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시에스타가 있었으면 좋겠다
설령 그것이 불가능한 상상이라도, 가끔 난 그런 삶을 그린다.
2008.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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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문화권에 가면 ‘시에스타’라는 게 있다. 잘 알려졌듯이 오후의 일정한 시간에 전부 잠을 자는 것인데, 나는 스페인의 지중해 연안 도시 말라가(Malaga)에서 그것을 경험했다.
그곳에 간 것은 순전히 충동 때문이었다. 스페인 남부 해안에 있는 그라나다(Granada)에서 알함브라 궁전을 구경한 후 다음 날 오전에 그라나다 시내를 돌아보는데, 오전 10시가 다 되어도 시가지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평일인데 상점 문도 거의 닫혀 있고 행인도 드물었다. 밤늦게까지 영업을 하고 아침 늦게 일어나는 건지, 내가 사람 안 다니는 곳만 돌아다닌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너무 적막해 난 흥미를 잃고 말았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버스터미널로 가 마침 떠나려던 말라가행 버스에 무작정 올라탔다. 사실 말라가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아는 거라곤 지중해 연안의 도시라는 정도? 갖고 다니던 가이드북에는 나와 있지도 않은 도시였다. 흐린 날씨는 차차 맑아졌고 청명한 하늘에서 해가 이글거렸다. 물결처럼 굽이치는 녹색 벌판이 끝없이 펼쳐졌고 벌판 자락에는 피레네 산맥이 하늘을 토막 내듯 버티고 서서 버스를 노려보았다. 그라나다에서 말라가까지는 2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한숨 잘까 하고 몸을 뒤척이다 보니 벌써 말라가 시내였다. 차창 밖으로 야자나무가 길게 이어진 풍경이 보였다. 스페인에 와서 처음 보는 남국의 풍경이었다.
버스터미널 근처의 식당에서 빵과 맥주로 요기를 한 후 시내 중심지에 있는 인포메이션 센터로 갔다. 또 문이 닫혀 있었다. 근무시간은 9시에서 2시. 시계를 보니 2시 30분. 나 참, 이렇게 일찍 닫는 인포메이션 센터는 뭐란 말인가, 평일인데.
잠시 멍청하게 서 있다가 거리를 걸었다. 말라가는 한가로웠으며 깨끗했다. 마드리드나 그라나다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 파란 하늘 아래에 열을 지어 있는 녹색의 야자나무를 보니 마음이 푸근해졌다. 그런데 길이 너무도 조용했다. 상점은 모두 문을 닫았고 인적도 드물었다.
그런 길을 걷다가 우연히 동양인을 만났다. 20대 중반의 일본인 학생이었다. 반가워서 말을 걸어보니 그는 스페인어를 공부하기 위해 3개월째 말라가에 머문다고 했다.
“왜 이렇게 거리가 조용하지요? 오늘이 무슨 국경일인가요?”
“하하. 시에스타입니다. 스페인은 1시부터 4시까지 낮잠을 자요.”
“그런데 여름도 아니고 시원한 겨울에 무슨 시에스타지요?”
“이 사람들 전통이니까요. 하하.”
“말라가에 볼 만한 데 없어요?”
“알카사바란 곳에 가보세요. 괜찮은 성벽이 있어요.”
“무슨 성벽이죠?”
“그냥 성벽이에요. 저도 잘 몰라요. 영어가 짧아서…….”
그가 가르쳐준 길을 따라가니 바다를 앞에 둔 성벽이 나왔다. 궁전과 정원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무어 왕국 시절에 세워진 성벽 같았다.
역사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성벽에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닷바람이 싱그러웠다. 소녀가 성벽 아래 길에서 깽깽이걸음으로 뛰어갔고 소년들은 자전거를 타고 야자나무 길을 지나갔다. 날씨가 청명해서인지 파란 항구에 정박한 배들이 바로 앞에 보이는 것처럼 또렷했다.
