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이란 무엇인가. 20년 경력의 곽아람 기자는 이 질문을 오래 품고 궁리한 끝에 “읽고 쓰는 것을 넘어서 그 결과물을 어떻게 체화하느냐와 관계가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체화를 가능하게 하는 마지막 장소로 대학의 강의실을 떠올렸다. 실용도, 쓸모도 라틴어나 고전 문학, 동양미술사 수업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이 공부들은 그를 세계를 깊이 이해하는 힘을 가진 사람, 살면서 공부의 기억으로 종종 위로 받는 사람이 되도록 해주었음을 기억해냈다.
『공부의 위로』는 곽아람 기자가 스스로의 쓸모를 회의하게 될 때 자신을 의심하지 않고 성실하게 ‘지금 여기’에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해준 대학 시절의 강의실로 순간 이동하는 책이다. 그 모든 쓸모 없어 보이지만 귀하디 귀한 공부들. 이 목록을 보는 것만으로도 공부의 힘을 생각하게 된다.
“분별 있는 개인이 많아지면 세상은 좀 더 좋은 곳으로 변한다”는 곽아람 기자. 그는 『공부의 위로』를 통해 독자 역시 공부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분투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됐습니다.
교양이란 무엇인가
“교양에 대한 책을 쓰고 싶다고 오랫동안 생각했다”(10쪽)고 하셨어요. 교양의 가치랄까, 교양의 힘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욕망은 어디에서 비롯했던 건가요?
희미하게나마 ‘교양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꽤나 오래되었을 겁니다. 언론에 정치인들의 ‘막말’이 보도되는 걸 볼 때마다(성희롱이라든지 여성 비하 같은 것들 포함해) 궁금했습니다. 많이 배우고 지위도 높은 분들의 언어가 왜 저렇게 아름답지 못할까, 하고요. 학벌이 좋거나 돈이 많거나 높은 자리에 있는 것과 교양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교양’이란 무엇인가, 그 ‘교양’이라는 건 대체 어디서 오는가에 대한 질문에 다다랐고요. 그건 결국 읽고 쓰는 것, 또한 읽고 쓰는 것을 넘어서 그 결과물을 어떻게 체화하느냐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체화하느냐, 라고요.
네, 그 체화라는 것이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과는 달리 인간으로서의 어떤 자세, 어떤 품위, 어떤 배려를 체득했느냐와 연관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다면 그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장소는 대학이지 않을까, 그중에서도 대학의 교양강의이지 않을까, 하는 것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 마침 민음사에서 책을 쓰자는 제의가 들어왔고요. 인문교양서를 주로 내는 출판사의 성격과 이러한 콘셉트의 책이 잘 맞지 않을까 생각했고, 출판사에서도 동의하여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작가님은 이 책을 또한 “모범생으로 살아온 사람의 힘에 대한 이야기”(7쪽)라고 서문에 밝히셨잖아요.
사실, 입시제도에 오래 시달리다 대학이라는 곳에 온 것이니 대학생 때는 해방감을 맛보고 싶기도 하고, 다시 강의실 의자에 앉아 있기 싫고 그렇죠. 사회에서도 ‘진정한 대학생’은 강의실 밖에서 ‘산지식’을 배우는 거라며 부추기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대학이라는 공간이 무언가를 끝까지 공부해 어떤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 어린 학생들 눈높이에 맞춰 그 지식을 전수해주겠다는 결심을 단단히 하고 있는 곳이잖아요. 더욱이 졸업하면 그런 밀도와 강도의 지식을 한꺼번에 배울 기회는 그 어디에서도 주어지지 않고요.
그러니까 공부의 쓸모에 대한 말씀이기도 한 것 같아요.
공부의 ‘쓸모’를 이야기하셨는데, 진정한 공부의 ‘쓸모’란 당장은 쓸모 없어 보이는 교양 공부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대학 공부의 진정한 쓸모는 대학을 졸업한 후 20년쯤 지나서 깨닫게 되지 않을까요. 그때, 뇌가 아직 굳기 전 청춘의 시절에 흡수한 지식이라는 게 지금 이렇게 내게 도움이 되는구나, 하는 깨닫는 시기가 그쯤인 것 같아요. 교육이라는 것이 씨 뿌리고 수확할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인데, 그걸 놓고 “대학 졸업하고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쓸모 있는 걸 가르치라”고 요구하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인거죠.
