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그 병 안에 우는 사람이 들어 있었는지 우는 얼굴을 안아주던 손이 붉은 저녁을 따른다 지난 여름을 촘촘히 짜내던 빛은 이제 여름의 무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올해 가을의 무늬가 정해질 때까지 빛은 오래 고민스러웠다 그때면,
내가 너를 생각하는 순간 나는 너를 조금씩 잃어버렸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순간 너를 절망스런 눈빛의 그림자에 사로잡히게 했다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순간 세계는 뒤돌아섰다
만지면 만질수록 부풀어 오르는 검푸른 짐승의 울음 같았던 여름의 무늬들이 풀어져서 저 술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새로운 무늬의 시간이 올 때면,
너는 아주 돌아올 듯 망설이며 우는 자의 등을 방문한다 낡은 외투를 그의 등에 슬쩍 올려준다 그는 네가 다녀간 걸 눈치챘을까? 그랬을 거야, 그랬을 거야 저렇게 툭툭, 털고 다시 가네
오므린 손금처럼 어스름한 가냘픈 길, 그 길이 부셔서 마침내 사윌 때까지 보고 있어야겠다 이제 취한 물은 내 손금 안에서 속으로 울음을 오그린 자줏빛으로 흐르겠다 그것이 이 가을의 무늬겠다
- 「이 가을의 무늬」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허수경)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를 가늠하는 한 가지 방법은, 식탁 위에 올라간 술의 종류가 바뀌는 걸 지켜보는 거예요. 흔히 맥주의 색에서는 여름을, 와인의 색에서는 가을을 연상하고는 합니다. 황금빛 액체가 붉은, ‘오그린 자줏빛’으로 흐르면 날씨도 변하고, 밤이면 개구리 대신 풀벌레 소리가 들리겠죠. ‘나’는 헤어졌고, ‘너’를 생각하며 빈속을 술로 채우는 장면을 상상해 봅니다. 물론 시인이 말한 것은 이런 장면이 아닐 거예요. 그저 읽는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른 또 다른 장면일 뿐입니다. 이별을 앞둔 사람, 이별을 맞이한 사람은 어느 장면에서든 이별만을 생각하는 법이죠.
지금은 영영 가지 않을 것만 같은 여름도 가고 가을이 옵니다. 울음은 여름의 무늬 속으로 흘리세요. 곧 가을의 무늬가 옵니다.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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