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수요일, 김지은 아동청소년 문학평론가, 한미화 출판평론가, 이상희 시인, 최현미 기자가 ‘이토록 다정한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
아기는 세상에 나오고 나서부터 자신 아닌 다른 것을 향해 몸을 움직입니다. 처음 보는 얼굴, 처음 덮은 이불, 처음 안아본 곰 인형, 처음 입술에 닿은 새콤한 사과즙, 처음 뺨에 대어 본 목련꽃잎, 처음 타 본 기차, 처음 마주 친 바다…. 자라나는 아기의 눈앞에는 최초이기 때문에 더욱 강력하게 다가오는 사랑의 대상이 끝없이 펼쳐집니다.
그런데 이 아기를 바라보는 눈빛은 어떨까요. 아기를 키우는 이들의 마음은 오직 아기만을 향합니다. 아기의 얼굴을 보고, 아기가 먹는 것을 보고, 아기가 노는 것을 봅니다. 아기가 함께 보고 싶다고 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 아기와 같이 어디까지든 갑니다. 그들의 눈빛과 마음은 늘 아기에게 닿아 있어요. 아기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이 사랑의 눈빛 중에서 10분의 1 만큼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하루를 보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아기는 다른 것을 보아야 자라니까요.
『아빠, 나한테 물어봐』는 책 전체에 가을의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가득한 그림책입니다. 아이가 아빠와 손잡고 나선 오후의 산책길은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 있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사락사락 눈부신 볕뉘가 그림 위에 내려앉습니다. 볕뉘는 순우리말로 ‘작은 틈을 통하여 잠시 비치는 햇볕’을 말하는데요. ‘그늘진 곳에 미치는 조그마한 햇볕의 기운’도 볕뉘라고 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보살핌이나 보호’를 일컬어 ‘볕뉘를 쬐었다’고도 합니다. 일본어에도 비슷한 말이 있는데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코모레비(木漏れ日、こもれび)’라고 부릅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볕뉘 사이를 누비며 가까운 공원에 다녀온 것 같은 상쾌한 기분이 들어요. 단풍 숲속에 스며드는 코모레비를 포착한 명장면이 이 책 안에 있습니다.
글을 쓴 버나드 와버는 어린이의 하루에 다녀가는 잠깐의 온기도 놓치지 않고 읽어내는 관록의 작가입니다. 얼마 전 2022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이수지 작가가 그림을 그렸고요. 그의 마지막 작품이었어요. 노년의 버나드 와버는 짧고 명료한 문장으로 어린 딸 루이자와 보냈던 수십 년 전의 행복했던 시간을 기록했습니다. 이수지 작가는 버나드 와버의 간결한 문체와 어린이의 마음을 숨김없이 읽어내는 솔직함에 감명을 받아 이 작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버나드 와버는 책의 출간을 보지 못한 채 작고했지만 먼 곳에서 자신의 마지막 걸작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뉴욕타임즈〉는 2015년 ‘주목할 만한 그림책’으로 이 책을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버나드 와버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제가, 세상을 떠난 그의 흐뭇한 눈빛을 알 것 같다고 말한 이유는 뭘까요. 이 그림책을 본 독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아빠, 나한테 물어봐』의 정수는 딸을 향한 아빠의 눈빛입니다. 표지를 보면 손을 잡고 가볍게 매달려 아빠를 올려다보는 딸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습니다. 아빠는 그 딸을 웃으며 바라봅니다. 책을 열기 전에는 종종 볼 수 있는 아빠와 딸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책을 덮을 때쯤에는 이 아빠가 우리 아빠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자신이 얼마나 따뜻한 아버지 곁에서 자랐든지, 그와 무관하게 거의 모든 독자가 저처럼 느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이 아버지를 이길 포근한 아빠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산책을 나가기 위해서 옷을 입고 신발을 신으면서 시작됩니다. 아빠는 모자를 쓰고 운동화의 끈을 묶으면서도 딸에게서 눈을 떼지 않습니다. 반면 딸은 아빠를 등지고 호르르 달려 나가지요. 딸이 아빠를 보는 것은 말을 걸어올 때입니다. 아빠에게 뭔가를 물어봐달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 말이에요. “아빠,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한 번 물어 봐.”
아빠는 딸이 원하는 대로 질문을 던집니다. 단 한 마디도 거기에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아요. 딸은 자신이 마음에 품었던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 또 이야기해요. “아빠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또 물어 봐.”, “또 내가 뭘 좋아하는지 물어 봐.”라고요. 딸은 가을의 공원을 걸으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마음껏 이야기하고 아빠는 듣습니다. 딸이 곰이 나오는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하면 아빠는 곰이 됩니다. 딸이 발견하는 세계의 기쁨은 아빠의 마음에도 차곡차곡 쌓입니다.
아빠는 딸에게서 눈을 떼지 않지만 딸만을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딸이 같이 바라보자고 하는 것을 보고, 딸이 사랑하는 것을 보고, 딸이 살아가는 세상을 함께 봅니다. 단풍나무 숲에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은 앞에 말씀드렸던 볕뉘가 아름다운, 코모레비의 순간입니다. 두 사람은 눈을 감고 있습니다. 서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이수지 작가의 그림은 글 너머에, 더 넓게 펼쳐져 있는 아빠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아빠와 딸의 관계를 둘러싼 많고 많은 사랑의 세계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아이들이 트럭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는 동안 토끼가 풍선이 날아가지 않게 줄을 잡아주는 장면은 그의 전작 『토끼들의 밤』을 아는 사람이면 웃음을 지을 만한 대목입니다. 아빠가 딸보다 늦게 걷는 것 같지만 아빠는 딸의 박자를 놓치지 않아요. 다만 딸이 원하는 방향으로 걸을 수 있도록 천천히 뒤따르는 것뿐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불 속의 곰 두 마리는 아빠와 딸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뒷면지를 보세요. 꿀벌은 깊은 밤에도 꿀을 만들고 있습니다. 꿀벌은 꽃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얼마만큼의 사랑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인 것일까요. 아마도 이 그림책을 읽은 분들이라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사랑이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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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아동청소년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