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만한 게 살인사건이다. 소재가 떨어지면 살인사건이다.
내 오해인지는 모르겠다. 즐겨보는 편인 한 TV 시사다큐 프로그램 제작진에 항의를 하고 싶었던 적이 있다. 어느 한 시점동안 미스터리 살인사건만 연이어 줄기차게 방영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제목만 대충 열거해보면 이렇다. “동굴 속 죽음의 미스터리…제주 관덕정 여인 피살 미스터리…청테이프 살인사건…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허구한 날 ‘죽음의 비밀’이었다. 전통과 명성을 두루 갖춘 프로였는데, 예민한 정치ㆍ사회 이슈를 피하기 위한 궁여지책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 했다. 한데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방영시간이 되면 TV 앞에 앉았다. 그 무게가 어떠하든, 살인사건은 뭔가 흥미를 잡아당겼다.
‘살인’은 인간관계를 폭파한다. 영혼의 집을 해체하는 가장 파멸과 극단의 행위다. 여기에 항상 따라붙는 질문은 두 가지다. 도대체 왜? 그리고 어떻게? 피해자의 주검만 발견될 경우엔 하나 더 붙는다. 누가? 모든 살인사건은 궁금하다. 숨은 배경과 방법, 범인의 실체에 호기심이 인다. 전혀 새로운 방식에 의한 살인일수록 눈길을 끈다. TV 시사다큐 프로그램이 살인사건을 쉽게 소재로 삼는 이유다.
나 역시 이제부터 살인사건이다. 아버지의 스크랩에서 80년대 초반을 흔든 몇 가지를 추렸다. 만만하거나, 소재가 떨어져서가 아니다. 가장 압도적인 소재여서다. 제13권(1980~81년)과 제14권(1982년)을 뒤덮은 신문기사 조각들이 대표하는 네 가지 사건들은 세상을 놀래켰다. 법원행정처가 펴낸 『법원사』(1995년 발행)를 뒤적여보니, ‘1980년대 저명사건 판결 11’에 그 네 가지 사건이 다 올라와 있다. 잔혹성과 비극성의 강도가 높거나, 범인과 피해자의 관계가 경악할 만 하거나, 재판결과가 예측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교훈과 영향력의 면에서도 80년대를 대표한다. 이 사건들에서 진범이 잡힌 경우는 절반이었다. 경찰은 모든 사건에서 용의자를 체포하고 범인으로 발표까지 했지만, 절반은 풀어주어야 했다. 나는 절반인 두 가지 사건만 기억에 남아있다.
서울 용산구 원효로1가 10억대 여갑부 윤경화씨(72) 일가족 피살사건 수사본부는 17일 하오6시 사건전모를 공식발표하고, 범인으로 단정해온 윤씨의 조카며느리 고숙종씨(46)를 서울형사지법으로부터 영장을 발부받아 강도살인혐의로 구속했다. 이날 수사본부장 이상점 총경(용산경찰서장)은 “고씨가 그동안 알리바이를 12번이나 번복하고 결정적인 증거확보가 안돼 수사에 애로가 많았다”고 밝히고 “고씨가 범행당시 입었던 원피스에서 혈흔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자백내용과 정황증거등이 공소유지에 충분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한편 범인 고씨는 이날 수사본부에서 “아파트를 사주겠다던 약속을 묵살하는 등 평소 존경하는 어머니로 모신 윤씨에 대한 기대가 한꺼번에 무너져 우발적으로 범행했다”고 기자들에게 범행동기를 밝혔다.
(1981년 8월18일치 <한국일보>)
제1번 사건이다. 요건 기억난다. 1981년 8월4일 발생한 ‘윤경화 노인 일가 피살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여인의 이름은 피해자의 조카며느리였던 ‘고숙종’이다. 나는 중3이었다. 같은 ‘고씨’였기에 더욱 잊혀지지 않는다.(어릴 땐 좀 그렇지 않은가) 그때 신문기사를 읽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읽었더라도 별 문제의식 없이 넘겼으리라. 독자 여러분들은 위 기사를 다시한번 꼼꼼히 읽어보시기 바란다. 참 이상하다.
기사에 따르면, 증거가 없다. 고숙종 여인이 범인이라는 물증이 없다. 수사본부장인 이상점 총경은 이렇게 말한다. “고씨가 그동안 알리바이를 12번이나 번복하고 결정적인 증거확보가 안돼 수사에 애로가 많았다…고씨가 범행 당시 입었던 원피스에서 혈흔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자백내용과 정황 증거 등이 공소유지에 충분할 것으로 확신한다.” 혈흔은 없다. 자백과 정황 뿐이다. <중앙일보> 4컷만화인 ‘왈순아지매’에서 수사 담당자는 뭔가 쭈뼛쭈뼛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숙종 여인은 “자신이 죽였다”고 했다. 기사에 따르면 이렇다. “한편 고씨는 이날 하오6시15분께 수사본부의 사건전모 발표현장에 모습을 나타냈는데, 검은색 반짝이 원피스차림에 흰운동화를 신은 고씨는 체념한 듯 시종 흰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린채 ‘내가 사람을 죽였다. 나를 어서 죽여달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사건의 무대는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 위치한 피해자 윤경화(71)의 집이었다. 피해자가 노인이라 하여 ‘윤 노파’라고도 했고, 돈이 많다 하여 ‘윤 갑부’라고도 불렀다. 집은 연건평 60평의 목조건물. 20개나 되는 방들마다 불교, 통일교, 무속의 분위기를 풍기는 복잡한 장식물이 뒤엉켜 있었고, 가구들로 꽉 차 있었다고 한다. 처음 들어간 사람은 출구를 못 찾을 정도로 복잡했다. 윤경화 노인의 직업은 점술가였다. 웬지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음습하고 괴기스런 공간이 연상된다. 경찰은 원한관계에 의한 면식범의 살인으로 단정하고 용의자를 좁혀나갔다고 한다.
윤경화 노인은 가정부 강경연(19), 양딸 윤수경(6)과 함께 1981년 8월4일 처참한 피살체로 발견됐다. 살해된 지 13일만이었다. 이 기사를 취재한 언론인 조갑제에 따르면, 한여름 밤에 발견된 3구의 시체는 푹푹 썩고 있었다. 흘러내린 피는 주검이 썩은 물과 뒤엉켜 발이 빠지는 늪을 이뤘다. 처음에 들어간 한 형사는 구더기떼가 몰려들어 종아리를 물어뜯더라고 표현했단다.