그렇다면 ‘학문하기’를 좋아하던 모범생으로서 작가님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어떤 남다른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학문하기’라고 말한다면 너무 거창해요. 정말 진지한 ‘학문’을 업으로 삼고 있는 연구자들이 세상엔 정말 많으니까요. 저는 ‘학문’이라는 걸 하고 싶었던 20대의 모범생이었던 거죠. 모범생이 가진 힘이라고 하자면 결국은 성실함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보다는 ‘지금 여기’에서의 의무에 충실한 것이 길게 보면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싶어요.
쓸모만이 답은 아니다
실용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지금과 같은 시절에 작가님의 공부 목록들, 이를테면 ‘인도미술사’, ‘라틴어’, ‘종교학’ 등을 보고 있자면 낯설기도 하도 궁금증도 생겨요. 이러한 것을 공부한 경험은 지금, 작가님에게 어떤 형태로 남아 있나요?
일단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이야기하자면, 상식을 풍부하게 해 주었고요(웃음). 좀 더 진지하게 이야기하자면 세계를 깊이 이해하는 힘을 길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인도미술사’를 배움으로써 인도에 대한 소설을 접하더라도 좀 더 깊이 들어가 사유를 뻗어갈 수 있게 되었고요. ‘종교학 개론’을 배움으로써 나의 종교만 옳다고 생각하는 독단론에 빠지지 않게 될 수 있었죠. 9·11사태 같은 것이 일어났을 때 종교라는 것이 왜 이렇게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폭력적인 양태를 띨 수밖에 없게 되었을까 생각하다 보면 그런 생각의 씨앗은 대학 강의실에서 ‘종교학 개론’을 들을 때 뿌려진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또 “잊히는 과정에서 정신에게 깊은 자국을 남기고(중략) 고단한 밥벌이의 나날에 자그마한 위로가 될 싹이 움튼다”(9쪽)고도 하셨어요.
‘위로’라는 측면에서 이야기하자면, 결국 인문학 공부라는 것은 무용해 보이지만 그 무용해 보이는 것을, 무용하더라도 알고 싶다는 욕망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조직원으로서 ‘쓸모’를 증명해야 하고, 그것이 밥값에 대한 대가이기도 한데, 사실 제가 원한다고 해서 제 쓸모를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해 질책을 듣거나 제가 생각해도 제 일의 결과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스스로의 쓸모를 생각하면서 회의하게 되잖아요. 그럴 때마다 쓸 데도 없어 보이는 라틴어를 단지 좋아서 공부하던 대학 시절의 저를 떠올리면 ‘그래, 꼭 쓸모만이 답은 아니지’라는 생각이 들며 위안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작가님께서 경험했던 ‘공부로 위로 받았던 구체적인 순간’들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조금 전 말씀 드렸듯이, 라틴어 수업에서의 위로가 「파니스 안젤리쿠스」라는 라틴어 성가를 통해 위로가 되어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순간을 겪었어요. 그러니까 세상에는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진 언어가 있고, 그 언어로 적힌 글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고, 당장의 쓸모를 모르면서도 그걸 연구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내가 당장은 쓸모 없는 인간이어도 괜찮다는 그런, 쓸모만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그런, 위로 말이죠. 그 외에도 대학교 때 고전 읽기 수업을 많이 들었는데요.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책에 그려진 수많은 삶의 양태를 접하고 그를 통해 타인을 이해하는 폭을 넓혀가는 일이니까요. 제게 어떤 고난이 일어나더라도 책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아, 이건 언젠가 누군가도 겪은 일이야’ 생각하면서 그 고난이 제게만 굳이 일어나는 불행은 아니라고 다독이며 버텨내게 되는 경험이 여럿 있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 챕터에 등장하는 ‘판교’에 관한 일화를 무척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공부란 과연 한 사람의 일상을 무척 풍부하게 만드는 것 같더라고요.
