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사라진 소녀들의 숲』을 통해 한국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 허주은 작가가 2023년 에드거 앨런 포 수상작 『붉은 궁』으로 돌아왔다. 조선시대 영조 치하의 궁궐을 배경으로 한 이번 작품은 더욱 깊어진 정치적 음모에 한층 더 풍부해진 서스펜스로, 주인공과 독자가 함께 의문의 살인 사건에 몰입하여 추리할 수 있도록 한다. 그뿐만 아니라 로맨스 요소까지 가미되어 더 다채로운 읽을거리를 선사한다.
『붉은 궁』의 큰 줄기는 네 명의 여인이 살해되고 그 진범을 추적하는 것이지만, 많은 독자들이 의녀 ‘현’과 종사관 ‘어진’의 로맨스에도 뜨겁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신분과 계급이 다른 두 인물이 상호작용하며 관계가 점차 깊어지는 것이 인상적인데, 의녀와 종사관의 조합을 어떻게 떠올리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의녀와 종사관의 로맨스를 생각해 낸 것은 저의 두 번째 책 『사라진 소녀들의 숲』을 개정하던 때였습니다. Feiwel & Friends 출판사 편집자가 원고에 “로맨스를 쓰고 싶다고 했죠? 어쩌면 의녀와 암행어사에 대한 글을 쓸 수도 있을 것 같네요.”라고 코멘트를 달았더군요. 이 제안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수사 속에서 피어나는 로맨스를 너무나 좋아하거든요. 유능하고 지적인 여성이 수사관과 협력하는 상상을 했습니다.
『붉은 궁』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이나 문장이 있다면요?
‘나는 사라질 운명인 꿈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 꿈을 떠나보낸다고 해서 내 인생을 버린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내가 원한다고 상상했던 삶을 놓아버린 것뿐이었다.’- 『붉은 궁』 359쪽
자신의 정체성을 궁궐 내의녀로서 성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꿈을 성취하지 못해도 인생을 버리는 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현의 캐릭터를 가장 잘 보여주기 때문에 이 문장을 가장 좋아합니다.
미스터리 작가는 범인의 입장에서 사건을 설계하는 동시에, 사건을 쫓는 자의 입장이 되기도 해야 합니다. 사건과 알리바이를 구축하는 일과 그것을 추적하고 밝혀내는 일 중 더 신경 쓰고 있는 쪽이 있다면요?
글을 쓰기 전, 저는 항상 그 시대에 일어났을 법한 범죄에 대해 생각하며 역사적인 탐구부터 시작합니다. 미스터리를 활용하여 역사를 강조하고 싶거든요. 작업 초기에는 항상 범죄와 알리바이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그리고 글을 쓰면서 제 초점은 점점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에게 옮겨갑니다. 현과 함께 단서를 찾아가며 저는 현이 누구인지, 개인적인 어려움이 무엇인지 탐구하지요. 그를 통해 제가 집중하는 주제와 역사적인 사건을 어떻게 증폭시킬 수 있는지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한국 역사를 기반으로 창작한 이야기를 한국이 아닌 세계에서 먼저 선보이고 있습니다. 작품이 다른 언어로 번역될 때 어떤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나요?
해당 언어의 번역가들이 번역 중에 종종 연락해 옵니다. 문화에 대한 이해 없이는 올바른 번역을 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독일어판 번역자는 ‘남녀칠세부동석’이나 천민 출신의 의녀가 양반 남성과 어울리는 것이 가능한지 등을 묻더군요.
한국 독자들은 이미 자신의 역사에 해박하니 번역가가 해야 할 일이 더 많았을 겁니다. 디아스포라 작가가 영어로 쓴 작품이라는 것이 드러나지 않게요. 사소한 용어 같은 것들이 조금만 이질적이어도 독자들의 몰입에 방해가 될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제 소설 두 권을 이질감 없이 연달아 번역해 준 유혜인 번역가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붉은 궁』은 한국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번역·출간되었습니다. 세계 각지의 다양한 독자들을 만나는 기분이 어떤지요? 또, 한국어판에 대한 감상도 궁금합니다.
전 세계 독자들로부터 제 책에 대한 이야기를 소식을 들을 때마다 한국 문화가 각광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며, 이를 위해 길을 열어 준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제 책이 한국에 번역되는 것은 작가로서 제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제가 쓴 이야기들이 한국 역사에 정통한 한국인에게 과연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수많은 한국 독자가 제 책을 즐기는 것을 보고 진심으로 기뻤답니다. 특별히 한국어판 표지와 내지 일러스트에 전 세계 독자들이 열광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의녀가 되었던 현처럼, 자아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는 독자들에게 『붉은 궁』이라는 작품이 크게 와 닿을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수년 동안 여러 출판사에 글을 투고했지만 결과는 번번이 거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약 1년간 집필과 투고를 멈췄어요. 그러고 나니 뜻밖에 자유가 찾아왔습니다. 책으로 출판되는 것은 단지 제 꿈에 불과하고, 그 꿈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다시 글을 쓰고 투고를 하면서, 그 1년간의 휴지기는 귀중한 교훈이 되었습니다. 꿈을 좇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세태지만, 그 과정이 나를 너무 고통스럽게 한다면 새로운 길을 찾아도 된다는 것을요. 삶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열정과 꿈, 야망을 키울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더불어 미스터리 외에 도전하고 싶은 장르가 있을까요?
연산군 통치를 배경으로 한 로맨틱 정치 스릴러물인 『A CRANE AMONG WOLVES』 (24년 5월 영어판 출간) 출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제인 오스틴의 작품, 특히 『오만과 편견』에서 영감을 받은 조선 시대 로맨스 소설을 집필 중입니다. 사랑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순수한 로맨스 소설을 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더군요. 제 편집자는 “이번 책에는 시체가 없어야 한다는 거 기억하죠? 가볍고 말랑말랑하게! ”라며 끊임없이 제게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어렵지만 이 도전을 즐기는 중입니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