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해도 괜찮아
반복적인 몰입과 자기만의 즐거움을 은밀하게 즐기다보니 ‘어쩌다 어른’이 되어버린 저자의 일상을 솔직하게 공개한다.
글ㆍ사진 하지현(정신과 전문의)
2015.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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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 월요일, 하지현 건국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추천하는 심리책 이야기, ‘하지현의 마음을 읽는 서가’가 연재됩니다.

 

 

“하고 싶은 게 없어요. 돈은 많이 벌고 싶어요. 그렇지만 힘든 것은 싫어요”

 

내가 진료실에서 많이 듣게 되는 이야기다. 학교를 다니기 싫다는 중고생, 휴학을 반복한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대학생 중에 일부는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온다. 상세한 면담과 심리검사를 해보지만 특별히 진단을 내릴 만한 것이 없다. 그리고 가정환경이나 경제적 사정에 분명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왜냐면 ‘하고 싶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때에는 참 난감하다.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말이다. 반면 다른 방향에서 문제가 되어 오는 친구들이 있다.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겠다는 것이다. 앞으로 요리사가 될 것인데 무엇하러 수학이나 사탐, 과탐을 공부해야하냐는 것이다. 아이돌이 되기 위해 기획사를 찾아갔다가 일단 체중부터 빼고 오라는 말을 들은 여고생이 지나친 다이어트를 하다가 폭식증에 걸려 오기도 한다. 이때 나는 부모에게 차라리 이런 친구들이 좋다고 말을 한다. 왜냐고? 위에 말한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것이 없어요’보다는 ‘절실히 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이 갖는 열정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이 말에 약간은 안심을 하면서도 여전히 의심을 한다. 이런 고민이 있는 부모, 내지는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지내고는 있지만 ‘이래도 되는 걸까’하는 불안을 떨치기 어려운 젊은 덕후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나왔다.

 

이영희의 ‘어쩌다 어른’이다. 현재 신문사 문화부 기자로 일을 하는 저자는 어릴 때부터 뭔가 한 가지에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덕후기질이 있었다. 저자는 기자가 된 8할은 ‘팬심’덕분이었다고 고백한다. 중학교 3학년때 좋아하던 오빠가 유학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김포공항에 오빠가 좋아하는 물건을 바리바리 싸서 달려갔는데, 말도 못붙이고 있는 와중에 오빠와 인사를 나누며 사진을 찍는 존재들은 바로 기자들이었던 것이다.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기자가 되기로 결심을 했단다. 결국 기자가 되었고, 아주 우연히 그 오빠가 아저씨가 되어 신문사를 찾아와 대화를 하는 ‘드림 컴스 트루’를 했다고. 좋아하는 일본 아이돌 그룹 스맙에 꽂혀서 그들의 동영상, 드라마, 콘서트 실황을 6개월동안 주구장창 보다보니 어느날 일본어가 그냥 들리는 귀가 뚫리는 기적을 경험하기도 했다. 또 여전히 그들의 20주년 기념 컨서트를 보기 위해, 멤버가 나오는 이미 매진이 된 뮤지컬을 어떻게든 보겠다고 무작정 일본으로 날아가기도 하는 충동성과 에너지가 충만하다. 오직 덕질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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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런지, 저자는 본인이 ‘빠순이’란 단어가 생기기전부터 활동한 팬녀로서 행여 아이가 아이돌에 빠져있다해도 부모는 걱정하지 마시고,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아이에겐 차라리 ‘팬질을 한 번 해보렴’이라고 권하라고 조언한다. 자신이 유난히 잘 빠져드는 성격이지만, 이때만은 가장 활기차고 빛나는 존재가 되는 것 같다 고백한다. 빠져드는 순간이 주는 몰입감을 알고 나면 매번 다른 대상을 찾아나가게 되고, 그것이 삶의 원동력이 된 덕분이라는 경험이 있는 덕분이다. 

 

반복적인 몰입과 자기만의 즐거움을 은밀하게 즐기다보니 ‘어쩌다 어른’이 되어버린 저자의  일상을 솔직하게 공개한다. 이런 얘기를 다 써도 되나 싶을 수위의 내용이 적나라하게 공개되는 자학모드의 에피소드가 나열된다. 게으른 인생이라는 사주를 받은 일화, 영희라는 교과서 대표소녀 이름이라 “철수는 언제 오니”라는 농담을 들으며 자라 서른이 된 어느 날 개명에 꽂힌 얘기,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예쁜 친구들 곁에서 그들을 돋보이는 성격좋은 친구역할을 하다가 문득 성형외과를 취재를 빙자하여 방문해서 상담을 하고는 “오- 개선의 여지가 많은 얼굴이네요”라는 도전정신을 캐치해낸 이야기 까지.

 

대부분의 에피소드들이 자학적이지만 솔직담백해서 가슴이 아프기보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미소를 짓게 한다. 저자는 일본만화 ‘자학의 시’를 함께 소개하면서 자학에 대해

 

‘자학은 재미있다. 그리고 이미 충분히 상처받은 나 말고는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다. 자학은 이 세계의 부조리를 , 그 속의 나 자신을 들여다 볼 줄 알고, 한계를 직시하며 그럼에도 더 나은 자신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기로 결심한 ’진짜 어른‘들의 놀이가 아닐까’

 

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학을 하되, 처절해서 진저리를 치게 하는게 아니라 ‘아하’하면서 사랑스럽고 귀엽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반전의 묘미도 있는 유머를 장착하고 있기에 읽는 내내 낄낄 거리게 된다. 예를 들면 이렇다.

