕을 한 뒤 머리 말리고 밖에 나와 바나나 우유 하나 사 먹을 때의 기분이랄까요. 그런 사람이고 싶었던 것 같아요. 또 점점 비가 올수록 흙은 단단해지기도 할 테니까요. 결국은 무른 사람에서 단단한 사람으로 가는 과정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기도 했어요. 지금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요.
방금 “비가 올 때는 너무 싫지만”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그 싫은 시간을 품는 의미라서 더 좋아요. 비 내리는 순간, 힘든 순간을 부정하지 않는 거니까요.
밤에 착해져야 하는 것, 옛날 생각 나서 힘들지만 그 시간을 건너야 지금보다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마음 같아요.
"싱그러운 봄밤과 징그러운 여름밤, 머무는 가을밤과 저무는 겨울밤"(220쪽)이라는 문장도 등장하는데요. 계절마다 밤이 다르게 감각되잖아요. 지금 같은 여름밤을 어떻게 보내고 계시나요?
거의 유일한 취미가 산책인데요. 요즘은 아침에도 볕이 너무 뜨겁고, 낮에는 도저히 나갈 수가 없어서 밤 산책을 하고 있어요. 여름밤은 걷는 시간이죠. 물론 잠깐만 걸어도 축축함이 느껴지지만 밤에 산책을 해야 그나마 걸을 수 있으니까요. 다행히 지금 사는 곳에 천변이 있어요. 그 천변을 걸으면서 낮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발견하기도 해요. 그러다 돌아와 씻으면 또 얼마나 개운한지 몰라요. 비 온 뒤처럼 씻는 이 시간을 위해서 한 시간 동안 걸었구나 싶어져요.
특히 즐기는 계절의 밤이 궁금하기도 해요. 혹시 여름밤인가요?
그렇진 않아요. 즐기는 밤은 봄밤이에요. 정확히는 늦봄과 초여름 사이, 매미가 막 울기 시작할 때가 좋아요. 지금은 밤에 매미가 엄청나게 크게 울거든요. 지금도 좋지만 좀 빠른 애들 있잖아요.(웃음) 그 매미들이 울기 시작할 때, 뭔가 바뀐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순간을 알아차릴 때 행복해져요. 봄밤과 여름밤 사이에 걸으면 정말 행복해요.
하고 싶은 것을 하려고 해요
산문집으로 만나 인터뷰를 하는 것이지만, 시인 오은을 질문해야 할 것 같아요. 시를 쓸 때와 산문을 쓸 때, 완전히 다를 것 같은데요. 어떤가요?
너무 달라요. 산문은 좁혀 나가는 방식이에요. 예를 들어 ‘그립다’는 단어를 떠올려보면요. 그리움이 거대하잖아요. 추상적이고요. 산문에서 저는 그걸 좁혀 나가면서 그리운 순간, 그리워하는 사람의 표정으로 가는 방식으로 써요. 반면에 시는 그리워하는 사람 표정에서 시작해 그립다라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는 방식으로 쓰죠. 산문은 수렴하듯 쓰고 시는 발산하듯 쓰는 거 같아요.
2016년 출간된 『유에서 유』가 최근 미국에 번역이 되었어요. 나의 시가 번역되는 걸 아예 상상하지 않던 시절을 지나 실제로 시가 번역된 지금의 마음은 무척 다를 것 같아요.
저도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었는데요. 제 시를 안수현이라는 분께서 번역해주셨거든요. 실은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메일조차 주고받은 적이 없는 분이에요. 그분이 번역하신 것을 봤는데,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외국 독자를 위해 일부러 어떤 표현을 깎거나 그곳에서 통용될 표현을 찾을 필요가 없겠다고요. 그것을 잘 할 수 있는 것은 좋은 번역가의 역량인 것 같고요. 덕분에 저는 그냥 하던 거 하면 되겠네, 하고 자신감을 얻은 것 같아요.
물론 말 맛을 포기하고, 의미를 살릴지 아니면 의미를 살리고, 말 맛을 포기할지 하는 문제가 있을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번역가의 선택이고, 번역가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고요. 저는 앞으로도 그냥 한국어를 가지고 하고 싶은 것을 하려고 해요. 외국어를 사용하는 독자가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제가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는 감이라도 잡을 수 있다면 그게 다가 아닐까 생각하는 거죠. 오히려 문학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한국 문학을 오랫동안 좋아한 독자로서 동시대 한국 문학을 세계의 독자가 같이 읽는 것에 대한 되게 새로운 감각이 있어요. 그렇지 않은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해외의 동시대 독자와 만날 가능성을 상상하게 된 시인님의 마음도 궁금했어요.
2년 전 독일과 일본에 갔을 때도 느꼈는데요. 이분들이 정말로 궁금해하시더라고요. 그 이유는 한국 문학이 훌륭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K팝이 워낙 유명해졌고, 한국 영화가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기도 하면서 한국 전반에 대한 관심이 올라간 때문이거든요. 그런 배경에서 한국 시인들이 어떤 시를 쓰는지, 한국 소설가가 무슨 소설을 쓰고, 한국 극작가가 어떤 희곡을 쓰는지 모든 게 다 궁금한 것 같더라고요. 어떤 작가 한 명 한 명을 다 알려고 하는 거죠. 우리가 어느 아티스트를 좋아하게 되면 그가 속한 씬을 보게 되잖아요. BTS나 스트레이키즈, 세븐틴을 좋아하기 위해서는 그룹 바깥의 K팝 씬을 봐야 하는 것처럼요. 그런 것을 보면 누군가를 좋아할 만한 이유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독일에서 한 독자분이 되게 서툰 말로 “팬이에요” 하고 가셨거든요. 정말 놀랐어요.
아마 앞으로 한국의 문학뿐 아니라 영화, 연극을 막론하고 다양한 작품들이 번역될 것 같아요. 핵심은 그러한 상황에 맞는 양질의 번역가가 있는지, 그리고 그 번역가 분들에게 정당한 혜택이 돌아가는지 하는 부분일 거예요.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갈 길이 멀거든요. 번역은 혼자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야 시작될 수 있는 것인데요. 이전 정부에서 예산을 많이 줄였잖아요.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하지만 향후 10년 동안은 K컬처가 뻗어 나가는 본격적인 시간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
『없음의 대명사』가 나온 지 2년이 지났어요. 다음 시집을 기다리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서 부담이 되실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질문을 드립니다.(웃음)
시집이 나오고 2년 뒤에 하는 일은 지금까지 쓴 시들을 보면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살펴보는 일이에요. 얼마 전, 너무나 고맙게도 유희경 시인님이 시집 서점 위트앤시니컬에서 ‘주목’이라는 프로그램에 자리를 내어주셨어요. 주목은 신간 시집을 낸 사람이 30분 동안 자신의 시를 읽고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오픈 마이크 같은 프로그램이거든요. 그때 제가 그동안 한 번도 안 해본 방식으로 해보겠다고 제안을 드렸어요. 신작 시로 하겠다고요. 시집 출간 이후 발표한 시들 가운데서 시를 골라서 낭독을 진행했는데요. 행사를 위해서 그간 쓴 시를 추리다 보니까 이제는 조금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알아차렸어요. 그래서 앞으로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시집은 제가 그때 알아차린 것들을 가지고 잘 엮어 완성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조금 기다려주세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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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
출판사 | 위즈덤하우스
유에서 유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뭐 어때
출판사 | 난다
천천히 와
출판사 | 위즈덤하우스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없음의 대명사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신연선
읽고 씁니다.

표기식
사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