기사만 보자면, 고숙종 여인은 ‘망치부인’이다. 망치를 수없이 내려쳐 상대 3명을 제압했고, 결국엔 나일론줄과 전기줄로 목을 졸라 숨지게 했다. 경찰이 발표한 ‘망치부인’의 범행전모는 이렇다. 뒤이은 일문일답까지 보자.
지난달 22일 낮 윤씨(윤노파의 조카이자 고씨의 남편인 윤영배)등 5명과 서울충무로 진고개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한뒤 하오4시께 윤씨의 승용차로 정릉집에 도착, 밤색원피스와 티셔츠등 간편한 옷가지를 챙겨 장녀 미경양과 함께 외출했다. 고씨는 “구산동과 흑석동에 들러 보험료를 수금한 뒤 84번 버스로 신세계백화점 앞에서 하차, 하오8시께 장녀와 헤어졌다. 고씨는 윤씨에게 전화를 걸어 “긴요한 일이 있어 찾아가겠다” 고 말한뒤 평소 윤씨가 자신의 옷차림에 대해 사치하다고 나무라는 것을 의식 검소하게 보이기위해 신세계백화점 앞 남대문 지하상가 화장실에서 준비한 밤색원피스로 갈아입은 뒤 택시를 타고 9시30분께 윤씨집에 도착했다. 고씨는 윤씨에게 “2년전 사주기로한 아파트를 사달라”고 말하고 윤씨가 거절하자 “그럼 1천만원만 보태주면 정릉집을 처분해 집을 옮기겠다”고 사정했으나 윤씨는 “내 성질을 알면서 자꾸 조르느냐. 작은뼈를 굵은뼈가 되도록 키워놓으니까 도와주는 놈은 하나없고 뜯어가려는 놈만 있다”고 화를 내며 “단돈 10원도 줄수 없다”고 소리를 질렀다는것. 고씨는 순간적으로 야속하고 서글픈 마음에 “이렇게 살 바에야 윤씨를 죽이고 자살해 남편과 아이들이나 유산을 받아 잘살게 해주겠다”고 결심, 화장실에 가는체하고 부엌의 도마위에 있던 부엌칼을 들고 뒤뜰로 나와 화단에 있던 나일론 빨래줄을 한발길이로 두가닥을 잘랐다. 집안으로 들어오던 고씨는 칼을 부엌에 놓고 부엌옆 가정부방 빨래줄에 걸려있던 나일론흰장갑을 낀뒤 가정부방 앞 쌀통위에 있던 연장통에서 쇠망치를 꺼내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고씨는 TV를 보고있던 윤씨의 뒷머리를 5차례 내리쳐 쓰러뜨렸다. 이때 함께 TV를 보고 있던 양녀 수경양(6)이 놀라 2층으로 도망가고 2층에 있던 가정부 강경연양(19)이 비명소리를 듣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강양은 현장을 보고 놀라 다시 2층으로 달아나자 고씨가 뒤따라가 계단중간에서 뒷머리, 팔등을 8차례나 내리쳐 쓰러뜨렸다. 이어 고씨는 계단아래로 굴러떨어진 강양을 윤씨옆으로 끌어다 나란히 눕히고 나일론 끈으로 두사람의 목을 졸라 이불로 덮은뒤 2층 수경양 방으로 올라가 침대밑에 숨어있던 수경양을 끌어내 망치로 2차례 때린뒤 전기줄로 목을 졸랐다. 범행후 고씨는 피묻은 장갑을 낀채 수경양방과 1층부엌방의 전기스위치를 끈뒤 목욕탕에 장갑을 벗어 던지고 피에 얼룩진 슬리퍼와 스타킹을 빨아 신문지에 싸들고 윤씨방 경대서랍에 있던 핸드백에서 금팔찌, 금브로치ㆍ백금반지 1쌍, 금장시계등을 챙겨 안방에 있던 대문열쇠를 찾아 하오10시20분께 밖으로 나와 문을 잠갔다. 이때 고씨는 응접실의 전등을 끄지 않은 것이 생각나자 다시 들어가 불을 끄고 대문을 잠근뒤 큰길까지 걸어나와 택시를 타고 청파동120의33 앞까지와 길옆에 있던 쓰레기손수레에 슬리퍼, 스타킹과 열쇠를 버렸다. 고씨는 다시 다른 택시를 타고 집근처 아리랑고개 부근서 내려 식품가게에서 쥐포등 반찬거리를 산 뒤 버스편으로 정릉집에 도착했다. 이때가 밤11시께. 고씨는 입고 있던 밤색원피스 자락에 피가 묻은것을 발견, 급히 벗어 빤뒤 윤씨 집에서 훔친 패물과 지갑 등은 비키니옷장 안에 숨겨두었다. 고씨는 지난6일 경찰에 연행된 후 면회온 장녀 미경양에게 귓속말로 “패물을 감추라”고 지시, 미경양은 집에 돌아온 즉시 패물을 베개속에 감추고 손지갑과 안경등은 강남구 삼성동 콩밭에 버렸다는 것이다. “아파트커녕 10원도 줄수없다”에 앙심 “계획없는 단독범행…한땐 자살 생각도” 【일문일답】-윤씨의 어떤 말이 범행을 하게끔 자극했는가 ▲2년전부터 아파트를 사준다고 약속했는데 아파트 얘기를 꺼냈다 묵살당했고 1천만원을 보태달라고 했으나 “단돈 10원도 줄 수 없다”고 말해 존경하는 어머니에 대한 모든 것이 무너져 범행을 결심했다. -공범은 없는가. ▲나 혼자서 죽였다, 죽여달라. -자살할 생각도 있었다는데. ▲현장에서 부엌칼로 목을찔러 죽으려했으나 겁이났다. 그 후에도 여러 번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죄없는 수경이까지 죽였나. ▲당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범행후 가족들에겐 안 알렸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빠와 딸이 눈치챈것 같았다. -범행에 장갑을 끼었는데 윤씨 집에 들어갈 때부터 범행을 계획했나. ▲사전계획은 없었다. 장도리를 드는 순간 미끄러워 옆에 있던 장갑을 끼었다. -지금 심경은. ▲그저 빨리 죽고싶다.(울음터뜨림) (1981년 8월18일치 <한국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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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이 “무죄”로…충격과 환호 고숙종 피고인 선고법정 주변 선고순간 고여인은 엎드려 통곡, 침통한 검찰 증거보완 항소키로 무죄가 선고되는 순간 환호와 탄식이 엇갈렸다. 공판정에서 이따금 연출되는 역전드러머중의 하나이면서도 그 의미와 교훈이 그 어느때보다 깊고 엄숙한 순간이기도 했다. 이사건은 그만큼 관계자들 모두를 착잡하게 만들어왔던 ‘사건중의 사건’이었다. 공판정을 지켜보는 기자나 방청객들은 그 ‘착잡한 분위기’ 속에서 ‘증거제일주의’를 내세워 ‘인권’을 지켜나가고 또 지키려는 ‘시대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검사 “최선 다했다. 할말없다” 【선고순간】35분간에 걸친 재판장의 판결이유 설명이 있은 뒤 마침내 “공소사실을 인정할만한 증거가 없어 무죄를 선고한다”는 주문이 낭독되자 고여인은 앞으로 엎드린채 어깨를 들썩이며 울음을 터뜨렸다. 방청석의 가족들도 이순간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박수를 치며 만세를 불렀다. 방청석 맨뒷자리에서 홀로 앉아 판결내용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남편 윤영배씨(47)도 앞자리에서 달려온 장녀 미경양(19)등 가족들과 얼싸안고 만세를 부르다 정리의 주의를 받고 퇴정당하기도 했다. 