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이듬, 건강한 백치의 관능과 용서
어떤 의도나 악의가 없을 때에만이, 그리고 그것이 상대방에게 오해 없이 다가간다는 확신이 있을 때만이 할 수 있는 농담인 것. 아니다, 그 어떤 반응조차 무관심한 백치의 상태에서야 비로소 가능한 농담인 것. 그 말에 파안대소를 터뜨린 걸 보면 송승언 시인 역시, 김이듬 시인의 농담을 그냥 백치적인 천진함에서 비롯된 치사로 받아들였음이 틀림없다.
글ㆍ사진 김도언 | 이흥렬(사진)
2015.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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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고 싶다. 기약 없는 땅으로. 독창(獨創) 혹은 숙명(宿命)이라는 착란 속에서 단지 쓰다가 사라지고 싶다. 최선을 다해 빛나지 않으려고 애쓰는 빛나는 것들의 심정이 이러할까?
- 시집 <명랑하라 팜 파탈> 후기 중

 

 

시인의 백치적 태도

 

2001년, 지금은 없어진 <포에지>라는 시전문지의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김이듬 시인은 우리 시단의 선명한 이색異色이다. 시적 화자로서 그녀를 통해 발화된 여성의 목소리가 아직까지 관측된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제사장으로 만신을 대리하는 듯한 허수경이나 김선우와도 다르고, 지적 균열을 내며 여성의 실존적 의미를 궁구하는 김혜순이나 진은영과도 다르다. 외관상 김이듬이 내는 목소리의 가장 명료한 개성은 특유의 천진함으로 보인다. 이 말은 단순히 그의 목소리에 꾸미거나 가공한 흔적 같은 것이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가 발성될 때, 대기의 입자를 흔들고 공명을 일으키는 사후적 반응에 김이듬이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 백치적 태도를 갖고 있다는 의미를 가리킨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그녀가 갖고 있는 시인의 존재론적 좌표에까지 연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고전적이다 못해 낭만주의에 깊이 침윤된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시인은 만들어지거나 발명되는 존재가 아니라 발견되는 존재, 다시 말해 원래 있는 존재다. 시인은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이 세계의 작동 방식, 다시 말해 자연이나 사물이 존재하거나 관계 맺는 방식에 제각기 반응하며 특유의 이미지를 자신의 몸을 투과시켜 음악적 언어(목소리)로 표현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몸이 일종의 악기라고 말한 시인 허연의 표현은 매우 적확하다.) 이때 시인이 어떤 인공적인 태도나 의도를 가미한다면, 자신의 몸에 들어오는 세계의 빛은 굴절되거나 왜곡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시인은 가장 원시적인 상태에서 그 세계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것은 일종의 백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의도나 긴장을 지워버린 욕망의 공백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김이듬은 그것을 아마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시인 중 하나일 것이다.  

 

여기서 그녀의 백치적인 천진함을 확인할 수 있는, 최근에 직접 목격한 에피소드 한 가지를 소개하겠다. 폭염으로 도심의 아스팔트가 이글이글 타오르던 7월 31일 어느 식당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날은, 새로 창간된 시 전문 계간지 <22세기 시인>이 제정한 22세기 시인상 시상식이 있는 날이었고, 그 상의 초대 수상자가 바로 김이듬 시인이었다. 나는 그 잡지의 편집위원인 김요일 시인의 초대를 받아 그 시상식에 참석했다가 뒤풀이가 열리는 자리에까지 끼게 되었다. 김이듬 시인이 받은 상이 본상 격이라면, ‘22세기 젊은 시인상’은 본상과 함께 주어지는 특별상이었는데, 그 상의 수상자는 송승언 시인이었다. 당연히 그 역시 뒤풀이 장소에 와 있었다. 그런데 음식을 기다리던 중 송승언 시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김이듬 시인이 한참 후배인 송승언 시인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승언 씨, 시 열심히 써, 그러면 언젠가는 나처럼 좋은 시를 쓰게 될 거야.”

