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와 작가의 두뇌 싸움, 서술 트릭
서술 트릭은 단지 범인을 감추는 역할만이 아니라 독자를 작가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끌어가며 원하는 풍경을 보여주는, 주관적인 어트랙션이기도 한 것이다.
글ㆍ사진 김봉석
2014.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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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처음 읽었을 때 무척 당황했다. 범인이 누구인지를 예측해 가며 결말에 다다랐는데, 밝혀진 범인은 전혀 상상 밖이었다. 아니 이런 결말, 이런 구성의 추리소설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란 의문이 들었다. 보통의 추리소설이라면 사건이 벌어진 후에 탐정이나 형사가 등장하여 증거를 찾아간다. 독자는 탐정, 형사의 행적을 따라가며 그들이 얻은 정보를 공유하고 추론하여 범인을 예측한다. 일종의 게임이다. 한정된 정보를 활용하여 소설이 끝나기 전에 먼저 범인을 특정할 수 있을까,를 겨루는. 『애크로이드 살인사건』도 그런 보통의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은 상식이라 생각했던 추리소설의 규칙을 의도적으로 파괴한다.


범인을 처음부터 드러내고 시작하는 형식을 ‘도서 추리’라고 한다. 도치서술(倒置敍述)을 줄인 ‘도서’는 보통의 서술방식을 뒤집은 형태로 전개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인 미스터리의 서술 방식과는 달리 ‘도서 추리’에서는 범인을 처음부터 공개하게 된다. 범인의 입장에서 범죄의 동기와 방법을 설명한다. 탐정, 형사의 입장에서 사건을 보는 것이 아니라 범인의 입장에서 사건을 보는 것도 무척 흥미롭고, 1인칭인 경우는 범인의 내면을 통해서 다양한 정보를 알 수 있다. 만약 범인이 어떤 악의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 범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면 독자는 그에게 공감을 하게 된다.


<형사 콜롬보>는 도서추리를 익숙하게 만든 형사 드라마다. <형사 콜롬보>는 서두에 범인이 범행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형사 콜롬보가 등장하여 범행 과정에서 있었던 실수나 착오를 짚어내는 과정을 그려낸다. 완벽해 보였던 범죄의 허점을, 어리숙해 보이는 형사가 예리하게 파헤치는 순간은 매력적이었다. ‘도서추리’는 최초의 도서추리 소설로 평가받는 오스틴 프리먼의 『노래하는 백골』 이후 프리먼 윌스 크로프츠의 『크로이든발 12시 30분』. 프랜시스 아일즈의 『살의』, 리처드 힐의 『백모살인사건』,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태양은 가득히』 등 수많은 명작이 있다.

 

애크로이드살인사건  노래하는백골.jpg 백모살인사건.jpg 태양은가득히.jpg


『애크로이드 살인사건』도 일종의 도서추리인데 거대하고 교묘한 속임수가 더 있었다. 아가사 크리스티는 마지막 순간까지 범인을 숨기면서, 그동안 독자가 소설을 읽으면서 얻은 정보들이 치밀하게 계획된 ‘서술 트릭’임을 깨닫게 한다. 마지막 장을 읽고 나면, 다시 앞을 뒤지면서 어떻게 사건이, 인물이, 정보가 ‘서술’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게 만든다. 마술에서 가장 중요한 기법의 하나는 미스디렉션(Misdirection)이다. 뭔가를 숨기는 마술을 할 때, 관객의 눈을 다른 곳으로 집중을 시키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작을 하며 속이는 것이다. 오른손으로 동작을 한다면, 관객의 눈은 왼손을 향하게 만든다. 치밀하게 계획된 동작으로 관객의 눈을 속인다는 점에서 서술 트릭도 비슷하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서 화자가 말하는 정보들은 치밀하게 은폐되거나, 다른 방향을 가리키게 한다. 거짓말이나 허위 정보는 아니지만 독자가 오인하게 만드는 것이다.


서술 트릭에서는 인물의 성별, 나이, 직업 등을 모호하게 처리하거나 시간과 공간을 애매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다수의 인물이 같은 시공간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른 시간에 있다거나 다른 곳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혹은 인물의 성별을 오인하게 만들어 예측이 빗나가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서술 트릭은 영화와 드라마 같은 영상물에서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일단 눈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간이 바뀌면, 인물의 헤어스타일과 패션부터 변하기 마련이다. 공간이 바뀌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모든 것을 글로 묘사해야만 한다. 묘사할 때 의도적으로 어떤 부분을 감추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세부를 통해서 독자가 오도하게 만들어 속임수를 쓰는 것이 가능하다.

 

서술 추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은 범인의 자백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연쇄 살인을 저지르는 자, 그 범행을 관찰하는 여인, 그들의 뒤를 쫓는 퇴직 형사 세 명의 시선이 교차하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서술 트릭을 쓰는 추리소설은 화자를 바꿔가며 서술되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의 입을 통해 서술이 되면, 화자의 시선과 생각에 의해 서술이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보를 오도하기도 쉽다.


 

 

반면 우타노 쇼고의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프리터인 나루세의 시점으로만 이야기가 진행된다. 엄청난 반전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읽어도, 마지막 순간까지 별다른 수수께끼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반전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이미 서술된 사건이나 인물이 다르게 읽힌다. 인간은 어떤 것을 이해할 때 되도록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익숙한 방식으로 정보를 처리하기 마련이다.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그런 상식 혹은 선입견을 이용하여 독자를 깔끔하게 속인다. 아예 서술 트릭으로만 구성된 오리하라의 ‘도착’ 3부작 『도착의 론도』 『도착의 사각』 『도착의 귀결』을 비롯하여 누쿠이 도쿠로의 『통곡』, 미치오 슈스케의 『가위남』 등 일본에는 유난히 서술 트릭을 이용한 미스터리가 많다. 추리소설 본연의 ‘게임’으로 돌아가자고 선언했던 신본격 작가들도 서술 트릭을 애용했다.


마지막으로 서술 트릭을 이용한 작품을 하나 추천한다면, 이누이 구루미의 『이니시에이션 러브』가 있다. 연쇄살인이 벌어진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1980년대를 배경으로 젊은 남녀가 만나 진행되는 잔잔한 사랑 이야기를 서술 트릭으로 엮어 놓았다. 남과 여의 이야기를 LP처럼 A면과 B면으로 나누고, 당시 유행한 노래를 소제목으로 쓰는 등 아기자기한 재미도 탁월하다. 다 읽고 나면 놀라움과 함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연애 미스터리라고나 할까. 서술 트릭은 단지 범인을 감추는 역할만이 아니라 독자를 작가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끌어가며 원하는 풍경을 보여주는, 주관적인 어트랙션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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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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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4.07.02

도착시리즈는 뒤로 갈수록 트릭이 느슨해지죠. 한국은 이런 장르물을 왜 못내놓고 잇을까요.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은 명작 트릭이라고 해서 아껴두었다 읽으려고 미루고 있네요.오스틴 프리먼의 『노래하는 백골』 이후 프리먼 윌스 크로프츠의 『크로이든발 12시 30분』. 프랜시스 아일즈의 『살의』, 리처드 힐의 『백모살인사건』,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태양은 가득히』 는 다시 읽고 싶은 명작중에 명작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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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당

2014.06.02

추리소설은 읽으면 읽을 수록 빠져드는 데...그 시절로 다시 갈 수 있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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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