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같은 세상,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싸우는 아이들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면, 제 생각에 그건 의심과 믿음인 것 같습니다. 의심하며, 무턱대고 믿고 따르지 않는 것. 이것이 맞는 길인가 하고 끊임없이 회의하는 것.
글ㆍ사진 출판사 제공
2024.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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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찰란 피크닉』은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질 나쁜 세상을 내버려 뒀을 때 그 세상이 어디까지 나빠질 수 있는지 보여 준다는 점에서. 『아찰란 피크닉』은 몬스터 소설이다. 나쁜 조건들을 피하지 못할 경우 괴물이 된다는 점에서. 그 괴물의 이름이 아찰이다. 『아찰란 피크닉』 은 탈출 소설이다. 나쁜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고 괴물로 추락하기 싫은 아이들은 이 세계를 떠나는 일에 목숨을 건다. 그렇다 해도 나쁜 세상에서 탈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아찰란 피크닉』은 모험소설이다. 그러나 이들의 모험은 이곳에서 벗어나 저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이곳에서 이렇게 살지 않기 위한 탈출. 다 같이 벗어날 수 없다면 이곳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새로운 목표를 가진 탈출. 『아찰란 피크닉』은 ‘아직도’ 유토피아를 믿는 소설이다. ‘최후의 유토피아’가 바로 이 소설에 있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그간 적지 않은 소설을 출간하셨지만, 이번 작품은 첫 작품 같은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 소설의 분위기나 스타일에 변화가 많아 보여요. 이번 소설을 한마디로 소개한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등단작인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부터 근작인 『켄』에 이르기까지 줄곧 서사성보다 정보성이 강한 작품을 주로 발표해 왔습니다. 최근작인 『지구인을 위한 축구교실』에서 그런 경향을 벗어나는 시도를 했는데 『아찰란 피크닉』에서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물의 감정을 이야기의 주된 동력으로 삼은 점, 주인공을 성인이 아닌 아이들로 설정한 점, 미래를 배경으로 한 점, 사회 문제를 언급한 점 등 저로서는 처음으로 시도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이 작품은 ‘지옥 같은 세상에서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싸우는 아이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게 이미 흔해졌지만 이 작품이 SF, 판타지, 청소년 소설, 동화나 우화와 같은 장르 중 어디에 속하는지는 독자 여러분의 읽기에 따라 달라지리라 생각됩니다.


『아찰란 피크닉』은 아찰라공화국에서 같은 학교에 다니는 일곱 명의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모두 처한 상황이 다르지만 ‘아찰’로 변할지 모른다는 공포,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목표, 그러기 위해 종평 점수를 잘 받아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어요. 한국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아이들을 통해 그려낸 이유가 궁금합니다. 


종평을 마무리하는 피크닉에서 학생들이 겪는 이야기가 서사의 중심에 위치하다 보니 입시 경쟁이 두드러져 보이지만 『아찰란 피크닉』에는 그 외에도 환경, 거주지를 중심으로 한 계급 차별, 질병, 양육과 가족 해체 등에 관한 문제가 섞여 있습니다. 이를테면 인간이 아찰이 되는 과정은 악성 종양, 먼지는 황사와 대기 오염, 피라미드는 폐쇄적인 고층 주거지의 은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애초에 사회 비판적인 이야기를 쓸 생각은 없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처한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그저 더 커지고 무거워지기만 한다면 어떻게 될지, 그 세계를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뻔뻔하고,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공공연한 모습으로 그려 보고 싶었습니다. 사람이 짐승과 같은 모습의 아찰이 되고 정말로 짐승 같은 대접을 받아도, 뻔히 보이는 피라미드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일생에 한 번밖에 얻지 못하는데도 아찰라 시민들은 이런 불합리한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지금의 한국 사회가 차별과 불평등에 분노하면서도 한편으로 그것을 당연한 현실로 여기는 것처럼요. 말하자면 지금의 ‘견딜 만한 지옥’을 조금 더 밀어붙인 ‘가까스로 견딜 만한 지옥’의 풍경을 떠올려봤던 것인데, 그 세계의 근원적인 모순을 가장 잘 보여주려면 갈등이 가장 첨예한 곳에 서 있는 가장 위태롭고 역동적인 인물을 설정해야 했습니다. 한동안은 아찰리즘(아찰이 되는 병의 이름입니다)의 치료법과 백신을 우연히 알게 된 의사가 그것으로 일확천금을 누릴 방법을 찾다 결국 개심하고 대중에게 공개하기로 마음먹는 줄거리를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건 이 이야기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피라미드에 들어가려는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자 이야기가 혼자서 굴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구상한 이야기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찰라공화국에 대한 설계도 굉장히 꼼꼼하고, 여기 다 드러나지 않은 많은 전사가 있을 것 같아요. 이 소설이 처음 작가님에게 ‘왔던’ 순간에 대해 들려주실 수 있나요?  