 

그 말이 끝나는 것과 좌중에 웃음이 터졌다. 김이듬 시인의 말은 당연히 악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농담이었고 장석주 시인을 포함해 그 자리에 하객으로 참석하고 있던 시인들 사이에 고여 있던 다소 어색한 분위기를 일시에 무화시켜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시인이 시인에게 그와 같은 농담은 하는 것은 사실 매우 어려운 것이다. 어떤 의도나 악의가 없을 때에만이, 그리고 그것이 상대방에게 오해 없이 다가간다는 확신이 있을 때만이 할 수 있는 농담인 것. 아니다, 그 어떤 반응조차 무관심한 백치의 상태에서야 비로소 가능한 농담인 것. 그 말에 파안대소를 터뜨린 걸 보면 송승언 시인 역시, 김이듬 시인의 농담을 그냥 백치적인 천진함에서 비롯된 치사로 받아들였음이 틀림없다.

 

인터뷰를 위해 김이듬 시인을 만난 건 8월 초, 그녀가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는 문지문화원 사이 강의실에서다. 검은색 투피스 블라우스를 입고 온 이 백치 같은 시인에게 시가 처음 들어온 것은 언제였을까. 그것부터 들어보고 싶었다.  
 


시를 만난 여름날 오후
 
김도언: 먼저 시인님이 최초로 시를 만나게 된 상황을 설명해주시면 좋겠어요. 처음 내가 시를 쓰고 있다는 걸 자각한 순간이라거나. 어떤 결정적인 명료한 순간이 있었는지.

 

김이듬: 저는 집에 책이 많았거든요. 아버지 친구 분이 금성출판사였나, 외판원을 하셔가지고 집에 전집류 같은 게 많았어요. 그래서 제가 어렸을 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런 걸 읽었어요. 초등학교 때, 뭔지도 모르면서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랐죠. 아마 3, 4학년 때쯤인 거 같은데 여름이었어요. 새어머니랑 싸우시고 집을 나가버린 아버지를 찾으러 나갔는데, 동네 여기저기를 기웃기웃하면서 보니까 이발소에 아버지가 계시더라고요. 거기 할아버지하고 같이 소주를 마시고 계셔서 들어가서 아버지한테 집에 가자고, 가서 저녁 드시라고 그랬는데, 아버지는 좀 기다려봐라 하면서 시간이 계속 지나갔어요. 아마 장기나 바둑 같은 걸 두셨던 거 같아요. 그런데 그 이발관에 시 같은 게 걸려 있었는데, 그날따라 그 시가 눈에 선명히 들어왔어요. 푸시킨의 시였거든요.

 

김도언: 푸시킨이라면.

 

김이듬: 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마라. 그 시였죠. 그 날은 제가 너무 우울했고, 새어머니하고 우리 아버지가 싸우는데 저 분들이 싸우다가 잘못되면, 나는 또 어떡하나 이런 생각을 했고, 해질녘이었고 그런 여러 가지 상황들이, 좀 지저분한 의자에 앉아서 아버지를 기다리면서 올려다본 액자에, 그 시가 있었던 거죠. 그 액자가 지금도 눈에 선명해요. 그때 삶이 슬픈 거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시가 뭔가 위로해주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김도언: 그러면 그 이후에도 시가 그러한 것이라는 자각이 계속 이어졌어요? 아니면 그날이 있고, 한참 후에 또 시를 만난 건가요. 혹시 중고등학교 때 문학소녀였나요?

 

김이듬: 네 그랬어요. 중학교 때 시를 곧잘 썼어요. 도왕자 선생님이라고 국어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 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도왕자 선생님은 거의 어머니 같은 분이셨어요. 선생님이 저한테 책을 주셨는데, 심지어 『채털리 부인의 사랑』 같은 것도 중학교 3학년 때 주시고 그랬어요. 그리고 선생님 쉬실 때 놀러 오라고 해서 같이 토론도 하고. 넌 어떻게 읽었어, 물으면 제 감상을 말씀드리고 그랬죠. 전혜린도 그 때 알았어요. 선생님은 저를 거의 문학적 동반자, 친구처럼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김도언: 그 선생님한테 문학 영재 교육을 받으신 거네요. 