선고가 끝난 뒤 김헌무 재판장등 재판부가 퇴정하자 이날따라 검사석에 홀로 나와있던 정상명 검사는 말없이 허공을 응시하다가 고통스런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방청석】이날 공판정에는 고피고인의 남편 윤씨를 비롯 장녀 미경양, 친정아버지 고성창씨(70), 친정동생 고종욱씨 부부, 친정여동생등 가족과 고피고인의 서울대 음대 성악과 동창생들 및 일반방청객등 1백50여명이 나와 판결순간을 지켜봤다. 재판부가 입정한 후 재판장의 “피고인 고숙종” 하는 호명이 있자 고피고인이 교도관 2명에 이끌려 출정했는데 고피고인은 이전 공판때와 마찬가지로 허리가 구부정한 모습이었으나 얼굴색은 건강한 편이었다. 고피고인은 재판장의 판결 이유가 낭독되는 동안 피고인석앞 책상에 두손을 짚고 고개를 숙인채 서있다가 5분쯤뒤 재판장이 “고피고인의 팔꿈치와 다리등에 멍든자국이 있었고 잠을 자지 못했으며 부당한 신체의 장기구금이 경찰수사단계에서 행해졌다고 인정된다”는 부분이 낭독되는 순간 울음을 터뜨리며 얼굴을 감싸안았다.(하략) (1982년 2월2일치 <한국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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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숙종 여인은 ‘망치부인’이 아니었다. 당시의 수사 관행이던 고문과 구타가 ‘망치부인’을 만들어냈다. 물증이 없어도 자백만 하면 증거로 인정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 여인은 변호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잠도 못 자고, 하영웅, 이부영, 천정기(당시 수사형사) 등으로부터, 그레이스호텔 등 수곳에서 옷을 벗기고, 양손에 수갑을 채운 채, 목욕조에 넣어 코와 얼굴에 물을 마구 붓고, 전신을 때리고 차면서, 너는 상부로부터 정책적으로 다루라는 지시다, 순순히 자백하지 않으면 죽어서 나간다는 등 폭언과 협박으로 자백을 강요당한 끝에 살려만 준다면 아무것이나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인생포기의 순간에서 자백을 한 것입니다.” 고 여인은 하영웅 형사가 자신을 검찰로 송치할 때 같은 차에 타고 가면서 “검찰에서 자백을 번복하면 다시 데려다가 전기고문을 하겠다”고 협박하여 공포에 떨기도 했다.
고 여인은 ‘척추장애인’이 되었다. 검찰조사 때나 공판 때 허리를 펴지 못한 채 구부리고 다녔다. 담당 형사들은 “고씨가 쇼를 한 것이다. 원래 디스크를 앓았다”고 했지만 꾀병으로 보기 힘들었다. 앞의 기사에도 나오지만, 수사당국이 간접 물증으로 유력하게 제시했던 ‘훔친 패물’도 사실과 달랐다. 그 패물은 사건현장을 수색했던 형사 중 한명이 보관하다가 고숙종 여인에게 맡긴 것이었다. 그 형사는 나중에 수사간부들에게도 사실대로 말했지만, 자술서는 조작됐다. 심지어, 1심 재판 전에는 수사당국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이런 일까지 있었다.
윤갑부 예금증서 담당형사가 훔쳤다. 朴서울시경국장 발표 용산서 하영웅형사 자백 제일은행퇴계로지점에서 발견된 윤경화씨(72ㆍ서울용산구원효로1가128의14)의 정기예금증서는 윤씨 피살사건을 수사했던 서울용산경찰서 수사과 형사계 하영웅 순경 (40ㆍ서울용산구원료로1가26의36)이 훔쳐낸 것임이 밝혀졌다. 용산서장ㆍ수사과장 직위해제 윤씨명의의 정기예금 인출기도사건을 수사중인 서울시경은 17일 이 사건에 관련, 지명수배를 받자 자진출두한 조인재씨(50)로부터 “문제의 예금증서는 하형사의 친구이자 정보원인 서광석씨(40)의 조카 서원일씨(26ㆍ사채업자)를 통해 전해 받았다”는 진술을 받아 하형사를 연행, 혐의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이날 하오 박재식 서울시경국장이 공식 발표했다. 경찰에서 하형사는 “윤노파 피살사건이 알려진 4일후인 8월8일 현장수사반으로 투입된후 윤노파명의의 예금통장을 보관해왔는데 8월말께 예금통장리스트를 작성하면서 5백50만원 상당의 예금증서 3장을 빼냈다”고 자백했다는 것이다.(중략) 이로써 예금인출기도사건은 당초 예상과는 달리 윤경화 피살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일단락됐다. 한편 서울시경은 17일하오 하영웅 형사의 윤노파 예금증서 절취사건과 관련, 관할 서울용산경찰서장 이상점 총경과 김종민 수사과장, 양운석 형사계장, 윤영호 형사6반장을 이날자로 직위해제하고 하영웅 형사는 절도혐의로 구속했다.(중략) “온 국민에게 사과” 유 치안본부장 유흥수치안본부장은 17일 용산경찰서 경찰관 독직사건과 관련해 “이번 사건에 대해 할말이 없다. 치안총책임자로서 국민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드린다”며 유감의 뜻을 표했다. 이 용산서장 사표 용산경찰서장 이상점총경은 부하직원인 하형사가 예금증서를 훔친것이 드러나자 “면목이 없다. 상상도 못할 청천벽력같은 결과”라며 눈시울을 붉혔다.(중략) 한편 이상점서장과 김종민 수사과장, 양운석 형사계장은 이사건에대한 책임을 지고 이날하오 사표를 제출했다. “괴로움 못이겨 땅밑 숨고 싶다” 하형사 심정밝혀 한편 17일 하오1시 서울영등포구당산동396의2 누나집에 은신중 시경형사대에 검거된 하형사는 하오6시10분 서울시경 강력계장실로 연행됐다. 밤색 세무잠바와 청바지차림의 하형사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한 듯 창백한 모습으로 “지금 심정은 땅밑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심정을 털어놓았다.(중략) 하형사는 때때로 괴로운듯 눈을 감고 입을 다물기도 했는데 형사의 처우에 대해서 “생활할수있게 해주어야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1981년 10월18일치 <한국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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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최악의 난’이었다. 아버지의 스크랩엔 정복을 입은 경찰관들이 엎드려 절하는 사진기사가 나온다.