작가의 말에도 썼듯 『아찰란 피크닉』은 어느 일요일 오후에 그린 낙서에서 태어났습니다. 춥고 어두운 거리를 배경으로 코트를 입은 괴물이 구부정하게 서 있고 그 앞에 열 살 정도 되는 소녀가 상자를 딛고 올라가 괴물의 목에 목도리를 걸어 주는 그림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유치하고 감상적인 그림이지만 그 그림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소설 속에서는 아란이 아찰이 된 파보를 만나는 장면으로 등장하는데, 어쩌면 그 장면을 쓰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해도 좋을 겁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날 오후 그린 그림 속의 아이에게서 저는 제 아이들을 겹쳐서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림 속의 아이를 위한, 또 막연하지만 제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를 쓰려 했는지도요. (아이들이 아직 어릴 때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 책을 두어 번 만든 적이 있습니다.) 이야기에 선뜻 손대지 못하며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아이들은 점점 커 가고, 이야기와 이야기 속의 인물도 그에 맞춰서 자라났던 것 같습니다.


겉에서 보면 다 같은 입시생처럼 보이지만 불안 앞에서의 태도, 어렵고 힘든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 다릅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만, 청소년일수록 자신의 감정을 헤아리기가 어렵고 그만큼 다양한 감정에 대한 언어도 부족할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이 갖는 의미가 더 큰 것 같아요. 일곱 명의 아이들이 그들이 처한 상황이나 조건 이외에도 주요한 정서를 통해 구분되는 한편, 아이들의 감정들이 한편으로는 연결돼 있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를 쓰기로 하면서 가장 먼저 맞닥뜨린 문제는 그에 맞는 언어와 문장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청소년기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느끼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것이 얼마나 크고 넓고 깊고 강한지, 그것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그것을 어떻게 하면 좋은지 알 수 없는 시기입니다. 청소년기에 우리는 이전에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것들에 휘말린 채로, 끝까지 가 보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을, 바로 그 끝까지 가면서 모조리 겪고 나서야 비로소, 어렴풋이 알아채게 됩니다. 그 끝에서의 경험이 우리를 성장하게 합니다. 일곱 명의 아이들은 저마다 나름의 성격적 특질이 있고 그것이 때로는 장점으로, 때로는 단점으로 나타납니다. 아란의 뛰어난 냉철은 오만과 분노와, 요제의 직관은 비이성과, 네즈의 자유분방함은 수치심과, 카렐의 인내와 침묵은 고립과 결합돼 있습니다. 극한의 환경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이면과 마주치고 당황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점차 커져 가는 문제에 맞서 홀로 싸워 간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혹은 세계에게 집어삼켜져 괴물이 돼 버렸을지도 모를 이들은 결말에 이르러 서로에게 손을 내밀면서 마침내 서로를 구원하는 길을 배우게 됩니다.


소설 쓰면서 가장 재밌었던 것과, 한편으로 어려웠던 게 있다면요? 


