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무렵 한창 추리 소설을 읽는 일에 빠져 있었다. 내가 그때 대부분 빌려 읽었던, 아니 ‘봤던’ 책들은 대부분 지적 허영을 위해 선택된 두껍고 난해한 백인 남자의 소설이었지만, 완전히 푹 빠져 즐겼다고 할만한 책들은 대부분 스릴러가 가미된 에로틱한 소설이거나 어떤 역사적 인물의 허구적 전기이거나 당연히, 아무렇지 않게 남들을 무시해 대는 강퍅한 성격의 탐정이 주인공인 추리 소설이었다. 나는 특별하다는 시건방진 자의식이 하늘을 찌를 때였다. 추리 소설 속 탐정에 나를 대입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지금에야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지만 당시에는 셜록 홈즈의 필적 관상학이 그렇게 멋있어 보였다. 필체를 통해 글씨를 쓴 사람의 나이와 성격, 직업까지 알아낼 수 있다니! 기본적으로 추리 소설 속 탐정은 편집증적 기질이 있으며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주변 모든 사물, 인물, 상황을 의심하고 불신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니 ‘건강한’ 인간관계를 맺지도 못하고 정서적으로도 거의 불모 상태다. 하지만 눈길이 닿는 거라면 뭐든지 미스터리로 만드는 그들의 추리 능력만큼은 어느 정도의 부작용을 감수하고서라도 손에 넣고 싶을 만큼 부러운 것이었다.
결코 추리 소설을 많이 읽어서 ‘이렇게’ 됐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분명히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우리 동네를 거대한 미스터리의 집합체로 여기게 된 데에는 말이다. 서울시 관악구에 위치한 통칭 ‘난곡’이라 불리는, 1)소득 수준이 낮고 2)노인이 많고 3)노인만큼 비둘기도 많은 법정동 신림동은 정말이지 평생을 도전해도 결코 다 풀 수 없을 미스터리로 넘친다. 내가 이 지역에서 특히 좋아하는 수수께끼는 단연 전단지 구경이다. 솔직히 전단지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 사람들의 희망과 의심, 불안과 강박이 고스란히 전단지의 형식과 내용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유독 난곡의 전단지가 다른 지역의 전단지보다 더 흥미롭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전단지를 통해 내 생활 반경 안에 거주 중일 것이 분명한 전단지 주인이 대체 어떤 인생을 살고 있(었)을지 추리하고 상상하는 일은 다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독특한 풍미의 감동을 준다. 얼마 전 발견한 전봇대에서 거의 뜯어져 있던 전단지는 중앙 정렬된 두꺼운 고딕체로 마치 월세나 전세를 놓는 듯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왜 ‘듯한’인가 하면 전단지가 너무 훼손되어 대부분의 글자 또한 명확하게 보이지 않아 단지 “월 10만 원에 / 살고 있습니다”라는 문장만이 겨우 독해 가능했기 때문이다. 월세가 10만 원밖에 들지 않는다는 뜻일까? 아니면 한 달에 10만 원만 쓸 수 있다는 뜻일까? 어느 쪽이든 전단지 주인의 절박한 솔직함에 코끝이 찡해온다.
전단지 만큼이나 흥미로운 수수께끼 중 하나는 바로 거리 낙서다. 올해 내가 가장 오래 생각한 거리 낙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진년과 사년에 / 나의 여러 동그랑이들은 / 어디로 갈 것인가 (전서에서)”. 남이 이미 붙여놓은 다른 전단지를 한 꺼풀 벗겨내고 남은 흰 바탕 위에 매직으로 시원하게 쓰여진 이 낙서는 나로 하여금 대체 ‘동그랑이’가 무슨 뜻인지, ‘전서’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여러 차례 질문하게 했다. 혹시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다른 뜻이 있을지도 몰라 세대 차이가 나는 친구들에게 사진을 보내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아무도 ‘동그랑이’와 ‘전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문맥상 ‘동그랑이’를 삶에서 이루고 싶은 소망이나 목표, 의지나 의욕 등으로 이해하거나, ‘전서’를 이러한 내용을 다루는 두꺼운 책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길거리 한복판에서 올해와 내년에 자신이 어떻게 살게 될 것인지를 질문할 수밖에 없었던 낙서 주인의 막막한 심정을 헤아리는 것은, ‘동그랑이’나 ‘전서’의 의미를 몰라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난곡에는 주로 국가 폭력이나 전자기파 기술에 대한 조현병 환자들의 피해 망상적, 박해 망상적 사고의 전개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낙서가 많다. 어떤 낙서는 경찰과 수급 제도의 유착, 국가의 약물 실험, 그에 따른 낙서 주인의 빈곤과 신체적 고통에 대한 내용을 그림을 곁들여 다급하게 설명한다. 이런 낙서는 비록 내가 내용에 공감할 수는 없어도 반드시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산책로로 종종 이용하는 난곡 터널의 낙서의 경우 낙서 주인의 고통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나 자신의 흥미를 위해 꼼꼼하게 읽는다. 주로 터널을 등하교길로 이용하는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 남긴 낙서가 대부분이다. 터널 벽면에 띄엄띄엄 쓰인 이 낙서들은 주로 서로 죽을 때까지 친하게 지내자는 내용, 상대에 대한 인신 공격과 그에 반박하는 내용, 다니는 학교와 자신의 이름을 단순히 알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다 삐뚤 빼뚤한 글씨로 적힌 시, 학교에서 배웠을 법한 시가 여러 다른 필체로 쓰인 낙서와 마주치게 될 때의 뻔하고 징그러운 감동이란! 그 감동에서 살아 남으려고 나는 추리 소설 속 탐정이라도 된 양 낙서 주인의 필체를 골똘하게 분석하는 척이라도 해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연숙의 노상비평’ 연재를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연숙(리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쓴다. 소수(자)적인 것들의 존재 양식에 관심 있다. 기획/출판 콜렉티브 ‘아그라파 소사이어티’의 일원으로서 웹진 ‘세미나’를 발간했다. 프로젝트 ‘OFF’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 강연과 비평을 공동 기획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hotleve 를 운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