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큰 기대를 가지고 있는 주력 도서나 내가 잘 해보고 싶은 책을 디자인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부담감과 기대감, 두 가지 마음이 든다. 작업 과정에서 시안의 윤곽이 순조롭게 잘 드러나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을 때에는 부담감이 크게 자리 잡는다.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은 큰 에너지를 주기도 하지만, 생각을 더 경직되게 만들기도 한다. 후자의 상황이 되면 시간이 갈수록 초조함까지 밀려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런 감정마저 잠시 뒤로 미룰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다.
나에게 『사이보그가 되다』라는 책이 그랬다. 이 책은 장애를 보완하기 위한 과학 기술의 꾸준한 발전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것이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현재 삶에 당장 도움이 될지 의문을 던진다. 과학 기술의 발전 속에서도 결국은 사람들과의 연립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고 말하는 책이다. 원고를 읽고 나니 일단 '사이보그' 하면 떠오르는 인간과 기계와의 결합 같은 이미지는 지양하고 싶었고, 책의 메시지가 잘 전달되는 디자인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책의 주제나 소재 자체도 이미지로 표현하기에 어렵고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어서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이 정도면 표지로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시안이 도무지 나오지 않아 마음이 답답했다. 이럴 때일수록 본문의 주요 내용을 한 번 더 읽어보고, 책과 관련된 이미지들을 다시 자세히 살펴본다. 그 속에는 정확한 정답은 없지만, 내가 결정해서 가야 할 방향은 분명히 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눈 — 이지양·유화수 작가님의 작업
이 책에서 각각 사진과 조각 작업을 진행해 온 이지양·유화수 작가님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과학 기술은 항상 몇 발자국 앞선 미래에 있고, 사람들은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불편함이 훗날에는 해소될 수 있길바라고 믿는다. 두 작가님의 작업은 언젠가의 먼 미래가 아닌 현재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신체적 제약이 있더라도 자기 몸으로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들의 현재를 생각하는 것이 느껴지는 작업이라는 점이 책의 내용과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자인을 할 때도 작가님의 작업과 그에 대한 개념이 내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책만의 조합을 찾아 나가기 — 본문 디자인
원고와 작가의 작업을 알아가며 생긴 이 책에 대한 깊은 이해도가 본문 구성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작가의 기존 작업을 기준으로 각 챕터의 내용과 연결을 생각하면서 사진을 추렸다. 시각적으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구성하고, 추가되어야 할 장면들을 담당 편집자와 이야기하면서 제안하고 조합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후에 저자인 김원영·김초엽 작가님과 이지양·유화수 작가님, 그리고 담당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모두 함께 만나서 책에 추가로 들어갈 사진을 촬영하기도 했다. 본문 디자인은 사진이 글과 어우러져 편안하게 보일 수 있도록 심플하게 구성하였다. 작가님만의 결로 쌓아온 작업들 덕분에 전체적인 톤을 묵직하게 통일시키고 시각적 재미도 줄 수 있었다.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표지 디자인
책의 내용을 너무 깊이 이해하면 생각이 많아져서 표지 시안 작업이 힘든 때도 생긴다. 시안 파일에 고민은 가득한데 시안이라고 보여줄 만한 것은 없었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아직 결과물은 없었지만, 그동안 고민하면서 생각을 많이 추려냈는지 새롭게 보이는 부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제일 흥미로웠던 것은 보청기의 다양한 모양이었다. 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는 비정형적인 모양에 고정용 고리가 달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일단 모양을 다양하게 따 두었고, 이 중에서 조형적으로 잘 어울리는 모양을 찾아 심플하게 변형하여 배치했다. 여기에서 더 그래픽적인 시도를 하면 이미지가 딱딱한 느낌이 들고, 책의 감동을 표현하기엔 이런 느낌이 맞지 않는 것 같아서 다른 방법을 고민하던 차에 이지양 작가님의 작업 중에 손을 위로 뻗고 있는 사진을 찾았다. 보청기 모양 안에서 서로를 향해 손을 뻗으며 곧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으로 사진을 편집해서 넣었다. 보청기라는 과학 기술과 그 안에서 서로를 잡아주는 연대의 마음을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이미지라면 표지로 나와도 될 것 같았다.
연립(聯立): 여럿이 어울려 섬. 또는 그렇게 서서 하나의 형태로 만듦
작가, 편집자, 디자이너 ─ 담당자 모두가 이 책에 관한 일에는 누구 하나 더하고 덜하다고 말할 것도 없이 모두 열의가 있었다. 그래서 책에 필요한 일이라면 누구나 기꺼이 좋은 마음으로 일했던 기억이 있다. 이 작업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존중하며 했던 경험 때문이다. 사실 책에서 말하는 '연립'을 책을 만들면서도 경험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완독 후에도 책의 메시지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하는 표지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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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해
북 디자이너. 돌베개 출판사에서 책을 디자인하고 있다.
alanis27
2023.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