 

“너는 그 어떤 여자를 만나도 행복하지 못할거야”라고 말을 헤어지는 순간 그에게 했다. 1년후 그는 행복한 얼굴로 결혼식장에 들어선다. 그때 알았다. 나의 저주는 더럽게도 힘이 없군.

 

여러명이 함께 유럽출장중에 A라는 여성은 쇼핑중에 우왕좌왕을 했다. 선배가 그녀를 도우러 가면서 “A는 손이 많이 가는 스타일이야”라고 했다. 이미 계산을 마친 나를 보고 “영희씨는 너무 손이 안가. 어디에 갖다 놔도 걱정이 안돼. 그게 문제라고”

 

이 정도로 자학을 웃음으로 승화하면서까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자아가 단단하다는 걸 의미한다. 그 단단함의 정수에서 흘러나온, 낭중지추가 될 줄 알았지만 송곳은 갈수록 무뎌지고, 후회와 자책, 미련이 범벅된 삶을 살며 도달한 해탈의 경지에서 깨달은 깨알같은 삶의 메시지가 책 곳곳에 숨어있다.

 

지금의 내가 아주 어릴 때 꿈꾼 내가 아닐지 모르지만 그게 나의 최선이었고, 이제는 슬슬 그걸 받아들여야할 것 같다고 말한다. 천성을 용을 써서 거슬러 올라가려 하기보다 자기 몫으로 할당된 게으름을 충실하게 누리며 나답게 살아가겠다고 다짐을 한다. 행복하지 않다고 자학하지 말고, 차라리 ‘행복 유전자’가 있어서 행복해지기 쉬운 사람이 따로 있으니 기를 쓰고 쟁취하려고 하지 말자고 마음먹으면 홀가분해질 것이라고 조언한다. 일본에 유학까지 가면 뭔가를 얻을 거 같아 직장을 그만두고 훌쩍 떠났지만 ‘한없이 자유로운 영혼’인줄 알았던 본인이 사실은 구속이 없으면 공허한 모범생이며, ‘사람들에 치이는 삶이 싫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주변사람들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타입이었다는 고백을 한다. 그런 나를 인정하게 된다는 것, 나에게 맞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망설이기보다 해보기를 권한다는 세상을 좀 살아본 선배의 조언이 살갑게 들어있다.

 

이 책에는 인생 다 산 도인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가르침을 주는 글의 부담감은 하나도 없다. 전문가적으로 이론을 들이밀면서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저, 솔직하게 자신의 경험을 간증하고, 이를 자기가 좋아하는 수많은 만화, 드라마, 영화, 음악으로 일반화하고 난 다음에 결국 느낀 바를 소박하지만 분명히 밝힌다.

 

그래서 정색해서 앉아서 연필잡고 줄 그어가면서 보기보다 소파에 누워서 좋아하는 과자를 먹으면서 보는게 올바른 자세라고 할만한 책이다. 곳곳에 유머와 반전이 숨어있어서 낄낄 거리다 배가 아플지 모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글의 품새는 흐트러지지 않는다. 아마도 저자가 저널리스트로 제대로 글쓰기 훈련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이 책을 읽다 불현듯 삼시세끼 어촌편이 생각났다. 오랜 기간 정극연기를 해온 배우 유해진, 차승원이 예능프로그램에서 힘빼고 툭툭 던지는 이야기들에서 느낀 유머감각이 이 책에서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든, 나의 현재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꾸준히 하는 것이 아닐까. 저자는 그런 삶의 태도에 대해서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말한다.

 

“좋아하는 것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시간, 나만 아는 기쁨을 점점 늘려가는 삶. 그것만으로 썩 괜찮아보인다. 그것들이 분명 어쩌다 어른이 된 나와, 그리고 당신에게, 돌연한 슬픔과 맞서는 두둑한 맷집이 되어 주리라 믿는다. “

 

내가 봐도 저자가 말하듯이 어떻게든 차곡차곡 살다보면 ‘어쩌다 어른’이 확 되어버린다고 해도 ‘헛살았어’라는 자책은 하지 않게 될 것이라 믿는다.

 

 

P.S. 이 책에는 저자가 사랑하는 수많은 만화가 소개된다. 그리고 장차 만화방 주인이 되기를 꿈꾼다고 한다. 책을 읽다보니 내가 책에서 소개된 만화의 90%를 이미 읽었고, 나 역시 좋아하는 만화들이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 나도 만화방 주인을 하고 싶었다...앗, 그렇다면 나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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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어른이영희 저 | 스윙밴드
꿈은 원대하고 마음은 이미 대업을 이루고도 남았으나, 본디 사주가 게을러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는 저자의 일상 대중문화 찬양 에세이다. 저자는 2012년 6월부터 2014년 3월까지 1년 10개월간, 신문 지면에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칼럼을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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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현 #마음을 읽는 서가 #어쩌다 어른
6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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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당

2015.02.22

요즘 세대들의 아주 일반적인 현상이지요. 힘든 건 배제하고 달콤한 것만 추구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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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선

2015.02.22

저를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어른이 되기 위한 충분한 준비와 마음가짐 없이 어느덧 어른이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에 맞춰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자기 정체성과 현실 사이의 괴리 속에서 어느 정도 시행착오와 갈등을 경험하는 것 같은데,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참 재밌고 유익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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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보석

2015.02.21

나에게 맞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망설이기보다 해보기를 권한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저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크게 느끼는 부분이예요. 해탈의 경지에서 깨달은 깨알같은 삶의 조언이 담긴 책이라 더욱 읽고 싶어지는군요. 나의 현재를 인정하고, 행복의 크기를 키워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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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현(정신과 전문의)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읽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지금은 독서가인지 애장가인지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정신과 의사. 건국대 의대에서 치료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도시심리학', '소통과 공감'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