 

김이듬: 지금 생각하면 그런 셈이죠. 선생님이 말을 잘하고 그러면 뉴욕제과 데려가서 빵도 사주시고, 짜장면도 사주고, 그런 재미가 있었어요. 선생님한테 잘 보이고 싶고, 기대에 어긋나면 버림받을 까봐,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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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는 좌표

 

아버지를 찾으러 나갔던 그 불안한 여름날 오후, 이발소 벽에 걸려 있던 외국 시인의 시를 통해 삶에 넌지시 말을 건네오는, 시의 특별한 쓰임을 (자발적으로) 어렴풋이 깨닫고, 이후 특별한 선생님과의 만남과 그로부터의 자극 속에서 문학의 아우라에 성큼 자신의 몸을 적실 수 있었다는 시인의 증언. ‘줄탁동기’라는 말처럼 우연과 필연의 정교한 짜임 속에 김이듬 시인의 문학이 출발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저물거나 지치지 않는 시인의 건강한 자존감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삽화가 아닐 수 없다.

 

21세기의 벽두인 2001년 등단한 김이듬 시인은 그동안 비교적 안정적인 주기로 다섯 권의 시집을 펴냈다. 내 관점에선 최근의 시단에서 그보다 더 활력 있고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는 시인을 찾기 힘들 정도로 시업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자연스레 그녀가 성취한 문학적 성과에 대한 평단과 동료시인, 그리고 독자들로부터의 평가와 인정이 뒤따르면서 문학상 같은 보상과 격려도 주어지는 중이다. 지난 6월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시인 페스티벌에 황지우, 심보선, 강정 등과 함께 한국 시인을 대표해 참석하기도 했다. 이 지속가능한 열정의 근원이 무엇인지 물었다.

   

김도언: 2001년 등단 이후 15년이 되었는데 그 시간 동안 중단 없이 시를 쓸 수 있는 동력이 무엇인지 좀 말씀해주세요. 혹은, 슬럼프가 있었다면 그 슬럼프를 어떻게 극복했는지도 좋고요.

 

김이듬: 아무래도 잘 쓰니까.(웃음)

 

김도언: 주변에서 적절한 피드백이 있었고, 격려가 있었고. 그런 외부적인 요인이 영향을 미쳤다는 건가요.

 

김이듬: 등단한 직후에는 피드백 그런 거 없었어요. 그땐 친구도 아무도 없었고. 스승도 없고. 근데 열심히 썼거든요. 저는, 그냥 노래가 기분 좋으면 나오고, 슬플 때 울음이 나오는 것처럼 시가 그런 거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제가 시를 썼다기보다도 시가 저를 좀 데리고 왔고 또 살게 하고 그런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전망을 가지거나 계획성 있거나 그렇지가 않거든요. 언제 몇 편을 쓰고 언제 시집을 내고, 그런 계획 자체가 없어요. 시집 낼 때도 발표한 원고를 다 못 찾을 때가 많아요. 면밀하지가 못한 편이죠. 그 시 좋던데, 왜 시집엔 수록되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저는 그 시가 도대체 왜 사라졌는지 모르겠는 거예요.

 

김도언: 그러니까 슬플 때도 노래가 나오고, 기쁠 때도 노래가 나오는 것처럼 시도 그렇다는 거죠? 그런데다가 어느 시점부터 자주 언급되고, 평가와 인정을 받으면서 더 동기부여도 되고 그런 측면도 있었겠죠.

 

김이듬: 사실은 비평 잘 안 찾아봐요. 누가 뭐라고 하거나 안하거나 그런 거에 별로 자극이 안돼요. 어떤 사람은 자기 비평 모아 놓는다는데 저는 하나도 안 모아놨어요. 그냥 그건 지나가는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런 것에 좌고우면할 이유가 없죠.

