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우주를 대하는 방식
<인터스텔라>를 봤다. 매진에 매진이 거듭됐던 아이맥스 관람은 포기하고 이미 천만도 넘긴 뒤, 그 열기가 한풀 꺾였을 때쯤 작은 영화관에서 동료 작가들과 봤다. 영화는 내 기대보다 훨씬 좋았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동안에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스탕달 신드롬’이라고나 할까, 압도적인 서사와 연출 앞에서 가벼운 현기증마저 느낄 정도였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우리는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도 <인터스텔라> 이야기만 했다. 감동과 충격을 받은 이는 나뿐만이 아니었다. 각기 장르는 다르지만 같은 창작자이기에 <인터스텔라>에 대한 감상은 대부분 비슷했다. 특수효과를 최대한 배제했다는 그 장인정신에 감탄하고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감독의 동생이 4년간 물리학을 공부했다는 사실에 혀를 내둘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우주’에 관한 주제로 옮겨갔다. 유독 SF 영화를 좋아하는 한 작가는 옥수수 밭을 가로지르는 쿠퍼처럼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쏟아냈다.
“우리는 할리우드, 아니 미국 사람들이 우주를 대하는 방식을 배울 필요가 있어. 내가 어릴 때 생각했던 우주는 고작 토끼가 떡방아를 찧는 달이 떠 있는 곳 정도였는데 미국 애들은 어릴 때부터 우주 비행사를 꿈꾼다잖아. 그런 게 바탕이 돼서 저런 영화도 만들 수 있는 거야.”
나는 달나라에서 토끼가 떡방아를 찧는다는 상상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쪽이지만 어쨌든 잠자코 있었다. 그 작가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걔네들은 진짜 달에 다녀온 경험이 있어. 그리고 심심하면 우주로 탐사선을 쏘아 보내지. 그러니까 미국 사람들에게는 우주가 절대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 아니란 말이야. 현실감이 있는 거지. 그러니까 저런 영화를 만들 수 있다니까.”
그 작가는 무슨 이야기를 하건 결론은 항상 ‘돔구장’으로 끝나는 유명 야구 해설가처럼 ‘그러니까 저런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거짓말 조금 보태서 침을 한사발이나 튀기며 주장하고 또 주장했다. 분명 맞는 말이었으므로 나는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일밖에.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다.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생중계로 지켜봤다. 모두들 흥분했을 테지만 미국 사람들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어마어마한 자부심을 느꼈을 테고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우주에 대한 로망이 넘쳐났으리라. <인터스텔라>를 만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1970년생이라는 점은 무척 흥미롭다. 그는 아마도 아폴로 11호의 영광과 신화를 들으며 자랐을 것이고 수많은 SF 작품들을 소비하는 가운데 자연스레 우주에 대한 열망과 동경을 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린 시절의 내게 우주란 곧 심형래의 <우뢰매> 그 자체였다. 아마 내 또래의 많은 이들 역시 비슷한 추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린아이의 눈에도 상당히 조악해 보이는 검은색 배경에 어색하게 반짝이던 별들. 우주를 날던 우뢰매 날개에 매달린 낚싯줄을 볼 때면 왜 그리 서글프던지…….
우주를 ‘충분히’ 동경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란 이들의 작품을 보면서 나는 내심 질투를 느꼈다. 그런 게 가능하다면 내 상상력도 ‘웜홀’을 통과해 저 멀리 다른 은하까지 뻗어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이리도 우주 타령을 하는 이유는 비단 <인터스텔라> 때문만은 아니다. 근래 읽은 한 권의 SF 소설이 내 우주적 공상에 불을 지폈다. 바로 『Heaven's Shadow』 이야기이다.
우리 안의 우주
『Heaven's Shadow』 의 저자는 ‘데이비드 S. 고이어’와 ‘마이클 캐럿’이다. 맞다. 바로 그 ‘데이비드 S. 고이어’다.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이며 만화가이기도 한 그 사람. 내게는 이미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나이트> 그리고 <슈퍼맨: 맨 오브 스틸>의 시나리오로 작가로 각인되어 있던 그가 소설을, 그것도 하드 SF 소설을 썼다니 구미가 당길 수밖에.
하드 SF가 무언지 궁금하다면 이곳에 연재되는 ‘김봉석의 장르 키워드 사전’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그래도 조금 설명을 하자면, 하드 SF는 과학적 사실과 법칙에 충실한 작품을 말한다. 즉, 작품 속의 내용이 과학적 정합성을 지니고 있느냐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다. 반대의 개념이 소프트 SF인데 둘 사이의 차이점 내지는 구별점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의가 진행 중이니 한 번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쉽게 구분하자면 <스타워즈>는 소프트 SF에 가깝고 앞서 언급한 <인터스텔라>는 하드 SF에 조금 더 가깝다.