1981년 10월21일 경찰의 날 기념식에서, 대구 동부경찰서 정ㆍ사복 경찰 4백50여명이 ‘하 형사 사건’에 관해 대국민 사과를 하는 퍼포먼스였다. 윤경화 노인 살해사건은 몇 달 뒤엔 1심 재판 결과와 함께 ‘고숙종 무죄사건’이라는 이름도 얻는다. 고 여인은 항소심과 대법원에서도 승소한 뒤 1985년 5월 고문피해액 2천5백만원을 보상하라는 민사소송에서도 이긴다. 경찰과 검찰의 치욕이었다. 그 치욕은 연속으로 이어진다.
또다른 미 연수 동기생 정군 박상은양 살해혐의 구속 검ㆍ경 수사결과 밝혀 “자가용드라이브…여관동행 요구 뺨맞고 차내 교살, 시트커버 혈흔” 상경 여대생 박상은양(21ㆍ부산산업대학2년) 살해범은 박양의 해외연수동기생인 I대학행정학과3학년 정재파군(21ㆍ서울강남구역삼1동)으로 밝혀졌다. 박양 피살사건을 경찰로부터 송치받은 서울지검 동부지청 강원일 부장, 조병길 검사는 25일 정군을 진범으로 검거, 살인, 사체유기, 절도 등 혐의로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박양 3각관계에 심한 질투 순간적 범행 자백” 혐의 받은 장경수군 두달만에 무혐의 풀려나 검찰은 정군이 범행에 사용한 서울2마4649호 포니승용차 시트커버에서 검출된 혈흔(박양 것과 같은 O형)과 정군의 자백을 증거로 제시, 서울지법 동부지원 서재헌 판사로부터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성동구치소에 수감했다. 한편 경찰에 의해 범인으로 지목, 지난해 11월28일 검찰에 불구속 송치됐던 장경수군(22ㆍK대3학년)은 이날자로 무혐의 불기소 처분됐다. 이로써 인권시비, 과학수사등 숱한 화제를 뿌렸던 박양 사건은 발생 1백30일, 검찰송치 58일 만에 일단락됐으며 사건재수사과정에서 검찰은 관련자 1백20여명을 정밀수사중 정군에 대한 용의점을 발견, 추궁 끝에 자백을 받았다. 검찰에 의하면 정군은 지난해 9월18일 밤 9시30분께 아버지 심부름으로 ‘최신가정백과사전’을 빌기 위해 잠실 장미아파트 24동 삼촌집에 갔던 길에 숙모에게 부탁, 박양에게 전화를 걸게 했다. 정군은 전화를 바꿔 “할말이 있으니 만나자”고 제의, 아파트17동 앞으로 불러내 자신이 운전하는 포니승용차 운전석 옆자리에 태운 뒤 잠실대교 강변도로 제3한강교 남산순환도로 남산도서관 강남구신사동 영동 AID아파트 등을 거쳐 1시간가량 드라이브한 뒤 자기집에서 1.4km 떨어진 삼성동 삼정장 여관앞에 이르러 차를 세우고 포옹하려 했다. 박양이 거절하면서 “미친놈” 이라는 등의 욕설을 하면서 뺨을 때렸고 여관으로 들어가자고 요구했을 때 거듭 뺨을 때리자 순간적으로 격분, 주먹으로 3차례 얼굴을 때린 다음 양손으로 목을 졸라 숨지게 했다. 정군은 박양이 숨지자 여관앞 빈터의 인조석 더미속에 사체를 묻고 승용차로 돌아와 차안에 있던 박양 소지품에서 강도를 위장하기 위해 현금 10여만원과 손에 끼고있던 금반지1개를 빼내고 샌들은 풀밭과 하수구로 던진 후 집으로 돌아갔다. 정군은 다음날 새벽5시께 승용차를 몰고 현장을 다시 둘러본 뒤 21일 등교길에 대방전철역 부근 쓰레기더미에 금반지를 버렸다. 정군은 지난해7월 박양과 함께 미국연수를 다녀왔는데 당초 박양과 친했으나 그뒤 박양이 동료연수생 장경수군과 가깝게 지내는데 질투와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것. 그뒤 지난해 9월17일 박양이 건국대학 대학미전에 입상, 수상식에 참석키 위해 상경한뒤 “헤어지게돼 미안하다. 차나 한잔하자” 고 정군에게 전화를 한일이 있어 이날 박양을 만나 담판을 지으려 했었다는 것. 한편 검찰은 이날 정군을 기자들과 만나게 하지는 않았는데 다른 증거는 없느냐는 기자질문에 “재판과정에서 제시하겠다” 고만 말했다. 검찰은 또 “박양의 뺨에 난 치흔은 직접사인이 아니기 때문에 정군의 것이 아니더라도 별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정군은 범행5일후인 지난해 9월23일 회사차 운전사인 문지영씨(31)와 함께 서울마포구도화동의 신진카바사에서 범행에 사용했던 승용차의 시트커버를 겨울용으로 갈아끼웠으며 헌시트커버는 뒤트렁크에 넣어두었다 지난9일 강남경찰서에 압수했었다. “박양은 張군관계 돌이킬수 없다 말했다” 정군 검찰신문서 정군은 검찰심문과정에서 “상은양과 가족들에게 사죄하고 싶다. 특히 해외연수생동기생인 장경수군에 대해서는 자신 때문에 피해를 입었으니 죄책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또 박양이 미국연수중 처음 2주동안 자기와 가까왔다가 그뒤 장군과 더 친해져 그것 때문에 고민도 많았다고 밝히고 그러나 사건당일 함께 드라이브할 때 박양은 장군과의 관계를 돌이킬수 없으므로 자기와의 사이는 추억으로 돌리자고 말했다는 것. 정군은 또 범행은 전혀 우발적이었고 순간적 이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1982년 1월26일치 <한국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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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생 박상은 양 살해사건이다. 내 기억엔 없다. 기사의 크기로 볼 땐 사회면 톱이었던 듯 싶다. 피해자가 미모의 여대생이었고, 삼각관계에 있던 남자친구들이 모두 용의선상에 올랐다는 점에서 세간의 호기심을 사기엔 충분한 조건을 갖췄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 여관 근처 건축자재 야적장의 인조석 더미 속에서 발견된 주검. 발견 당시 시체에는 타박상과 치흔이 남아있었고, 목을 졸린 흔적이 뚜렷했다.
