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돌이는 큰 조카의 보물 1호다. 다홍색과 흰색, 연갈색의 스트라이프 무늬를 가진 65센치미터가량의 원숭이 모양 봉제 인형으로, 원돌이라는 뻔한 이름을 지어준 이가 태어날 아이를 위해 인형을 만들었던 동생이었는지, 태어난 이후 14년 넘게 꼬박 옆에 끼고 사는 큰 조카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여러모로 원돌이는 아이 엄마의 어릴 적 애착 인형인 토순이의 작명 계보를 따른다 할 수 있겠다.
토끼 모양의 손바닥만 한 분홍색 봉제 인형을 어린 동생은 온종일 손에 쥐고 살았다. 그 꼴이 보기 싫어서 어느 날 엄마가 몰래 가져다 버릴 때까지. 아마도 초등학교 입학이 엄마에게는 인내의 임계점이었으리라.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빠는 버릇은 쓴 약을 발라가며 어찌어찌 고쳤으나 동생의 인형에 대한 애착은 학교생활이 한참 이어진 뒤에도 도무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건 정상이 아니야.’ 엄마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고 학교에서 돌아와 토순이가 쓰레기와 함께 내다 버려졌다는 사실을 안 동생은 그날 대성통곡을 했다.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이후 두고두고 쏟아질 긴 시간의 원망에 비하면 그날의 절규는 귀여운 수준이었다는 것을.
그런 동생에게서 각기 다른 세 아이가 태어났다. 조카들은 저마다 동생의 일부를 나눠가진 듯했다. 애착의 습관들은 첫째가 가져갔다. 아이들에 대한 동생의 훈육 방식 중에는 피양육자로서의 경험에서 비롯된 어떤 반작용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었는데, 원돌이에 대한 첫째의 애착에 유달리 너그러웠다는 점이 바로 그랬다. 아이 엄마를 위시한 가족들의 이해 속에서 인형은 착실히 낡아갔다.
14년 차가 된 인형은 이제 세탁조차 쉽지가 않다. 아무리 조심해도 빨기가 무섭게 솔기가 터지고 천이 해지는 탓이다. 동생이 몇 번이나 천갈이를 권유했지만 아이가 완강히 거부했다. 6년 전, 텅 비어버린 인형의 가슴팍이 안타까워 내가 몰래 충전 솜을 넣어 꿰매준 일이 있었는데,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가슴이 불룩해진 제 인형을 보자마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늦도록 울음을 그치지 않는 바람에 허겁지겁 ‘지우야, 나는 원돌이야’로 시작하는 편지를 써서 한밤중에 우편함에 넣어준 일도 있었기에, 다들 이 낡은 인형의 수선에 대해서는 포기한 상태다.
올해 아이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여전히 등교할 때마다 침대 위에 낡은 원숭이 인형을 곱게 누이고 간다. 그 모습을 동생은 이제 슬슬 걱정스럽게 보기 시작했다. 그렇다한들 오래전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제 딸의 인형을 몰래 갖다버리는 선택을 하지는 않겠지만. 가끔 제 걱정을 내비치는 동생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쉽게 동조도 반박도 할 수가 없다. 다만 집안의 첫 손주이자, 부부의 맏이로 태어난 아이에게 더없는 사랑과 관심을 쏟으면서도, 우리가 종종 아이의 까다로운 기질과 예민한 성정에 의아해지곤 했던 기억을 더듬어볼 뿐이다. 애정의 크기와는 별개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할 때마다 너는 자주 서럽고 외로웠을까. 그 작은 마음의 구멍들을 품에 안은 인형으로부터 촘촘히 위로받았을까.
김진화 작가의 그림책 『여름이 오기 전에』를 읽으며 조카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이야기 속에는 엄마와 둘이 섬으로 여행을 떠나는 아이와 아이의 애착 인형인 길쭉이가 등장한다. 아빠는 오지 못했다. 샤워하다가 앞니가 부러져서. 아이는 커다란 청록색 고양이 인형을 내내 품에 안고 있다. 그러다 잠시 물놀이를 하러 가는 동안 ‘젖으면 안 되니까’ 이불 속에 두고 갔던 길쭉이가 청소업체의 세탁물 수거와 함께 사라지고 만다. 이후 애타게 인형을 찾는 아이의 독백이 이어진다. 온전히 내 편이었던 사람들과 가끔 마음이 어긋날 때에도 한결같이 자기 편을 들어줬던 길쭉이, ‘언제나 과자 냄새가 났’던 길쭉이, ‘엄마보다 밤이 먼저 찾아오면’ 함께 엄마를 기다려줬던 길쭉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난데없이 호텔 세탁물이 된 길쭉이가 다시 가족들을 만나게 되는 여정은 꺅 소리가 나게 귀엽고, 말갛고 순한 인물들이 서로의 빈틈을 보살피는 모습은 유쾌하고 다정하다. 에메랄드 빛 바다와 반짝이는 더듬이를 지닌 심해어가 있는 꿈의 여행지에서도 내내 전화로 아빠의 부러진 앞니 조각을 찾느라 여념이 없는 엄마나, 사이다 같은 바다에 뛰어들어도 길쭉이가 없으면 더는 재미가 없다는 아이에게 여행은 무엇이었을까. 사랑은 늘 불완전하고 계획은 종종 어긋난다. 온 마음을 주어도 아이는 때로 외롭고 눈앞에 펼쳐진 파라다이스도 티끌 같은 불안에 쉽게 가려진다.
뒤표지를 오래 들여다본다. ‘언제나 언제나 나의 길쭉이 언제나 언제나’. 인형과 한 몸처럼 서서 장난스레 고개를 내밀고 웃는 아이의 모습이 천진하다. 동시에 어린이의 말장난 같은 ‘언제나 언제나’가 서툰 사랑의 주문 같아서 애틋하다. 어린이 꼬리표를 떼고도 여전히 인형을 끌어안고 자는 큰 조카에게도 그랬을까. 그 낡은 인형은 ‘언제나’라는 약속의 다른 얼굴이었을까. 인형이 낡는 동안 아이는 자랐다. 아이가 자랄수록 우리 사이에 난 언어의 길도 조금씩 넓어진다. 그러니 언젠가 불완전하고 어긋나고 구멍 난 것들이 지닌 의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날도 올 것이다. ‘언제나’ 함께 할 수 없어서 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서도.
©김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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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루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 읽기 안내자. 비혼이고 고양이 '탄'의 집사이며, 채식을 지향하고 식물을 돌보며 산다. 그림책 『섬 위의 주먹』, 『마음의 지도』, 『할머니의 팡도르』를 번역해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