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키 마키의 『이상한 다과회』가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던 2021년 늦겨울, 나는 밤마다 플래시몹 영상을 찾아보고 있었다. 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 4악장 플래시몹이 그중 하나였는데, 연출이 특히 돋보이는 이 영상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바르셀로나의 어느 광장에 연미복을 입은 콘트라베이스 주자가 등장하며 시작된다. 그의 앞에는 뒤집어 놓은 검은색 탑햇이 있고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다가와 모자 안에 동전을 집어넣는다. <합창>의 주제 선율이 묵직한 콘트라베이스 현을 타고 조용히 흐르기 시작한다. 바순과 비올라, 바이올린 주자가 차례로 등장한다. 화음이 쌓인다.
곧 청중의 반원이 조금씩 두터워진다. 어느 틈에선가 악기를 든 이들이 하나둘 몰려나온다. 빠르게 열을 갖추는 현악기와 관악기 들 사이에 팀파니가 있다.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입은 지휘자가 선두에 선다. 합창단원들이 열의 뒷줄에 합류한다. 누군가는 아이를 목마 태우고, 또 누군가는 품에 안고, 어떤 이는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또 어떤 이는 한껏 멋을 낸 채로 다 함께 어우러져 ’자유의 송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연주가 클라이맥스로 향한다. 고조되는 음률 사이로 신이 난 아이들과 감탄하는 어른들의 얼굴이 교차되고 광장에는 음악이 가득 차오른다.
범지구적 단절의 시기에 방안에 앉아 작은 화면 너머로 보았던 이 생생한 접속의 순간들은 자주 나를 울컥하게 했다. 우리가 저것을 잃었다고, 저 연결의 가능성을 상실했다고 혼자 낙담했다. 우울에 갇힌 채로 온갖 도시의 장소에서 벌어지는 우연한 기쁨의 현장을 탐색하는 일은 그 뒤로도 오래 이어졌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이것이 단지 시기적 특수성에 국한한 갈망이나 결핍만은 아니라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우정의 형태가 실은 플래시몹의 성격과 매우 흡사했던 것이다. 『이상한 다과회』 같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로마나의 트란스발에서 한 장의 초대장이 날아온다. 11월 3일 오후 6시 3분이라는 다소 구체적인 일시가 적힌 초대장을 받은 이들이 세계 곳곳에서 각양각색의 이동 수단을 타고 트란스발로 향한다. 요코하마에서, 라이푸르에서, 낭트와 안트베르펜에서, 더블린과 덴버에서 저마다 전기 자전거와 코끼리, 경비행기, 5인용 자전거, 하늘을 나는 말과 수소 풍선, 바퀴 달린 구두, 맥주병 배, 타조가 끄는 수레와 신록(神鹿)을 타고 트란스발 성 앞으로 모여든다.
이 수상한 모임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캄캄한 숲 너머의 바위산 아래에서다. 흰 식탁보가 깔린 테이블 위에는 초대받은 이들을 위한 찻잔이 놓여 있다. 자리가 채워지고 달이 떠오르면 마침내 모두가 그토록 기다리던 ‘때’가 이른다. 바위산에서 천연 코코아가 솟아오르는 것이다. 다 함께 ‘브라보!’를 외치며 코코아를 음미하고 나면 이 화려한 여정은 끝이 난다. 모였던 이들은 곧바로 내년을 기약하며 각자 타고 온 이색 수단에 몸을 싣고 다시 먼 여정에 오른다.
코코아 한 잔을 마시러 전 세계 각지에서 모여드는 이 이상한 다과회 이야기가 나는 몹시 좋았다. 이 이야기 속에는 일 년에 한 번 천연 코코아가 바위산에서 솟아나는 시간을 예측해 초대장을 쓰는 이가 있고, 그 초대에 응하기 위해 저마다 참신한 탈것을 골라 기꺼이 먼 길을 오르는 이들이 있다. 겨우 코코아 한 잔을 나눠 마시기 위해서, 라고 생각하면 들인 정성과 수고가 유난스럽다. 그러나 우정을 나누는 특별한 방식으로 치자면 이만큼 참신한 것이 있을까.
그러니까 이 이상한 사람들의 행위는 일종의 플래시몹이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모여 짧은 시간 동안 주어진 황당한 행동을 하고 곧바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흩어지는 것. 플래시몹의 사전적 정의에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특정 관계의 소수로 축소하면 더도 덜도 말고 딱 『이상한 다과회』가 된다.
우정을 모든 관계의 기본값이라 믿는 이들이 있다. 반복되는 삶의 허무와 권태로부터 저항하기 위해 기발한 궁리를 하는 데에 소질이 있는 이들도 있다. 그런 이들이 맺는 어떤 우정은 종종 플래시몹 같을 것이다. 그 모습은 때로 엉뚱하거나 이상해 보일지도 모른다. 숨어 있던 솔리스트들이 어디선가 나타나 이루는 능청스러운 협주처럼, 비밀과 기쁨으로 엮은 작은 약속을 맹종하는 형식주의자들의 만남처럼. 그런데 내가 바라는 우정의 모습이 바로 그렇다. 각자가 고유한 주체임을 아는 동시에 서로를 위한 능동적 행위자가 되는 것. 함께 도모할 즐거움의 방식을 궁리하며 서로의 삶에 영감이 되는 것.
그러니 친밀한 약속과 황당한 궁리와 우연한 접속이 이루어지는 세상 모든 열린 공간들은 얼마나 매혹적인 장소인가. 그 각각의 장소들이 품고 있는 연결의 가능성이란 또 얼마나 놀라운가. 마침 가을이다. 문밖으로 우연과 인연의 그물을 넓게 펼쳐 놓고 몸이 노곤하도록 걷다 들어와 ‘코코아를 마시고서 포근히 잠’들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무루(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