그렇죠, 흔히들 ‘판교’라는 단어에서 장류진 작가의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에 나오는, IT기업들이 밀집한 테크노밸리나 부동산 값 들썩이는 투기 지역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인문교양 지식이 바탕이 되어 있는 사람들은 ‘판교(板橋)’라는 단어에서 ‘널다리’라는 지명의 의미를 생각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죠. 그리고 거기에서 나아가 ‘板橋’라는 곳이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되고, ‘그렇다면 板橋가 동아시아에서 일반적인 지명이 된 까닭은 무엇일까?’라는 데까지 사고를 뻗어갈 수도 있는 거고요. 저 같은 경우에는 대학의 교양 한문 시간에 ‘板橋’라는 곳이 중국 고전에서 ‘친구를 보내는 곳’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판교에 갈 때마다 스타트업이나 부동산이 아니라 친구 혹은 우정 같은 걸 생각했었어요. ‘판교’라는 곳이 삭막한 곳이 아니라 다정한 곳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던 것이죠.
“인문교양의 힘이란 남과 같은 것을 보면서도 뻔하지 않은 또 다른 세계를 품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62쪽)라고 하신 부분이 떠오르네요.
그래서 결국 인문교양의 힘이라는 것은 남들과 같은 걸 보면서도 다른 세계를 하나 더 품을 수 있는 것이고, 같은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언어의 여러 층위를 탐험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님의 ‘암기’에 대한 철학도 인상적이거든요. “암기로 지식을 주입하는 일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을 토양 삼아 창의성이라는 꽃이 자라날 수 있을까?”(131쪽)라고 하셨잖아요.
저는 예전부터 주입식 교육에 대한 비판에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흔히들 주입식 교육과 창의성을 대척점에 놓는데요. 암기로 습득한 지식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을 토양 삼아 창의성이라는 꽃이 자랄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교실을 박차고 나와 자유롭게 거리를 방황하며 배움을 쌓은 이가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르며 창의성을 꽃피우는 이야기는 영화 속에나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에 많이들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암기라는 것이 힘들고 지루하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지루한 과정 없이 단번에 성과를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동양의 유교적 전통에서 경전에 대한 공부는 암기로 시작하는데, 그렇다면 주입식 교육으로 길러진 우리 선조들은 창의성이 없는 사람들이었나요? 그렇지 않다는 것에 아마 많은 분들이 동의하실 겁니다.
암기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확장하자면 기억하는 것,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이어가는 것 또한 교양인/공부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암기를 통해 지식을 습득하여 일단 터를 다져놓으면 언젠가 그 지식이 자신의 것이 되어 자기도 몰랐던 힘을 발휘하게 되는 순간이 반드시 옵니다. 암기를 할 수 있는 것도 뇌가 아직 굳기 전인 20대 한때까지이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암기력이 떨어지는데, 어떤 능력이라는 것의 최대치가 주어졌을 때 그걸 활용하는 기회를 인생에서 놓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분별 있는 인간이 되는 일
뜻밖에 놀란 것은 작가님의 기록물 보관 역사였어요!(웃음) 대학 시절의 수업 자료와 교재, 리포트 등을 지금까지도 보관하고 계시더라고요. 무려 20년 전의 기록들을 지금껏 소중히 간직하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자꾸 생각했어요. 특별한 마음이 있는 걸까요? 작가님의 성향과도 관련이 있을까요?
그건 제가 맥시멀리스트라 그렇습니다. 아무것도 못 버리는 성격이라 각종 물건들을 집에 쌓아놓고 있는데, 그런 성격 때문에 물론 집을 좁게 쓰게 되고 불편한 점도 있지만 이번 책을 쓰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죠. 미니멀리즘이 유행하면서 저 같은 맥시멀리스트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지만요.(웃음) 저는 인류의 문화유산은 맥시멀리스트, 즉 저처럼 수집가 기질이 있는 맥시멀리스트가 없었다면 후손에게 전승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버리지 않는 수집가가 있어야 박물관도 가능하고 미술관도 가능한 거니까요. 대학 시절 필기와 수업 교재, 자료와 리포트가 제게는 대학생으로서의 획기적인 삶을 시작하고 본격적으로 지식 탐구를 시작하던 시기의 소중한 기록이라 도무지 버릴 수 없었습니다. 책을 썼으니 이제 버려도 될까요?(웃음)
그렇게 보관하고 계신 자료들 가운데 작가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소중하게 여기는 자료는 무엇인지도 궁금하네요.