경찰은 처음엔 치흔의 당사자로 밝혀진 연수동기생 장경수 군에게 혐의를 두고 수사하다가 방향을 틀어 또 다른 연수동기생인 정재파 군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위 기사에서 나오는 증거는 차 안에서 발견된 혈흔과 자백 뿐이다. 『법원사』의 판결 내용을 찾아보니, 혈흔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거짓말탐지기 등을 동원하여 범행일체에 대한 자백을 받아냈다는 대목만 나온다. 위 기사를 보면, 정재파 군은 사건발표 현장에 나오지 않았다. 왜 나오지 않았을까? 경찰이 유죄를 입증할 자신감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닐까? 기자들이 “다른 증거가 없느냐”고 묻자 “재판과정에서 제시하겠다”고만 말했다. 허술하기 짝이 없다. 역시~.
정재파군 3백9일만에 보석 박상은양 사건 다시 원점에 검찰 한때 진통…항고 포기 1ㆍ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데 이어 법원의 보석허가를 받았던 박상은양 피살사건의 정재파 피고인 (22ㆍ인하대 행정학과3년)이 29일 하오 검찰이 법원의 보석결정에 대해 항고를 포기함으로써 구속 (82년1월24일) 된지 3백9일만에 석방, 부모의 품으로 되돌아갔다. 이로써 박양 피살사건은 발생 (81년9월18일) 1년2개월여만에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 사실상 영구미제사건이 될 공산이 커졌다. 앞으로 법률심인 대법원의 상고심이 남아있지만 현단계로는 이 사건이 채증법칙의 위배등을 이유로 역전되기는 어려울것으로 보인다. 서울고검 김병찬검사는 지난26일 박양피살사건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형사3부 (재판장 이한구부장판사)가 정피고인에대해 보석허가 결정을 내린후 법정항고기간 (3일) 마감일인 29일 하오3시 “본안사건에 대해서만 이미 상고한대로 대법원에서 철저히 다투기로 하고 신병문제에 대해서는 문제를 검토한 결과 다투지 않기로 했다”고 검찰의 항고 포기이유를 밝혔다. 이어 검찰의 항고포기의사가 정피고인의 변호인단에 통보됐고 변호인단이 보석금 3백만원을 납부한 직후 검찰의 석방지휘서가 발부됐으며 이에따라 정피고인은 이날하오 5시45분 그동안 수감돼있던 영등포교도소에서 풀려났다. 정피고인의 주거는 법원의 보석결정문에 따라 서울강남구역삼동738의2 자택으로 제한된다. 한편 정피고인에 대한 법원의 보석결정을 놓고 검찰은 대법원에의 항고여부를 결정하기위해 법정기간인 3일내내 관계자간의 구수회의를 계속 열며 진통의 시간을 보냈다. 검찰이 직접 수사한 사건에 대해 1ㆍ2심에서 잇달아 무죄판결이 내려짐으로써 큰 충격을 받았던 검찰로서는 “진범이라고 확신하고 기소한 살인사건의 피고인을 풀어주는데 동의하면 사건자체를 잘못 기소했다는 것을 자인하는것과 같은 결과” 라는 주장과 “1ㆍ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피고인을 항고하면서까지 계속 붙잡아 두려는것은 감정적 보복이라는 비난을 받을 여지가 있다”는 우려 사이에서 상당한 고심을 해온 것이다. 그동안 법조계에서는 항고포기를 한다면 윤노파피살사건의 고숙종피고인때처럼 법원에서 보석을 통보받은 날인 지난26일 즉각 했을텐데 주말을 넘기게되자 검찰이 끝내 항고할것으로 예상하기도 했다. 결국 검찰은 본안사건과 보석은 별개의 문제라는 태도를 정해 정피고인을 풀어주는데 동의함으로써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려한 것으로 보인다. 박양사건은 당초 경찰이 박양의 해외연수동기생인 장모군을 용의자로 검거, 치흔을 증거로 검찰에 구속지휘품신을 냈다가 검찰이 영장신청을 보류함으로써 한때 물의를 빚었는데 그후 검찰이 직접 수사에 나서 정피고인을 2차로 진범으로 단정, 구속기소했었다. 그러나 계속된 법원의 무죄선고및 보석결정으로 정군이 풀려남으로써 박양 피살사건은 미궁에 빠지게 된것인데 시민의 입장에서는 진범이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을 다시 갖지 않을수가 없게됐다. “할머니 제가 왔습니다”웃음 아닐 영등포교도소에서 풀려난 정군은 약간 수척했으나 건강한 모습이었는데 어머니 이을순씨(44)가 타고온 서울4라9593호 마크IV 승용차를 타고 집으로 직행했다. 가족들이 준비해간 밤색점퍼와 바지로 갈아입은 정군은 교도소앞에서 사진기자들의 플래시를 받자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어머니 이씨는 석방소식을 듣고 새로 도배한 2층 정군방에 책상과 옷장등 가구를 새로 들여놓았다. 아버지 정진헌씨(51)는 지난25일부터 회사일로 말레이지아에 출장중인데 27일 상오 집으로 전화를 걸어 석방여부를 물었다는것. 회사에서는 재파군이 석방되자 곧 정씨에게 텔렉스를 쳐주었다. 재파군이 이날 하오6시15분께 집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친척 10여명과 해외연수동기생들이 반갑게 맞았고 집에 들어선 재파군은 외할머니를 껴안고 “제가 왔습니다”며 웃었다. 어머니 이씨는 정군을 위해 강남성모병원 신경정신과에 입원실을 예약해 놓았는데 건강진단과 충분한 휴식을 취한뒤 내년 새학기부터 학교에 복학시킬 예정이라고 말했다. (1982년 11월30일치 <한국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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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는 있다. 정재파 군과 고숙종 여인 모두 나름 ‘빽’이 있었다. 위 기사를 보시라. 영등포교도소에서 풀려나는 정 군을 마중하기 위해 어머니 이을순씨는 현대 코티나 마크IV 승용차를 타고 갔다. 정재파 군도 포니 승용차를 몰며 박상은 양과 드라이브를 했다고 한다. 또한 1980년대 초반에 미국에서 연수를 했다. 대학생들의 해외연수가 대중화된 것은 1990년대 중반이다. 대기업 간부였던 아버지는 말레이지아 출장중이라 어머니와 함께 교도소로 마중을 못 나갔다. 정재파 군은 ‘있는 집 자식’이었다는 말이다. 가까운 친척은 유력 언론사의 간부였다.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었다. 변호사들은 접견만 40여 차례, 현장조사만 6차례 했다고 한다. 고숙종 여인 역시 의사 아버지의 큰 딸로 출생해 이화여중고 서울대 음대 성악과를 졸업하는 등 풍족한 집안에서 성장했다. 남편은 검찰청 계장이었다.1)
이런 사람들조차 검찰과 경찰의 먹잇감이 될 뻔 했다. 유사한 사례로는 1983년 1월14일 발생한 ‘경주 당구장 여주인 살인사건’이다. 경찰서 형사과장 출신(박호영)도 무자비한 고문의 피해자가 되어 허위자백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1심에서 무기징역까지 선고받았던 그는 3년 뒤 진범이 잡히면서 풀려났다. 그렇다면 사회적 지위가 보잘 것 없고 최소한의 배경조차 없는 사람들이 강력사건에 연루됐을 경우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고문과 조작이 식은 죽 먹기가 아니었을까?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실컷 두들겨 맞고 범인으로 둔갑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들조차 있다.