 

이 글의 서두에서 나는, 김이듬 시인에게서 받은 인상을 묘사하면서 좀 과감하게 어쩌면 과격하게 ‘백치’라는 단어를 썼다. 그것은, 원시적인 상태에 다다르기 위해 자신의 의도나 긴장을 지워버린, 그래서 세계의 가장 자연스러운 원형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최적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 고스란히 기록되는 인터뷰를 통해 김이듬 시인은, (물론 의식을 하고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가진 백치성에 대해, 이미 깃들어 있는 그 천진함에 대해 충분히 증언을 하고 있는 셈이다. 당연히 그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백치적인 천진함이란 게 과연 의도한다고 만들어지거나 보여질 수 있을까. 나는 그 특유의 나이브한 태도를 좀 더 확인해보고 싶었다.

 

김도언: 자신의 좌표를 특별하게 의식하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둔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좋은 시인들의 공통점 같아요. 2001년도에 등단하셨는데 저는 그 시기가 상징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90년대 시인들이 80년대적인 무거운, 이념적 지향이 있는 것들을 걷어내면서 90년대적인 감수성을 시 안에 들여놓았는데 그것이 만개한 게 2000년대 시단이잖아요. 그때 미래파니 해서 온갖 개성 있는 시인들이 나오고, 시가 정말 활발하게 거의 르네상스처럼 논의가 됐었어요. 김이듬 시인도 그런 상황에서 함께 언급됐고요. 시인님의 시 역시 개인적인 욕망, 불안 이런 것들을 다루면서 2000년대의 시의 전형적인 특질을 보여주었다고 저는 보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본인이 참여하고 있는 2000년대 시사의 의미를 어떻게 보고 계세요?

 

김이듬: 저는 거기에 대해서 특별한 통찰을 해보지는 않았고 다만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걸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저는 1990년대 후반쯤에 등단할 뻔했다가 최종심에서 떨어지는 일들이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등단이라는 걸 빨리 하지 않고 애타고 좌절했던 시간을 가진 후에 했던 것이 저에게 좋았던 것 같아요. 2000년대 초반에 좋은 시인들이 등단하는 기류 속에서 그들과 함께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었다는 생각도 들고요. 솔직히 저는 제게 문운이 따라준다고 생각해요. 제가 사실 지방 출신에 아무 것도 없고 그리고 2000년대 미래파나 전위성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있었지만, 글쎄요, 그것으로 제 시에 대한 특질이 전부 다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김도언: 명료하게 정언적으로 개념을 확정할 수는 없다는 거죠. 2000년대적인 분위기를 명료하게 정의내리는 것 자체가 반 2000년대적이라는 거죠.

 

김이듬: 비평가나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 시대는 어떤 시대였다라고 말하면 오히려 그 시대의 특질과 멀어지는 것 같아요. 저는 다만 제가 시인으로 작업을 시작했던 시기가 좋은 시를 쓰는 다수의 시인들이 함께 활동하는 시기였고 거기에 동참했던 것이 즐거웠던 거죠. 그때의 시인들이, 전위적으로 시대성을 담보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모험을 감행했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다기보다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억압이나 다툼 없이 터져나왔다는 것 자체가 매력이었던 것 같아요. 그 시대에 나도 시를 쓸 수 있었던 것, 그게 좋았다는 거죠. 사실 어떤 뿌리가 있고 조금 먼저 도착한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에 시는 계속 진보하는 거잖아요. 황병승 시인이 쓴 ‘여장남자 시코쿠’ 같은 것도 채호기 시인의 ‘슬픈 게이’와 연관 지어 생각해볼 수도 있고요. 모던하고 감각적인 언어를 블록화 시키는 시인들도 사실은 그 근거를 따라가보면 많은 원형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라고 생각해요. 그것들이 처음에는 물밑에 잠재되어 있다가 퍼져나가면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죠. 우리는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기류를 받아들여서 즐겁게 작업했던 거라고 생각해요. 특별히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고요. 그리고 우리 시대에 들어서 외국어 독해능력이 보편화되었고 외국문학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도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요. 시장에서 주어지는 것만이 아닌, 다양한 외국의 시인과 시들, 대중문화를 직접적으로 접할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이죠. 그게 감각적인 상승작용을 일으킨 것 같아요.

 

김도언: 저는 김이듬 시인님의 등단지면이, 황현산 선생님이 만든 <포에지>라는 매우 실험적인 문예지였다는 것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굉장히 전통있는, 문지나 창비 같은 곳에서 등단했다면 어떤 면에서 상당한 부담이나 간섭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 안에 축적되어 있는 선배 시인들의 무게에 짓눌리거나. 그건 또 상상하기 나름일 수는 있겠지만.

