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다은의 엉뚱한 장면 : 작품의 완성도 혹은 작품 전체에 대한 감상과는 무관하게 특정 장면이 엉뚱하게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그 순간은 대개 영화의 큰 줄기에서 벗어난 지엽적인 장면이 관람자의 사적인 경험을 건드릴 때 일어나는 것 같다. 영화의 맥락에 구애받지 않은 채, 한 장면에서 시작된 단상을 자유롭게 뻗어가 보려고 한다. |
첫 만남, 섹스, 출산의 장면이 순식간에 지나간 후, 역사와 사랑의 멜로드라마를 괴이한 공포와 스릴감으로 균열하는 한 장면이 등장한다. 야니스는 지금 초긴장 상태로 아기 세실리아와 자신의 유전자 검사 결과가 적시된 컴퓨터 화면을 주시 중이다. “생물학적 엄마가 아님”이라는 문장이 그의 표정을 칼날처럼 베어버리고, 신경증적이고 불길한 음악이 그를 휘감는다. 어떤 여지도, 망설임도 없는 이 순간의 잔혹한 명백함을 마주하는 동안 염려스러웠다. ‘대체 이 장면의 세기를 어찌 감당하려고.’ 영화 초반, 야니스가 절실하게 호소한 증조부의 유해 발굴 작업보다 이 장면의 막막함과 극단성을 대면하는 일이 더 난망했다. 무엇보다 이 장면은 쉽게 답을 낼 수 없는 의문들을 서사에 차례로 불러들이고 만다.
야니스가 홀로 출산한 뒤, 연인 아르투로는 세실리아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아기의 친부가 아니라고 직감한다. 아르투로가 유전자 검사를 제안하자, 야니스는 그의 반응에 황당해하며 크게 화를 낸다. 그는 자신과도 아르투로와도 ‘이질적인’ 아기의 얼굴이 자신이 본 적 없는 부계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짐작해왔다. 그런데 이어지는 장면에서 비밀스럽게 유전자 검사를 직접 의뢰하는 이는 다름 아닌 야니스다. 그 모습은 여러모로 당혹스럽다. 자신의 엄마와 할머니처럼 딸을 혼자 키우겠다고 결심한 야니스가 단지 아르투로의 무책임한 말 한마디에 근거해 아기의 정체를 의심하게 됐다고 말하긴 어렵다. 영화는 유전자 검사를 추동한 야니스의 내적 갈등과 불안을 찬찬히 들여다보거나 그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설명하는 데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야니스의 행동만큼이나 의아한 상황은 글의 도입부에서 언급한 장면 이후에도 벌어진다. 그는 세실리아가 자신의 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도, 그러니까 화면에 이미 커다란 생채기가 난 다음에도,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아기와의 일상을 이어간다. 심지어 전화번호도 바꾼다. 야니스는 왜 이 결과를 모른 체하는 걸까. 그는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보호 혹은 방어하려고 하는 것일까. 자신이 낳은 아이를 찾을 생각은커녕, 궁금해하지도 않는 이유를 알 길은 없다. 영화는 이 물음에 답하는 방식으로 서사를 밀고 가는 대신, 모녀가 지속하는 나날과 야니스가 세실리아에게 쏟는 애정을 그저 보여주는 데 힘쓴다.
앞의 두 대목만큼이나 난감한 순간은 또 있다. 야니스는 산부인과에서 같은 입원실을 쓰던 아나와 우연히 재회한 날, 아나의 아기 아니타가 잠자던 중 이유도 모른 채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병원에서 뒤바뀐 야니스의 친딸이 아니타일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영화는 아니타가 이미 사라진 시간대에서야 야니스와 아나를 조우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물음을 제기하려고 아니타의 돌연한 부재가 필요했던 것일까. 그뿐만 아니다. 아니타의 죽음이 알려진 지 얼마지 않아 아나가 집단 성폭행을 당해 낳은 딸이 세실리아라는 사실도 밝혀진다. 이 영화의 충격적인 선택과 설정은 여러 면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지만, 분명한 건 이들이 복합적인 지평에서 서로 얽히고 연결되며 결국 영화 바깥을 날카롭게 응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패러렐 마더스>는 삶을 이전 상태로 되돌릴 수 없는 사건과 결단의 순간들을 빠른 속도로 전개하면서도 의미와 맥락을 손쉽게 해명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 순간들을 의도적인 공백으로 남겨둔 채, 다만, 그 공백을 묻게 한다. 아마도 그것은 이 영화가 ‘뒤바뀐 아기’라는 일견 상투적 멜로드라마 뼈대를 통해 몰두하려는 스페인의 과거와 현재, 즉 프랑코 정권에 의해 실종되고 학살되어 여전히 수습되지 못한 존재들의 역사적 공백에 닿아있을 것이다. 영화는 그 역사적 공백을 어떠한 이야기로 새삼 환기하고 싸우며 기억할 수 있을까.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야니스의 서사에 새겨둔 이상한 공백들은 이 문제의식을 영화라는 허구의 언어로 탐색해보려는 태도이자 결과로 보인다.
덧붙이며. 영화 말미, 유해 발굴 작업으로 백골들이 하나둘 땅 위에 모습을 드러낼 때, 마을 여인들의 행렬이 천천히 그 슬픈 죽음의 대지를 향해 걸어온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무참히 사라져버린 자신의 혈연을 찾아 헤매며 오랜 시간 기다리다 마침내 그 죽음을 애도하러 온 후손들이다. 혈통을 기리기 위해 모인 이 뒤늦은 행렬은 그러나, 나이 든 여인들과 그들 앞에 선 아나와 야니스 그리고 어린 세실리아의 조합에 의해 신기하게도 ‘핏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공동체의 형상으로 체감된다. 그 장면의 의연함을 보며 문득 깨닫게 되었다. 결국 <패러렐 마더스>에 여러 번 등장하는 유전자 검사 장면들은 (혈연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로소 혈연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등장한 건 아니었을까. 그 일을 여성들이, 감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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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은(영화평론가, 매거진 필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