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습관처럼 케이팝 신보를 모아 듣다 귀를 의심했다. 뭔가 잘못 들은 걸까? 분명 '청양고추'라는 단어를 들은 것 같은데. 범인을 찾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K-HOT CHILLI PEPPERS'. 올해로 데뷔 6년 차, 아홉 번째 미니 앨범을 발표한 남성 그룹 에이티즈의 타이틀 곡 'BOUNCY'의 부제였다. 우리만의 소리와 우리만의 리듬에 귀 기울여 보라 외치는 '좀 다른 Spicy / 청양고추 Vibe'는 스쳐 가는 양념 같은 프레이즈가 아닌 후렴구에서 곡의 중심을 탄탄하게 받치는 주요 키워드였다. 청양고추의 독보적인 존재감은 단지 곡 안에서 언어로서만 기능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비장의 무기인 총알을 숨기는 도구로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건 물론 음악방송 무대를 마무리하는 '엔딩포즈'에도 모습을 보였다. 앨범
케이팝의 기괴할 정도로 폭발적인 에너지를 매운맛에 비교하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이제는 케이팝 마니아 사이 고유 명사가 되어버린 '마라(麻辣)'가 대표적이다. 중국 요리의 한 갈래로 향신료인 초피와 고추의 매운맛을 뜻하는 한자를 붙여 탄생한 이 요리 명은 어느새 케이팝과 한 몸이라 해도 좋은 관계가 되어버렸다. 커뮤니티를 통해 알음알음 퍼져나가던 단어는 2020년 6월 발매된 그룹 스트레이 키즈의 첫 정규 앨범
내 비법은 색다른 spicy / 살짝만 스쳐도 정신 없지 / 주체 못 해 자꾸 빠져드는 맛 / 어지런 머리 네 두 손발이 / 이끌려 내게 이미 _<맛(Hot Sauce)> 중
매운맛이 나고 내가 매운맛이라 해도 좋을 세계였다.
흥미로운 건 이렇듯 맛집 탐방 클럽처럼 매운맛을 찾아 전 세계 방방곡곡을 누비는 대유행이 대체로 남성 그룹에만 해당한다는 점이다. 특히, 최근 케이팝을 이끌어 가고 있다는 4세대 여성 그룹의 경우 음악에서 퍼포먼스, 그룹 고유의 색깔까지 모두 'HOT'은 커녕 'COOL'을 지향하는 편이다. 덥다와 맵다는 두 가지 뜻을 요령 있게 섞어 쓰는 'HOT' 파처럼, 'COOL' 파 역시 '시원하다'와 '멋지다'는 의미를 동시에 가져간다. 'Blue Blood' 같은 노래 제목에서 '내 안에 빼곡하게 피어나는 blue' (ELEVEN) 같은 가사까지 푸른빛을 기본 컬러로 택한 모태 쿨톤 아이브는 물론 이보다 더 차가울 수 없는 금속성의 소리로 가득 찬 후속곡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르세라핌 역시 온도도 매력도 'COOL'함을 적극적으로 지향하는 그룹들이다. 콘셉트를 막론하고 (여자)아이들이 내뿜는 뜨거운 열기가 불꽃 가운데 가장 뜨겁다는 파란 불꽃의 서늘함을 닮은 것 역시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싶은 건 하나 더 있다. 각각 HOT과 COOL을 뚜렷하게 지향하고 있는 케이팝 남성 그룹과 여성 그룹의 최근 인지도 및 활동 방향성 차이가 그렇다. 웬만큼 튼튼한 위장을 가지 않았다면 쉽게 젓가락이 가지 않을 'HOT파'에는 케이팝 특유의 매운맛에 중독된 이들이 꾸준히 유입되고 있다. 팬덤 크기를 가늠하는 대표적인 지표인 케이팝 최다 초동 판매량이 대표적인 근거다. 당분간 절대 깨질 리 없을 거라 여겼던 방탄소년단의 (2020)이 기록한 330만 장이 넘는 판매량은 올해 들어 자신들만의 레시피로 만든 고유한 매콤함으로 돌아온 세븐틴(455만 장)과 스트레이 키즈(461만 장)가 각각 넘어섰다. 반면 '나는 나'라는 'COOL' 한 메시지를 앞세운 여성 그룹들의 경우 도를 넘어 열정적이거나 질척이는 건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린 'COOL' 한 시대정신과 호응하며 한동안 만나기 힘들었던 여성 그룹 호황기를 새롭게 개척해 가고 있다. 2023년 여름, 뜨거운 남성 그룹과 서늘한 여성 그룹이 서로 다른 매력으로 케이팝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당분간 쉽게 넘어지지 않을, 지금의 케이팝을 이끄는 두 개의 수레바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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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하(대중음악평론가)
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