 

김이듬: 실험적인 신생 문예지로 등단해서 상당히 외로웠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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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를 변주하는 시인

 

외로웠다고 말하는 김이듬 시인의 어투는 매우 담담하면서도 권태롭게 느껴진다. 당연히 엄살이나 투정처럼 들리지도 않는다. 그럴 때 그녀는 영락없는, 회고 취향을 가진 노인처럼 보인다. 사실 사석이나 공석에서 그녀의 실물을 볼 기회가 있었을 때, 그리고 시를 통해 그녀의 무의식의 행간을 살필 때 나는 종종 그가 팔색조처럼 변신에 능한 배우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내 식대로의 표현을 하자면,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데 있어 그는 사실상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솜씨를 가진 시인인 것 같다. 그가 만들어낸 캐릭터에는 공장의 선반에 올려져 있는 ‘소녀’(그녀의 아버지는 한동안 신발공장을 운영했다)로부터 명랑하라는 명령을 받는 ‘팜 파탈’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애인을 간직한 비밀스러운 여자, “부르면 혼자 오시겠어요”라고 묻는 ‘세이렌’ 그리고 반듯한 가계의 기품을 지루해하는 ‘시골창녀’ 자신의 ‘히스테리아(자궁)’를 드러내며 여자의 기원과 미래를 궁구하는 ‘대모’까지 다양다기하다. 이 캐릭터를 만들어낸 주체는 당연히 시인 자신이다. 변주된 캐릭터를 통해 시인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 욕망에 스며든 분열과 모순과 부조리는 과연 어떤 것일까.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김도언: 시인님이 창조한 시적 화자나 캐릭터의 목소리를 보면 어떤 때는 상당히 직설적이고 약동하는 화법을 보여주는데, 또 어떤 화자는 수줍은 독백처럼 모호하게 중얼거리는 그런 화법을 보여주기도 해요. 상당히 다중적이고 모순적이죠. 김이듬 시인님에게 모순이나 부조리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들인가요?

 

김이듬: 저는 모범적으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어요. 왜냐하면 제가 삐뚤어지면 우리 새어머니가 너무 좋아할까봐. 아무튼 학교나 우리 사회에 만연한 유교적 질서 속에서 통일된 인격을 권장 받았죠. 그런데 사실 사람은 굉장히 불안하고 모순적이잖아요. 고요함과 소용돌이치는 자아가 공존하니까. 그런 것이 교육이나 훈육을 통해 통제되고 반응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고유한 아이텐티티를 가지게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에겐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듬어지기 전의 본연에 가까운 그런 원형에 대한 감지력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저희 할머니는 많이 못 배우신 분인데, 나중에 눈이 멀고, 귀도 안 들리고 그랬는데도 누군가 옆에 오면 피부가 반응하고, 밤에 큰 새가 날아가고 도둑이 들어오는 걸 다 아셨거든요. 그런데 지금의 여성이나 사람들은, 그런 동물적인 감각이 많이 희박해진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가능하면 그걸 가지고 싶고 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야 세계에 즉자적으로 다양하게 반응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일관성 있게 시를 쓰는 사람은 잘 이해가 안 돼요. 밤도 있고 낮도 있고, 굉장히 추운 계절도 있고 굉장히 더운 계절도 있고, 오후 3시가 있고 아침 10시가 있는데, 다양한 주기와 궤도가 있는데, 어떻게 동일한 반응을 하면서 살 수가 있을까요.

 

김도언: 시인으로서 김이듬 시인에겐 자의로든 타의로든 구축되어 있는 이미지가 있어요. 팜 파탈, 소녀, 세이렌, 창녀, 성녀 같은 남성들의 상상계에서 자의적으로 변주된 함의가 풍부한 여성의 이미지들. 그런 개념들이 김이듬 시인님의 시인으로서 구축되어진 이미지인데, 이런 이미지들이 시인님의 시적 개성이나 문학적 진실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다고 보시는지 아니면 그런 구축되어진 이미지들에 균열을 내고 싶은 불만은 없는지 궁금해요. 아니면 그런 이미지들이 시적 전략에 의해서 일부러 만들어내신 트릭인지. 이런 걸 좀 말씀해주실래요?