이에 대한 실증적 사례를 확인하고 싶다면 80년대 중반 언론인 조갑제씨가 쓴 책들을 권한다.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1986년, 한길사)와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1987년, 한길사)이다. 두 책에서 그는 일제 헌병과 고등경찰로부터 시작되는 고문과 조작의 역사적 뿌리를 밝히고, 그 비인간적 행위에 의해 인간이 어떻게 파멸해 가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중 1967년 김근하군 살해사건의 소설 같은 조작 놀음을 다룬 ‘김기철씨는 왜 요절했나’는 첫 손가락에 꼽을 만한 절창이다. 저명인사나 양심수가 아닌 힘없고 돈없는 이들이 겪어야 했던 형사사건의 실체를 이토록 깊이 파헤치고 집요하게 추적한 저널리스트는 조갑제씨가 유일하지 않았나 싶다.
이 책들은 아버지의 서재에 80년대부터 꽂혀있었다. 아버지 역시 이 책들을 인상적으로 읽었음에 틀림없다.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 책 가운데엔 1987년 1월 <동아일보>에서 ‘고문 사라져야 한다’는 제목으로 연재한 고문추방 캠페인 시리즈 기사가 다섯 장이나 스테이플로로 찍힌 채 접혀 있었다.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자. 조작사건은 아니다. 위의 경우들처럼 영구 미제사건도 아니다. 원한과 치정에서 비롯된 것 같지도 않다. 문제는 돈! 돈! 돈!
윤상군 체육교사가 죽였다 암장시체 북한강변서 발굴 노름빚 갚으려 농락한 두 여고생꾀어 공모, 범행위해 아파트전세…유괴 이틀뒤 숨지게 경서중 주영형 1년18일만에 자백…누나 연수양 유괴미수도 이윤상군(유괴당시 경서중1년ㆍ14세) 유괴살해범은 윤상군이 다니던 학교 체육담당 주영형교사 (28ㆍ서울영등포구신길동448의23)였다. 윤상군 유괴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 마포경찰서는 30일 주범 주교사와 주교사의 제자였던 공범 이모양 (17ㆍ서울Y여고2학년)과 고모양 (17ㆍ서울D여고3학년)등 3명을 범인으로 검거, 미성년자약취유인, 살인, 시체유기등 혐의로 구속했다. 범인 주교사는 포커노름과 부동산 투자등으로 진 빚 1천여만원을 갚기위해 제자이며 불륜의 관계를 맺었던 여고생들을 범행에 가담시켰다면서 범행전모를 자백했다. 경찰은 주교사 등의 자백에 따라 이날 윤상군을 살해 암매장했다는 경기가평군외서면 대성1리 북한강변에서 윤상군의 시체를 찾았다. 이로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윤상군 유괴사건은 사건발생 1년18일만에 해결됐다. 한편 경찰은 이들이 윤상군 유괴에 앞서 누나 연수양 (15ㆍ당시서울여중3년)도 유괴하려다 실패했던 사실도 밝혀냈다. 【검거】경찰이 주교사를 연행한 것은 27일 하오3시30분께. 수사진은 그동안 피해자 주변에 대한 철저한 반복수사 끝에 ▲주교사가 추행했던 한 여학생으로부터 공범은 이양밖에 없다는 진술을 들은 점과 ▲주교사가 교내에서 평소 학생들을 수시로 불러 면담했으면서 윤상군에게는 사건 얼마전 3차례나 뚜렷한 목적없이 교외(校外)면담을 제의했다가 윤상군이 응하지 않았고 ▲그때마다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도록 당부했던 사실 ▲사건당일 윤상군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주교사가 적을 둔 경희대학원에 등교할 시간에 촉박했었다는 점등에 비춰 당일 대학원 수강사실을 철저히 조사 끝에 주교사가 하오6시넘어 잠깐 강의실에 얼굴을 비쳤을뿐 결강했던 사실을 밝혀내고 주교사를 의심케 된것이다. 【유괴】주범 주교사는 평소 포커도박을 즐겨했다가 진 빚등 1천여만원을 갚기 위해 범행을 결심했다. 주교사는 대상을 물색하던중 80년 10월초 자기가 근무하는 경서중 교무실에서 부유층 자녀로 알고있던 경서중 1년3반 이윤상군 가정환경조사서에 의해 윤상군 집주소와 가족상황 및 윤상군의 누나 이연수양이 다니는 학교와 학년 반을 확인했다. 80년 10월12일 하오7시께 주교사는 서울 영등포구신길동 우진아파트 6동308호에서 연수양을 우진아파트로 꾀어내기로 공범 이양과 서로 짠뒤 그해 10월13일 하오4시께 이양으로 하여금 연수양이 다니는 서울여중에 찾아가 연수양을 우진아파트까지 유인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주교사는 다시 윤상군을 유괴하기로 결심하고 80년11월13일 하오3시20분께 학교교무실에 학급일지를 들고 들어온 윤상군에게 그날 하오4시반에 마포구용강동 마포고교 앞길에서 교외상담을 하자고 꾀어낸 다음 우진아파트로 유인했다. 주교사는 이날 하오8시께 우진아파트 공중전화를 이용, 윤상군집에 전화를 걸어 윤상군 어머니 김해경씨(41)에게 “당신 아들을 수원에 감금했다. 우리는 전과자인데 모두 4명이다. 