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와 농담의 제스처
고선경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의 토마토, 돌, 감자튀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글 : 박소미
2025.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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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

고선경 | 열림원



토마토


심장이나 내장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책을 애정한다. 뜨겁고 물컹한 단어, 손에 움켜쥐면 붉은 체온이 전달되는 단어, 한참 페이지를 넘긴 뒤에도 손끝에 비릿한 피 냄새를 남긴 채 쉬이 사라지지 않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이라는 제목을 만났을 때, 이런 질문을 피할 수 없었다.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는 대체 어떤 토마토인 것인가, 어떤 연유에서 그는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을까. 대관절 그 토마토의 인생은….

 

영원히 찾아 헤매겠다 생각했던 것들

 

무수한 별, 아름다움

어둠 속에서 맑은 물이 쏟아지는 소리

사람의 것과 사람의 것이 아닌 아름다움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 (32쪽)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은…어쩐지 무엇보다 영원한 토마토일 것 같았다. 영원한 토마토는 썩지도 죽지도 않고, 그렇다면 영원히 단단한 토마토인 채로 남아있는 일은 퍽 고단하고 외로운 일일 게다. 심장보다 단단한-영원한-고단하고 외로운 토마토 한 알을 찾기 위해 (다시 한번) 영원히 헤매는 일. 절박함을 넘어 모종의 결기를 뿜어내며 토마토를 찾아 달려가는 것만 같았던 시 속의 인물이 잠시 멈춰 숨을 고르며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하면 너처럼 단단한 무릎을 가질 수 있어? (19쪽)

 

여기에 다음의 문장이 붙는다.

 

무릎은 슬픈 부위라고 생각하면서 (63쪽)

 

토마토를 찾아 영원히 헤매겠다고 다짐하는 인물의 무릎은 바로 그 토마토에 뒤지지 않을 만큼은 튼튼해야 할 것이다. 닳고 마모될 미래의 시간이 무릎을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그런 무릎을 떠올리다 보면 어느새 시의 논리에 설득된다. 단단하다는 것은 고단하고 외롭고, 슬픈 일이다. 

 

단단해서 고단한 무릎을 떠올리다 보면 죠지가 생각난다.“망한 드라마 시청률처럼 제자리걸음인” 죠지, 그러니까 “외로운 키치죠지에 사는 영원한 죠지” 말이다.(37-39쪽) 제목을 보고 제멋대로 예상했던 것과 달리 고선경의 두 번째 시집에서 가장 낯선 얼굴을 하고 있는 단어는 “영원”이다. 무한루프로 반복되는 gif 짤을 보며 킬킬거리다가도, 짤이 갇혀 있는 무한한 반복의 수렁에 돌연 아찔해지기도 하는, 그런 축축한 늪 같은 영원.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의 영원은 끝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어 섬뜩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가 있다.

 

오래전 나는 핑크 뮬리가 영원히 흔들리는 정원에 나를 가둔 적이 있어 그곳으로 통하는 문의 열쇠를 연수에게 주었고 연수는 내가 행복하다고 믿었다. (98쪽)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영원의 반대편에 있다고 여겨지곤 하는 죽음은 또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자연스레 묻게 된다. 그런데 이번 시집에는 실로 많은 죽음이 등장한다. 심장보다 영원보다 토마토보다 많이 언급되는 것이 죽음이다. 그중 하나만을 가져와 본다.

 

회상할 미래가 없으니 안 죽어도 되고 (64쪽)

 

죽어서도 유망주가 되고 싶다 (같은 시, 65쪽)

 

두 문장은 죽음을 데리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하려 한다. 다르게 말하면, 동시에 성립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죽음을 당기고 있다. 회상할 미래가 없으니 안 죽어도 되는데 동시에 죽어서도 유망주가 되고 싶다면, 시간은 이상하게 구부러져 버린다. 영원과 죽음이 각자의 힘으로 시 속의 시간들을 구부러뜨린다. 구부러지고 끊어지고 막혀버린 시간 속에서 ‘나’는 연수, 소은, 남영 등으로 쪼개지기 시작한다.

 

이걸 내가 왜 아냐면 소은이와 친구여서는 아니고 소은이를 내가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99쪽)

 

남영이가 같이 놀자고 이리로 들어오라고 남편과 나를 초대한다 하지만 남영아

너는 내 혼잣말이잖아 (104쪽)

 

내가 너희의 혼잣말이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꼭대기에 걸고

생각이 거느리는 풍경을 본다 (108-9쪽)

 

‘나’가 나-들로 쪼개진 풍경을 선언처럼 보여준 뒤, 나와 연수와 소은과 남영이 등장했던 3부는 다음의 문장으로 끝난다. “미래가 태어나려면 필요한 일들이었다.”(120쪽) 그러니까, 영원과 죽음이 각자의 힘으로 시간을 힘껏 박살 낸 뒤, 그 뒤에도 다시 미래가 태어나려면 필요한 일들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미래가 더럽다는 것이 좋았다. 더러운 미래라면 기꺼운 마음으로 한 번 더 미래의 탄생을 기다려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흙투성이가 된 손을 너는 탈탈 털어 주었어 너의 손이 나의 손처럼 더러워져 가는데……그 순간 나는 그 손이 미래와 가깝다고 생각한 거야

 

그렇다면

다시 태어나게 할 거야 (119쪽)

 

그런데 어떻게 다시 태어나게 할 것인가? 미래가 거창하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힌트가 시집 안에 있다. <물 밖의 일>에서 물 밖으로 꺼내진 돌은 어항 밖으로 튀어나온 금붕어처럼 서서히 죽어간다.