 

김이듬: 뭐, 세 가지가 다 맞을 수 있는데 그런 이미지가 공식적이라거나 확정적으로 정착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실 새소리도 다르고, 바람소리도 다르고, 악기는 악기마다 소리가 다르잖아요. 저는 여자인데 어릴 때 학대도 많이 받았거든요. 이유 없이 미움도 많이 받고, 알고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말이죠. 니가 너무 키가 커서 짜증이 났어, 이런 식으로. 아무튼 여자가 한국 사회에서는 비주류적인, 마이너리티를 가지고 있으니까 관심이 더 있었고. 그냥 바이올린은 바이올린 소리를 내고, 플루트은 플루트 소리를 내는 것처럼 저는 여성이니까 여성 이야기를 한 거고.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요.

 

김도언: 저는 이와 관련해서 매우 미묘한 스탠스 같은 걸 느꼈거든요. 제가 잘못 느꼈을 수도 있지만, 제가 독특한 스탠스라고 한 게 뭐냐면, 문학을 통한 여성의 목소리는 순종적이거나 저항적이거나 둘 중 하나예요. 그런데 김이듬 시인이 내는 목소리는 그 어떤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거죠. 남자에게 저항도 하지만 동시에 남자들과 친화적인 걸 도모하는 목소리도 있단 말이에요. 영리한 여자가 단순한 남자들을 잘 얼러서 이용해먹고, 그런 게 있어요.

 

김이듬 : 남자들을 어떻게 한 가지로 규정을 해요. 어떤 남자들은 귀엽고 친하고 싶고, 동지 같고 동생 같고, 오빠 같은 반면에 어떤 남자는 정말 싫고 무섭고 그러니까.

 

김도언: 저는 그런 시적 화자의 개성이 우리 시단에서는 굉장히 귀하다고 봤어요. 독특한 스탠스잖아요. 여자시인이 남자들과 친화적인, 남자들을 데리고 노는, 그런 모습이 여자들이 쓴 시에서 잘 안 보여요. 그렇게 유연한 목소리를 갖는 게 이상하게 우리 시단에는 없었다는 거죠.

 

김이듬: 아, 처음 듣는 얘기예요. 고마워요. 저는 특별히 남자들에게 적대감이 있거나 그들의 세계관을 바꾸거나 그런 의도는 없고 그때그때 쓰고 싶은 걸 써요. 획일적으로 생각하지는 않고요.

 

김도언: 남자들의 가부장성이나 이런 걸 보면 비판하고 계몽하고 그럴 생각은 없는 거죠.

 

김이듬: 그럴 힘도 없어요. 시가 뭐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고, 안 그런 남자도 많고. 다 그렇게 싸잡아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죠. 아시다시피 가장 최근 시집 제목으로 쓴 ‘히스테리아’가 여성의 자궁을 뜻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영혼이 복부에 있다고 믿어요. 배고플 때 먹고 나면 영혼이 조용해지잖아요. 뇌에 있으면 그렇지 않을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육체적인 영혼성이라고 해야 하나. 저는 자궁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자궁이 가지고 있는 우주성이라고 해야 하나, 저는 조금 더 근원적이고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근원성이라고 생각하고요. 굉장히 아름다운, 물렁물렁하고 그런, 저도 제가 신비주의로 빠질까봐 걱정이긴 한데요. 제가 원형성에 대해 계속 공부를 하는데 관심이 많아요. 히스테리아라는 시를 오래 전에 썼고, 저는 그런 걸 굉장히 알고 싶어요. 자궁이 가지고 있는 건강함과 그것의 역할에 대해서 말이죠. 근원적인 통찰에 이르면 남자에 대한 여자의 태도는 훨씬 유연해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제 시가 굉장히 건강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퇴폐적이라고 하고.(웃음)

 

 

건강한 관능의 탄생

 