책에도 소개한 ‘독일명작의 이해’라는 수업시간에 만든 책이 가장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 수업 시간의 최종 과제는 수업시간에 배운 것을 중심으로 자신만의 책을 만들어 제출하는 것이었는데, 저는 그 수업에서 제 인생 최초의 책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때 만든 책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괴테, 헤세, 브레히트 등 독일 문인들과 그 작품에 대한 수업 자료와 제가 수업을 들으며 쓴 글, 수강생들과 함께 돌려보며 읽은 다른 학생들의 독후감 등을 엮어 한 권의 책으로 편집하고 제목을 기형도의 시에서 따와 ‘대학 시절’이라고 붙였지요. 제 대학 시절을 한 권의 책으로 요약하자면 바로 그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말씀하신 수업을 “인생의 지표가 되는 수업”(230쪽)으로 꼽기도 하셨죠. 어떠한 점에서 ‘인생의 지표’가 되어주고 있는지도 궁금한데요.
그 수업의 마지막 시간에 수강생들은 모두 함께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었습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파우스트의 명구가 그 수업을 들은 학생들에게 인생의 모토가 되곤 했죠. “선한 인간은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결국 바른 길을 찾는다.”라는 다른 문장과 함께요. 그런 문장들이 제가 살면서 방황을 거듭하고 암흑 속을 헤매고 있는 느낌이 들 때마다 결국은 빛을 찾아 나갈 거라는 걸, 지금 이렇게 헤매는 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해 주었어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손을 더럽혀야만 할 때가 있는데요. 그런 내가 너무나 나쁘고 하잘것없는 인간처럼 느껴질 때도 ‘결국 바른 길을 찾아나갈 것’이라는 위로와 확신을 주었어요.
책을 읽는 내내 ‘양질의 배움’이라는 것이 배우고자 하는 이의 욕구, 그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질문과도 연결된다는 점을 곱씹게 돼요. 작가님은 이 책을 통해 독자에게 어떤 마음을 불러 일으키고 싶으셨나요?
일단 제 또래의 독자들에게는 대학 시절을 회상하며 그 청춘의 시절을 다시 누리는 기쁨을 맛보도록 하고 싶었고요. 막 대학에 입학한 독자들은 제 책을 통해 대학생이라는 특권에 대해, 공부의 기쁨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랐어요. 그리고 나아가 실용의 시대에, 무용해 보이는 인문학의 힘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학문을 업으로 삼지 않는 사람에게 공부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으면 더 좋겠지요.
저 역시 지금 막 대학생활을 시작한 분들이 읽어도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그밖에 이 책을 꼭 추천하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어떤 분들일까요?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거창한 마음을 가지지 않더라도 분별 있는 개인이 많아지면 세상은 좀 더 좋은 곳으로 변한다 생각합니다. 교양을 쌓는다는 건 결국 분별 있는 인간이 되는 일이라 생각하고요. 책을 읽는 분들이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분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픈, 세상이 더 나아지길 바라는 모든 분들께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곽아람 2003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2021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출판팀장을 맡게 됐다. 어린 시절 동화책과 미술책 속에서 키워온 꿋꿋함과 상상력은 어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꾸준히 글을 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미술경영협동과정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에 2016년 NYU IFA(The Institute of Fine Arts)에서 미술사학과 방문연구원으로 있었으며, 크리스티 에듀케이션 뉴욕의 아트비즈니스 서티피컷 과정을 마쳤다. 독서 팟캐스트 [곽아람의 독서알람]을 진행했고, 『매 순간 흔들려도 매일 우아하게: 모멸에 품위로 응수하는 책읽기』, 『결국 뉴요커는 되지 못했지만』, 『바람과 함께, 스칼렛』, 『미술 출장』, 『어릴 적 그 책』,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 『그림이 그녀에게』 등을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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