하드 SF는 과학적 지식이 들어가게 마련이라 자칫 딱딱해질 수도 있는데 뛰어난 이야기꾼인 데이비드 S. 고이어가 과연 어떻게 풀어냈을지도 내게는 큰 관심거리였다.
2019년(얼마 남지 않았다!) 7월, 두 명의 아마추어 천체학자가 지구를 향해 오는 천체를 발견한다. ‘키아누’라는 이름이 붙게 된 그 천체에 NASA와 ‘러시아-인도-중국 연합’의 우주선들이 각각 먼저 첫발을 내딛으려 하면서 『Heaven's Shadow』 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Heaven's Shadow』 는 총 500쪽 가까운 분량의 거의 삼분의 일을 우주선의 작동 원리와 우주인의 생활 등을 묘사하는 데 할애한다. 독자들은 어렵고 생경한 용어들 사이를 헤매며 머리를 싸매는 동시에 묘한 현실감을 느낀다. 그렇기에 작품의 중반부 쯤 드러나는 반전이 꽤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나는 『Heaven's Shadow』 를 읽는 내내 <인터스텔라>가 오버랩 되는 한편 우주에 대한 정밀한 지식과 무한한 상상을 융합해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묘한 질투심을 느꼈다. 데이비드 S. 고이어와 마이클 캐섯이 구현해 낸 『Heaven's Shadow』 속 우주는 단순히 인터넷 검색을 통해 쌓은 지식이 아닌 오랫동안 우주를 동경하고 꿈꿔온 이들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세계이다. 이야기 또한 거대하고 압도적이다. <인터스텔라>에는 웜홀과 블랙홀을 통해 다른 은하계, 그리고 시간과 차원을 초월한 여행이 등장한다면 『Heaven's Shadow』 에는 지구가 탄생하기 전부터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우주여행을 시작한 지적 생명체가 나온다.
이런 이야기들에 재미를 더해 알맞게 버무린 솜씨는 몇 번 칭찬해도 부족할 정도이다. 하지만 정작 내가 정말로 감탄한 부분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광활한 우주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결국 ‘인간’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자세하게 언급할 수는 없지만 『Heaven's Shadow』 의 주제는 ‘인간’이다. 우주에 대한 탐사와 탐구가 인간 본질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사뭇 감동적이다.
『Heaven's Shadow』 의 주인공 ‘잭 스튜어트’는 사고로 아내를 잃고 홀로 딸을 키우는 비운의 남자이다. 그가 ‘키아누’에 고립되어 자신의 딸을 그리워하는 장면은 울림이 크다. 마찬가지로 죽은 아내와 조우하고 다시 이별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 역시 그 안에 담긴 사랑과 슬픔의 정서가 절절하게 와 닿는다. 작가가 의도한 바이겠지만 키아누의 정체가 밝혀지고 외계인이 등장하는 순간들보다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생겨나는 일들이 훨씬 더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것은 <인터스텔라>가 전하는 메시지와 무척 비슷하다. 이 하드 SF 영화 역시 과학적 지식과 이론이 난무하지만 결국 강조하는 것은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아들이 꼼지락거리며 침대에만 누워 있을 때, 나는 녀석의 눈을 자주 들여다보았다. 아들은 신기한 듯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녀석의 새까만 눈동자 속에서 저 머나 먼 우주보다도 훨씬 더 신비하고 경이로운 무언가를 발견하곤 했다. 아들의 눈은 반짝거렸다. 그것은 바로 생명의 빛이었다. 그리고 사랑의 빛이었다. 아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우주가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Heaven's Shadow』 의 치밀하고 놀라운 이야기가 다다르는 곳은 인간 내부의 우주, 곧 기억과 감정이다. <인터스텔라>의 ‘크리스토퍼 놀란’이건 『Heaven's Shadow』 의 ‘데이비드 S. 고이어’건 이들이 정말로 뛰어난 이야기꾼인 이유는 우주로 향한 시선을 다시 인간으로 돌리는 데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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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ven's Shadow데이비드 S. 고이어,마이클 캐섯 공저 | 청조사
데이비드 S. 고이어의 첫 장편소설 《HEAVEN’S SHADOW(해븐스 섀도우)》. 히어로 메이커(hero maker)라는 별명처럼 고이어는 이번 작품에서도 고군분투하는 인간적인 모습의 영웅을 만들어냈다. 잭 스튜어트. 한창 예민한 사춘기 딸을 둔 아빠이자 열정적이고 아름다운 부인을 둔 남편인 동시에 미 항공우주국 소속의 우주비행사인 그가 보여주는 가족애와 상상력을 뛰어넘는 이야기 전개가 독자들로 하여금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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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아빠, 백수, 소설가, 전업작가로 살아간다. 운동만 시작하면 뱃살이 빠지리라는 헛된 믿음을 품고 있다. 요즘 들어 세상은 살 만하다고 느끼고 있다. 소설을 써서 벼락부자가 되리라는 황당한 꿈을 꾼다.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3』,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4』에 단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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