제일 어려웠던 부분은 마지막 피크닉 장이었습니다.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어떤 일이 어떤 순서로 일어나는지, 그러면서 아이들이 각자의 문제를 안은 채 어떻게 갈등하고 충돌하면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지, 아찰과 수라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야기의 상징들이 어떻게 작동하고 해결되는지를 알아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큰 수정도 모두 피크닉 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까지 포함해 모든 과정이 재미있었습니다. 풍경과 세계를 만드는 일(아란과 카렐은 비교적 신형인 조립식 주택에, 이투는 낡은 아파트에 삽니다. 요제의 집은 조금 넓은 고전적인 주택이고요. 그리고 아찰라에 정전, 하수구 범람이 잦은 건 후속작이 나오면 그 이유가 밝혀질 겁니다.), 인물의 과거를 만들어 가는 일(카렐의 아버지는 기자였고 디본의 부모님은 반차별주의 운동을 하다 헤임에서 추방됩니다.), 그들의 성격과 감정을 따라가는 일, 세계가 드러내는 섬뜩한 이면(디본이 피크닉 중에 위험에 처하는 장면은 나중에 추가됐습니다.)을 발견하는 일까지도요. 일곱 명의 성격에 대해 생각하며 제 청소년기를 떠올려 본 것도, 새로운 시도를 하며 새로운 작법을 익힌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대피소에서 아이들이 배고픔과 추위 때문에 한데 모여 수다를 떨다 차례로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을 쓸 때입니다. 처음 구상했던 시놉시스에는 없었는데 초고를 쓸 때 그 부분에 이르자 그 장면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한달음에 쓰고 다음 날까지 멍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장면에서 아이들은 정말로 아이들이 되는데, 각자의 고난이 이야깃거리가 되면서 함께 나눌 수 있는 무언가가 됩니다. 이야기를 쓰며 끊임없이 위로를 받았지만 그 장면의 힘이 가장 컸습니다.


소설을 읽은 분들은 표지의 괴물이 마치 소설 속 괴물 같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괴물이 과연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이 회색 코트를 입은 털 많은 괴물로 변하고, 나중엔 붉은 수괴도 출현하는데요, 이들이 다 연결된 존재라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소설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그림을 찾아내 준 민음사 편집부에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껏 낸 책 중에서 『켄』과 더불어 가장 마음에 드는 표지입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우리 모두 마음속에 괴물을 품고 살고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미술을 빌려와 이야기해 보자면 그 괴물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묵시록적 회화에 등장하는 마귀들이 아니라 프랜시스 베이컨의 삼면화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고깃덩이들을 닮은 존재입니다. 요제가 아찰이야말로 우리의 본모습이라고 말할 때 가리키는 것이 그런 괴물입니다. 이야기 속에서 아찰은 고통받으면서도 그것을 반사하지 않는 존재, 세계의 악을 흡수하는 존재입니다. 식물과 균류 따위가 대기 중의 탄소를 땅 속으로 되돌리는 것처럼 이들은 세계의 고통을 내면화하고 그것을 응축해서 정화합니다. 그래서 종평, 피라미드, 피크닉처럼 얼굴 없는 시스템이 아이들을 위험에 빠뜨릴 때 아찰이 그들을 보호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진짜 괴물인 세계에 맞서기 위해 괴물의 탈을 뒤집어쓰기로 한 건지도 모릅니다. 동화 같은 생각이지만요.


사람으로 남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뭘까요? 


순환논법에 가깝지만, 괴물이 되지 않는 것이 사람으로 남는 길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무엇이 괴물인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을 테고요. 그럼에도 사람으로 남기 위해 필요한 덕목 혹은 가치를 들어야 한다면,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면, 제 생각에 그건 의심과 믿음인 것 같습니다. 의심하며, 무턱대고 믿고 따르지 않는 것. 이것이 맞는 길인가 하고 끊임없이 회의하는 것. 이미 앞서 괴물이 된 자들의 방식을 생각 없이 추종하지 않는 것. 그가 괴물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것. 동시에 인간의 선함을 믿는 것. 우리가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미 낡은 가치가 돼 버렸지만, 그럼에도 희망과 미래를 믿는 것. 즉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면서 상대를 믿는 것. 세계를 의심하면서 자신을 믿는 것. 그 역설을 받아들이면서, 불안 속에서 의심과 믿음을 동시에 품는 것이 우리를 인간으로 머물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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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