말라가는 밤에도 투명했다. 어둠 속에서도 모든 사물이 선명하게 보였다. 길은 넓었고 보도를 걷는 사람들은 한가로웠다. 바쁘게 다니던 유럽의 어느 도시에서도 맛보지 못한 한가로움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계획도 없이 찾아온 이 도시가 좋아져서 나는 하루를 더 머물기로 했다. 무얼 보기보다는 이 도시를 어슬렁거리고 싶었다. 오후의 골목길은 어제처럼 여전히 적막 속에 휩싸여 있었다. 그 거리를 걷는 이들은 관광객이었고 그나마 많지도 않았다. 인적이 뚝 끊긴 거리를 거닐다 계단에 앉아 쉬기로 했다.
처음 보는 시에스타의 풍경이었다. 이탈리아에도 시에스타가 있었던가? 잘 모르겠다. 박물관 등은 점심시간 무렵에 긴 휴식 시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시에스타가 있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워낙 관광객이 많고 그들을 상대로 하는 가게들이 많아 여행자로서는 특별히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이곳은 흘러가던 시간이 뚝 끊어진 것처럼 모든 게 정지했다. 공간은 여백으로 남았고 텅 빈 골목길에서 시간은 맴돌았다. 지나온 여행의 추억들과 먼 과거의 일들이 떠오르며 잠시 몽롱한 기운 속으로 침몰하는 순간, 문득 시에스타는 집단적 명상의 순간이며 브레이크 타임(Break Time)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마다 열심히 살다가 다 함께 ‘시작!’ 하면, 모든 것을 잊고 잠들어버리는 동화 같은 세상.
그런데 얼마 전 스페인에서 시에스타를 없앤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하얀 여백 속에서 꼬리를 물고 맴돌던 시간들, 그때의 추억들은 이제 내 안에서만 아련히 존재할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시에스타를 실시한다면 어떨까? 일하다 말고 한낮에 3시간 정도 쉬고 수다 떠는 시간이 있다면……. 설령 그것이 불가능한 상상이라도, 가끔 난 그런 삶을 그린다.
* 저자 이지상의 블로그 - 이지상의 여행카페
그곳에 간 것은 순전히 충동 때문이었다. 스페인 남부 해안에 있는 그라나다(Granada)에서 알함브라 궁전을 구경한 후 다음 날 오전에 그라나다 시내를 돌아보는데, 오전 10시가 다 되어도 시가지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평일인데 상점 문도 거의 닫혀 있고 행인도 드물었다. 밤늦게까지 영업을 하고 아침 늦게 일어나는 건지, 내가 사람 안 다니는 곳만 돌아다닌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너무 적막해 난 흥미를 잃고 말았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버스터미널로 가 마침 떠나려던 말라가행 버스에 무작정 올라탔다. 사실 말라가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아는 거라곤 지중해 연안의 도시라는 정도? 갖고 다니던 가이드북에는 나와 있지도 않은 도시였다. 흐린 날씨는 차차 맑아졌고 청명한 하늘에서 해가 이글거렸다. 물결처럼 굽이치는 녹색 벌판이 끝없이 펼쳐졌고 벌판 자락에는 피레네 산맥이 하늘을 토막 내듯 버티고 서서 버스를 노려보았다. 그라나다에서 말라가까지는 2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한숨 잘까 하고 몸을 뒤척이다 보니 벌써 말라가 시내였다. 차창 밖으로 야자나무가 길게 이어진 풍경이 보였다. 스페인에 와서 처음 보는 남국의 풍경이었다.
버스터미널 근처의 식당에서 빵과 맥주로 요기를 한 후 시내 중심지에 있는 인포메이션 센터로 갔다. 또 문이 닫혀 있었다. 근무시간은 9시에서 2시. 시계를 보니 2시 30분. 나 참, 이렇게 일찍 닫는 인포메이션 센터는 뭐란 말인가, 평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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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멍청하게 서 있다가 거리를 걸었다. 말라가는 한가로웠으며 깨끗했다. 마드리드나 그라나다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 파란 하늘 아래에 열을 지어 있는 녹색의 야자나무를 보니 마음이 푸근해졌다. 그런데 길이 너무도 조용했다. 상점은 모두 문을 닫았고 인적도 드물었다.