일본으로 밀항코자하는데 돈이 필요하다. 현금 4천만원을 준비하라. 경찰에 신고하면 당신아들을 죽이겠다” 는 등으로 두차례에 걸쳐 협박, 금품을 요구했다. 또 이날밤11시께 윤상군 집으로 전화를 걸어 윤상군의 아버지 이정식씨(43)에게 “나는 너 때문에 망한 사람중 하나이다. 윤상이는 수원에 감금했다. 현금4천만원을 준비하라” 고 협박하자 아버지 이씨는 “불경기에 4천만원은 준비할수 없고 2천만원은 준비할수 있다”고 대답하자 “내일 12시에 전화하겠으니 그때 시키는데로 하라”고 협박했다. 【살해유기】주교사는 다음날인 14일 하오6시께 윤상군이 감금돼있는 우진아파트에 들러 묶여있는 윤상군의 두손발을 명주노끈으로 다시 묶고 입을 반창고로 막아 소리치지 못하게 한뒤 모포로 얼굴을 덮어씌워놓고 방문을 밖에서 잠가 사망케했다. 주교사는 다음날인 15일 상오7시께 학교출근길에 다시 우진아파트에 들러 윤상군이 사망했음을 확인, 그대로 출근했다가 하오3시께 다시 아파트로 돌아왔다. 주교사는 이날 하오4시47분께 공범 이양으로하여금 아파트앞 공중전화를 이용, 윤상군 집으로 전화를 걸어 “윤상이는 잘있다. 편지를 보내겠는데 편지대로 하라” 고 협박케했다. 주교사는 윤상군의 시체를 처분하지 못한채 보름동안 아파트에 놔뒀다가 11월30일 하오7시께 이양과 함께 윤상군의 사체를 큰가방에 넣어 PVC물통에 다시 넣은뒤 번호를 알수없는 용달차를 불러 경기가평군외서면대성1리 한얼산기도원입구 국도에서 내려 강변에 암매장했다. 【협박편지ㆍ전화】주교사는 11월16일 낮12시께 우진아파트에서 윤상군 아버지에게 발신인의 이름없이 보낸 편지를 공범 이양으로 하여금 자기가 부르는데로 쓰게했는데 그편지에서 “윤상이는 잘있다.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다면 죽이지 않겠다. 80년11월20일 하오7시까지 종로2가 고려당빵집으로 이연수에게로 가방을 보내라”는 등의 협박내용을 쓰고 공범이양으로하여금 수원역전 우체통에 넣어 윤상군아버지 이정식씨에게 우송케하는등 81년4월6일까지 윤상군집으로 6차례에 걸친 협박편지와 62차례에 걸친 협박전화로 금품을 요구했다. (1981년 12월1일치 <한국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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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사 다음에 이어지는 기사의 제목은 ‘선생님이 그럴수가’다. 나 역시 같은 중학생으로서 경악했다. 너무나도 유명했던 ‘이윤상 군 유괴살인 사건’이다. 내가 다니는 중학교 선생님들을 하나하나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며 ‘제자를 유괴할 가능성이 있는 교사’를 찍어보기도 했으니 말이다.
1980년 11월13일, 서울 경서중 1학년생 이윤상 군이 행방불명됐다. 그 뒤 윤상 군 집으로 금품을 요구하는 협박편지가 6차례, 협박전화가 62차례 왔다. 100일이 지나도 윤상 군은 돌아오지 않았다. 범인도 오리무중이었다. 1981년 2월27일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은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3월3일 대통령 취임식 때까지 범인이 이 군을 돌려보내면 이번만은 그 죄과에 대해 관대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다.” (정말 범인이 이군을 돌려보냈다면 관대하게 해줬을까?) 그해 여름을 지나 가을단풍이 떨어져도 윤상군은 오지 않았다. 겨울이 올 무렵 같은 학교 체육교사 주영형이 내연 관계에 있던 여제자들과 함께 범행을 했음이 밝혀졌다. 도박 빚을 갚기 위해 그 짓을 했단다. 윤상군은 가평의 북한강변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윤상 군이 다닌 학교는 경서중학교다. 1910년 어의동 공업전수학교로 출발한 이 학교에선 유난히 끔찍한 사건이 많았다. 아버지의 스크랩 제7권에도 등장한다. 1970년 10월14일 충남 온양의 모산역 건널목을 건너던 경서중 수학여행 버스가 기차와 부딪쳤다. 버스에 탔던 경서중 3학년생 45명이 죽었다. 10년을 사이에 두고, 치가 떨리는 일로 학교 이름을 두 번씩이나 알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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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가 안 좋다”는 등의 뒤숭숭한 소문이 떠돌던 이 중학교는 결국 1992년 2월 제41회 졸업식까지 연 뒤 서울 강서구 가양동 신축교사로 이전했다. 옛 경서중학교가 있던 마포구 공덕동 자리엔 현재 서울서부지방법원과 서부지방검찰청이 들어서 있다. 내가 매일 점심을 먹으러 다니는 회사 부근 식당가와 맞닿아있다.