 

바닷가에 왔으면 예쁜 돌을 주워 가야지 그가 말하며 내게 예쁜 돌을 골라 주었다 (중략) 물속에서 꺼낸 돌을 이리저리 비춰 보자 돌의 물기가 서서히 말라 갔다 완전히 마른 뒤 돌은 윤을 잃었고 버짐이 핀 것처럼 하얘졌다 (중략) 그는 곧 내 손안에서 돌을 빼앗아 바닥에 던졌다 (117쪽)

 

그런데 돌의 죽음을 목격한 뒤 한 페이지를 넘기면, 다음 시 <그 밖의 일>에서 바로 그 돌이 태평한 얼굴로 다시 등장한다. 다음은 <그 밖의 일>의 전문이다. 

 

그 돌

이대서울병원 앞 자판기 아래에서 본 것 같다 (118쪽)


<물 밖의 일>과 <그 밖의 일> 사이에서 죽음과 탄생을 겪은 돌이 눈을 꿈뻑거리며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다시 미래가 태어나게 하려면 말이야, 페이지를 한 장 넘길 수 있는 마음이면 돼. 물론 한 페이지를 넘기기 힘든 날들도 있다. 산다는 것은 때때로 얼마간 “정체를 들킨 자객”처럼 오도가도 못한 채 “씨발…을 견딜 뿐(74쪽)”인 일이기도 하므로. 그렇게 죠지처럼 한 자리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며 씨발을 견딜 때면, 페이지를 넘기기 힘든 것이 아니라 넘길 페이지가 없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내게 남은 페이지가 없는 것 같았을 때 나는 몸에 타투를 했어”(84쪽) 

 

부재한 페이지를 대신해 몸에 무언가를 적는 일은, 이쪽 세계가 불가능할 때 저쪽 세계를 비집어보려고 칼집을 내는 일이기도 하다. 사방이 막혀 두 눈을 딱 감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뛰어내려 볼 수밖에 없을 때, 막간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가벼운 노크>에서 난다. <가벼운 노크>는 수록된 시 중 가장 심장부에 위치한 시도 가장 할퀴는 시도 아니었지만, 가장 도리 없이 마음을 빼앗긴 시였다. 이번 시집에 숱한 죽음이 도처에 있는데 <가벼운 노크>에서는 태연하게 “몇 년 전 죽은 친구가 우리 집으로 햄버거 배달”을 온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이 만남이 태연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얼마만큼 태연하냐면

 

“그와 나는 서로를 마주 본 채 당혹감을 느껴야 했는데, 그건 내가 햄버거를 주문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90쪽). 

 

라고 말할 만큼이다. 초인종을 누르고 시킨 적 없는 햄버거를 냅다 들이밀기. 죽음이 아니라 햄버거에 시선을 고정시키기.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죽은 돌을 감쪽같이 다시 태어나게 하기. ‘나’는 햄버거 배달을 온 죽은 친구와 악수를 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아마 점심도 저녁도 아닌 애매한 시간, 두 사람은 현관문을 열어둔 채 꽤 오랫동안 신발장 앞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테다. 이 시는 다음 문장으로 끝난다. “부드러운 대화 속에서 우리를 감싸안는 건 짭조름하면서도 고소한 감자튀김 냄새일 따름이었다.”(90쪽)



감자튀김 


읽는 이의 식욕을 자극하는 감자튀김 냄새는 각별하다. 왜냐하면 1,2부에 나오는 음식들은 먹거나 소화시키기 어려워 보였기 때문이다.

 

생크림 케이크를 잘랐는데 
 모래가 쏟아져 나오는 것
(24쪽)


 
뷔페처럼 차려진 감정들

남기거나 집어 던져도 된다 (26쪽)


 
아이스크림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놓인 건 꽝꽝 얼었지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지
(37쪽)


 
사진 속의 버섯은 분홍콩먼지 쓸모없는 버섯입니다 (40쪽)
 

군데군데 노랗게 그을린 흰 떡을 오래오래 씹는데 삼켜지지가 않는다 (76쪽)

 

소화 불가능한 음식은 영원이나 죽음과 긴밀하게 연결되었을 테다. 그러나 죽은 친구가 배달해 온 햄버거와 감자튀김 이후로, 시집의 후반부로 진입하면서, 시 속의 인물들은 각자 다른 시속에서 체리콕이나 초코파이나 카푸치노나 뱅쇼를 먹고 마신다. 음식을 씹고 삼키고 소화시킨다. 딸기를 먹고 “아주 상큼하고 맛있어”(134쪽)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쩐지 이것을 죽은 친구의 배달 덕분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죽은 친구에게 능청스럽게 햄버거 주문을 넣어보는 시집의 자세, 시집이 취하고 있는 농담의 제스처를 자꾸만 곱씹게 된다. 왜냐하면 “농담은 슈퍼에서도 팔지 않”(16쪽)기 때문에, 별 수 없이 “쇼파 위를 뒹구는 쿠션에서 농담을 꺼내 씀다듬”(147쪽)어보는 실없는 짓을 계속 시도해야 하므로, 그런 자세를 지속적으로 취하며 영원히 반복되는 제자리걸음 속에서도 내내 농담을 입안에 굴려보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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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미

뒷모습이 담긴 사진이나 그림을 보면 쉽게 눈을 떼지 못하고 저장해 둡니다. 그 사람들...어떤 얼굴 하고 있을까요? 그래서 읽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