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역사는 곧 생각의 역사이다."
사회 운동가이자 에세이스트인 리베카 솔닛의 말입니다. 솔닛의 책 『걷기의 인문학』을 읽다가 이 문장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솔닛은 "걷기란 생산 지향적인 우리 시대 문화와는 애초부터 거리가 있는 행위", "그 자체가 수단이자 목표인 행위"라며 그런 점에서 걷기는 인문학과 매우 비슷하다고 말했습니다. 걷기란 "인간의 의도적 행위 중에서 육체의 무의지적 리듬(숨을 쉬는 것, 심장이 뛰는 것)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일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과 뭔가를 해내는 것 사이의 미묘한 균형"이라고 말했습니다.
솔닛의 말이 아니더라도, 뭔가를 생각하고 마음을 정리하기엔 걷기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한 발 한 발 내딛으면서 만들어내는 규칙적인 흐름과 리듬, 그리고 이에 따라 바뀌는 주변의 풍경이 마음을 가라앉힙니다. 가만히 한 장소 있는 것과, 뛰는 것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절묘한 리듬이 우리 마음을 차분하게 합니다. 손과 발을 움직이고, 앞에서 오는 사람들을 피하고, 주변의 장애물을 비껴가는 아주 최소한의 행동은 오히려 잡생각을 막아줍니다. 그래서 머리가 복잡할 때, 일이 잘 안 풀릴 때, 글쓰기가 맘처럼 안 될 땐, 편한 신발을 신고 길로 나갑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걷기란 매우 혁명적인 일이었습니다. 숲에 살던 인류의 먼 조상이 숲에서 나와, 나무에서 내려와 자신의 두 발로 서는 직립 보행이라는 엄청난 '결단'을 내렸기에 가능해졌으니까요. 이 직립 보행 때문에 우리는 지금 허리를 세우고 걷고 있습니다. 또 직립 보행으로 뇌의 용량이 늘어나면서, 다른 유인원과 달리 고차원적인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고 보면, 인류의 걷기와 생각은 그 역사를 함께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도연의 그림책 『걸어요』는 걷기의 의미, 걷기의 아름다움, 걷기의 매력을 보여주는 그림책입니다. 그림책을 펼치면 한 사람이 여행자 하나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배낭 메고 모자 쓰고, 양손에 등산 스틱을 짚으며 걸어갑니다. 주인공은 어디로 가는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걸을 뿐입니다. 어딘가에 닿기 위한 과정일 수도 있고, 걷기 자체가 목적일 수도 있겠지요.
잠자리와 나비와 무당벌레가 배웅을 받고 걷던 사람은 곧 길 위에서 복슬복슬한 강아지를 만나 함께 걷습니다. 뚜벅뚜벅 타박타박, 둘은 묵묵하게 우거진 숲을 지나고 징검다리를 건넙니다. 잠시 멈춰 하늘을 같이 보고, 계곡의 출렁다리를 건널 때 손을 잡기도 합니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바람이 세차게 불면 부는 대로 맞으며, 때론 길에서 마주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줍니다.
주인공이 걸어가는 풍경은 고요하고, 조용합니다. 우리가 걸을 때 볼 수 없던 풍경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바람이 불어오는 산과 들, 하늘에 떠 있는 구름. 당신이 걷는 길에도 이런 풍경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 풍경 속에서 주인공은 지치면 잠깐 걸음을 멈춰 차 한 잔 하며 힘을 얻고, 다시 걷습니다. 그렇게 걷다 많은 만남이 그렇듯 갈림길에서 헤어져 각자의 길로 갑니다. 하지만 걷는 사람은 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길 끝에 푸른 바다가 보입니다. 하지만 그 바다 또한 그에겐 끝은 아닐 것입니다.
길은 인생의 비유이자 은유입니다. 그림책은 자신의 인생을, 누가 뭐라든 제 속도로 묵묵히 걷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만나고 헤어지고, 기쁘고 슬프고, 놀랍고 또 지리멸렬한 우리들의 삶말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또 작은 힘을 내, 자기 생을 만들어갑니다.
나는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잠깐 하게 됩니다. 어떤 길을 걸어왔고, 걷고 있는지, 또 걷고 싶은지. 분명한 건 어떤 길을 지나왔던 우리는 또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발목 잡히지 말고, 미래를 너무 앞서 걱정하지 말고. 과거는 그것이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던 과거입니다.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지금 우리의 하루하루가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니 지금 나의 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이 그리 간단치 않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면 내 두 손을 꼭 쥐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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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미(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