살인범 주영형은 1982년 2월16일 열린 1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제자 이경숙에겐 징역 10년, 고미경에겐 징역 2년과 3년간의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주영형의 변호인은 “윤상군이 원심과는 달리 질식사가 아닌 감금상태를 견디다 못해 탈진 사망한 것”등등의 이유를 들어 사형은 너무 무겁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2심재판부에 이어 대법원은 사형판결을 확정했다. 주영형은 1983년 7월9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랑으로 속죄한 ‘금당의 사탄’ 안구ㆍ콩팥 기증하고 형 집행된 박철웅 22일 낮12시 사형집행직후 안구와 신장이 사회에 기증돼 뭇생명을 살린 사형수는 세인들의 기억에도 생생한 금당(金堂)사건의 주범 박철웅(朴鐵雄ㆍ41)이었다. 지금도 몸서리처지는 잔인한 범죄를 저질러 비인간의 표본처럼 보였던 그가 어떻게 이번에는 인류애의 화신처럼 생을 정리했을까. 박은 지난 79년 6월20일 동생 천웅(34ㆍ무기수) 내연의 처 김효식(29ㆍ복역수)과 공모, 서울 종로구 인사동 골동품상 금당주인 정해석씨 부부와 운전사 이동환씨 등 3명을 “1억원짜리 이조백자를 팔겠다”며 서울 마포구 성산동 집으로 유인, 살해암장한 뒤 정씨가 가지고 있던 5백만원을 빼앗았다가 그해 9월28일 검거됐었다. 당시 사건발생후 정씨의 어린4남매의 애처로운 모습이 연일 보도되면서 국민들은 “살아만 있기를” 바랐으나 박이 내연의 처 김의 친정아버지의 제보로 검거되고 무참히 살해암장된 정씨등의 시체가 박의 정원에서 발굴되자 온 국민이 악몽이기를 바라면서 치를 떨던 때가 바로 엊그제다. 그후 박은 1ㆍ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지난 80년 10월14일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돼 사형집행의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세인들의 뇌리에서도 잊혀져가는 기간 동안 그는 새로운 모습으로 환생하고 있었던 것. 박은 형이 확정된 후 재소기간 중 기독교에 귀의, 독실한 신앙생활로 회개의 나날을 보내왔다. 박은 같은 감방의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헌신적인 전도생활을 하며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뉘우치고 새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해 온것으로 밝혀졌다. 이 때문에 구치소측은 행형 성적이 좋지 않은 말썽꾸러기 재소자를 번갈아가며 박과 합방을 시켰는데 이때마다 박이 성경을 나누어 읽으며 자신의 과거 얘기를 해주고 종교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들려줘 교도관이상으로 순화에 성공했었다는 것. 박은 특히 지난해 4월께 누구의 권유도 없이 자신의 형이 집행되면 안구와 신장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었다는 것. 이에 따라 구치소 측은 사형집행 전날인 21일 서울 강남성모병원에 박의 이름은 밝히지 않은 채 수술준비를 부탁해놨었다. 서울구치소 부소장, 입회검사, 30여명의 사법연수원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수형으로 집행된 형장에서 박은 집행직전 목사가 성경을 손에 펼쳐들고 기도를 드리는 동안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를 올렸으며 이윽고 죽음의 공포를 이미 초극한 듯 아무런 요구사항이나 말이 없이 형장에 올라갔다. 영생을 찾아가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세속의 차원을 넘어선 것 같았다는 게 입회자들의 공통된 느낌이었다고.【최규식 기자】 <1982년 7월24일치 <한국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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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범 박철웅은 진공청소기 총판 사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돈이 많을 것으로 보이는 서울 인사동 골동품가게 ‘금당’ 사장 정해석을 전화로 유인했다. 서울 성산동 자신의 집에 억대 이조백자가 있다며 집까지 오게 했고 부인 김정태에게 돈 5백만원을 가져오라고 전화를 걸게 시킨 뒤 살해했다. 곧이어 돈을 갖고 온 부인을 방 안에서 결박한 뒤 운전기사 이동환씨까지 부르게 해서 모두 죽였다. 세 명 모두 목을 졸랐다. 집 마당에 그들을 묻고 그 위에 조경수까지 심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던 피해자 부부의 네 딸은 TV에 나와 울먹이며 “제발 우리 아빠 엄마를 돌려달라”고 애원했다. 범인을 빨리,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해졌다. 경찰은 연인원 2만 명의 수사인력을 투입했다.
이 사건에서도 검찰과 경찰은 ‘반인권 수사’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박철웅과 공범들에게 고문을 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골동품업계를 풍비박산 초토화시켰다. 수사에 집중하던 세 달 동안 골동품 중개상 등 3천4백 명이 검찰조사를 받았다. 서울 인사동 일대의 골동품 거래가 올스톱됐다고 한다. 조사를 받던 골동품 중개상 중 1백15명이 용의자로 조사받다 다른 건으로 입건됐고 그 중 76명은 구속됐다. 한 중개상은 조사도중 투신자살을 기도했다. 얼마나 때리고 모욕을 줬길래…. 사건이 종료된 뒤 서울시경국장은 용의자로 몰렸던 골동품상과 중개상, 골동품 수집자 등 2천명에게 사과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늦었지만, 박철웅은 자신의 죄를 뉘우쳤다. 안구와 신장을 기증해 다른 생명을 살리는 데 기여했다. 『내 목에 밧줄이 놓이기 전에』라는 참회 수기집도 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종교에 귀화하여 교화되고 장기를 기증해 신문미담 기사에 실린들, 뒤를 잇는 범죄가 줄어들 리는 없었다.
1980년대 초반 도시화는 가속화됐다. 1960ㆍ70년대에 원시적 축적을 끝낸 한국자본주의는 날개를 펴고 고도성장을 향한 이륙을 시작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돈의 맛’을 알게 된 시대였다. 유치하고 조잡한 충동적 범죄로는 그 맛에 간의 기별도 안 갔다.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한탕’을 해야 그 진짜 맛을 볼 수 있었다. 더 대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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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도 더 대담해졌다. 윤 노인과 박상은 사건으로 잠깐 제동이 걸렸지만, 오랫동안 흘러온 전통의 맥이 갑자기 끊길 리 없었다. 몇 년 더 흐른 80년대 중반은 ‘고문수사의 중흥기’였다. 서울대생 박종철 사건에서, 그것은 정권을 뒤흔들었다.
※ 참고한 책과 글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조갑제 지음, 한길사, 1987)
『법원사』(법원행정처, 1995)
‘골동품상 부부 살해사건’(민병욱, 네이버 뉴스캐스트 ‘그 시절 그 이야기’)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41회(한홍구, <한겨레> 2010년 3월7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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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에 더해 법의학의 발전을 빼놓을 수 없다. 『법의관이 도끼에 맞아죽었다』(문국진ㆍ강창래 공저, 알마, 2011)의 서문은 “고숙종 여인 무죄판결의 배경엔 법의학이 있었다”고 말한다. 증거제일주의 과학수사의 발전도 고문수사에 브레이크를 거는 데 한 몫 거들었다는 얘기다.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한겨레21」「씨네21」편집장과 한겨레 esc 팀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 홈스쿨』(2011)과 『유혹하는 에디터』(2009), 『직설』(공저, 2011)이 있다. 가족을 사골국물처럼 글감으로 우려먹는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yeunbora0821
2012.07.06
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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