그런 길을 걷다가 우연히 동양인을 만났다. 20대 중반의 일본인 학생이었다. 반가워서 말을 걸어보니 그는 스페인어를 공부하기 위해 3개월째 말라가에 머문다고 했다.
“왜 이렇게 거리가 조용하지요? 오늘이 무슨 국경일인가요?”
“하하. 시에스타입니다. 스페인은 1시부터 4시까지 낮잠을 자요.”
“그런데 여름도 아니고 시원한 겨울에 무슨 시에스타지요?”
“이 사람들 전통이니까요. 하하.”
“말라가에 볼 만한 데 없어요?”
“알카사바란 곳에 가보세요. 괜찮은 성벽이 있어요.”
“무슨 성벽이죠?”
“그냥 성벽이에요. 저도 잘 몰라요. 영어가 짧아서…….”
그가 가르쳐준 길을 따라가니 바다를 앞에 둔 성벽이 나왔다. 궁전과 정원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무어 왕국 시절에 세워진 성벽 같았다.
역사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성벽에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닷바람이 싱그러웠다. 소녀가 성벽 아래 길에서 깽깽이걸음으로 뛰어갔고 소년들은 자전거를 타고 야자나무 길을 지나갔다. 날씨가 청명해서인지 파란 항구에 정박한 배들이 바로 앞에 보이는 것처럼 또렷했다.
말라가는 밤에도 투명했다. 어둠 속에서도 모든 사물이 선명하게 보였다. 길은 넓었고 보도를 걷는 사람들은 한가로웠다. 바쁘게 다니던 유럽의 어느 도시에서도 맛보지 못한 한가로움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계획도 없이 찾아온 이 도시가 좋아져서 나는 하루를 더 머물기로 했다. 무얼 보기보다는 이 도시를 어슬렁거리고 싶었다. 오후의 골목길은 어제처럼 여전히 적막 속에 휩싸여 있었다. 그 거리를 걷는 이들은 관광객이었고 그나마 많지도 않았다. 인적이 뚝 끊긴 거리를 거닐다 계단에 앉아 쉬기로 했다.
처음 보는 시에스타의 풍경이었다. 이탈리아에도 시에스타가 있었던가? 잘 모르겠다. 박물관 등은 점심시간 무렵에 긴 휴식 시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시에스타가 있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워낙 관광객이 많고 그들을 상대로 하는 가게들이 많아 여행자로서는 특별히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이곳은 흘러가던 시간이 뚝 끊어진 것처럼 모든 게 정지했다. 공간은 여백으로 남았고 텅 빈 골목길에서 시간은 맴돌았다. 지나온 여행의 추억들과 먼 과거의 일들이 떠오르며 잠시 몽롱한 기운 속으로 침몰하는 순간, 문득 시에스타는 집단적 명상의 순간이며 브레이크 타임(Break Time)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마다 열심히 살다가 다 함께 ‘시작!’ 하면, 모든 것을 잊고 잠들어버리는 동화 같은 세상.
그런데 얼마 전 스페인에서 시에스타를 없앤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하얀 여백 속에서 꼬리를 물고 맴돌던 시간들, 그때의 추억들은 이제 내 안에서만 아련히 존재할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시에스타를 실시한다면 어떨까? 일하다 말고 한낮에 3시간 정도 쉬고 수다 떠는 시간이 있다면……. 설령 그것이 불가능한 상상이라도, 가끔 난 그런 삶을 그린다.
* 저자 이지상의 블로그 - 이지상의 여행카페
※ 운영자가 알립니다.
<낯선 여행길에서>는 ‘중앙books’와 제휴하여, 매주 수요일 총 10편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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