21세기, 자본의 권한과 권위를 마음껏 보장하는 신자유주의가 거의 절대적으로 우리의 일상을 구속하고 지배하는 시대다. 불행하게도 시인은 자본에 가장 취약한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세상은 시인들에게 자본에 대해 매우 고약한 태도를 요구하는 듯하다. 자본에 대해 민감하고 셈이 빠르면 시인으로서의 순정한 자질을 의심하고, 자본에 대해 아둔하고 무관심하면 아나크로니즘에 빠진 낙오자로 손가락질 한다. 내가 아는 김이듬 시인은 자본이 지배하는 현실적 질서에 매우 취약한 사람이다. 대학에서 박사 과정까지 마쳤지만, 그리고 한눈 팔지 않고 성실하게 시를 썼지만 안정적인 신분을 얻는 데 자발적으로 실패한 것이다. 그의 실패는 어느 정도 예정된 것이었으리라. 때문에 그에게 자본에 저항하는 시인의 태도를 묻는 것은 어쩌면 좀 짓궂은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   

 

김도언: 시인은 자본에 어떻게 저항해야 할까요?

 

김이듬: 분명히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시인은 좀 자본으로부터 초월해 있어야 하고, 부나 돈이나 이런 것과 거리를 둬야 한다는 생각은 굉장히 낭만주의적인,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거예요. 시인은 폐병에 걸리고, 술에 찌들고, 약에 취하고 이런 건 정말 보들레르 시절의 이야기잖아요. 근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고, 또 독자들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대리만족을 하는 게 문제예요. 자기들은 잘 먹고 잘살면서 시인들은 좀 가난해야하고. 저는 그건 정말 옳지 않은 생각이라고 봐요. 그리고 또 시인들 중에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나는 시만 쓰면서 살아야 하고 그래야 정말 좋은 시인이라고요, 그건 어떻게 보면 자존감이 아니라 병적인 우월의식이에요. 오히려 자존감이 없는 사람인 거죠. 나는 시인이고 작가니까 우대받아야 하고 누군가 조력자가 있어서 살아야 하고 저는 이런 생각에 반대해요. 시인은 똑같은 보통 사람의 삶을 사는 건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누굴 밟아서 교수가 되거나 세속적인 지위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과는 다르고요. 시인도 그냥 밥을 위해선 성실해야 한다는 거죠.

 

사적인 이야기지만 그녀는 유치원에 다닐 때 부모가 이혼한 이후, 아버지와 새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때 어린 그녀가 느낀 불안감이나 공포가 시인으로서의 징후를 형성할 그녀의 감수성이나 정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추정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상처를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 이것은 시인들에겐 피할 수 없는 과제일 테니까. 그런데 김이듬 시인은 그 상처를 문학으로 훌륭히 극복했던 것 같다. 그녀가 아버지를 찾으러 나갔던 여름 날 오후, 이발소 벽에 걸려 있던 푸시킨의 시가 어떤 화학적 공명을 일으키며 그녀에게 다가갔던 것처럼, 그때 그녀가 영민하게도 시가 삶에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즉자적으로 알아버렸던 것처럼 그녀는 시를 쓰고, 시인의 눈으로 삶과 세상을 읽어내면서 자기 안에 덧씌워진 의뭉스러운 암호를 하나하나 해제해나갔던 것 같다. 말라르메는 시인을 부족의 방언을 순결하게 닦는 자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김이듬 시인을 자신이 창간한 잡지를 통해 등단시킨 장본인인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시인은 자신의 언어를 순결하게 닦는다는 측면에서 아무리 혼자서 자아 속에 유리된 채 작업을 해도 그들의 언어는 공공성과 보편성을 띄는 것이라고 말했다. 말라르메와 황현산이 말한 부족의 언어의 공공성과 보편성. 김이듬 시인에게 있어 그것은 바로 사랑의 회복과 용서를 통한 상처의 극복이다. 그녀는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사실 시를 왜 쓰는지 생각해보면, 궁금한 게 많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왜 엄마는 나를 버렸으며, 아버지는 왜 그랬나. 그러면서 인간이 대체 뭔지를 알고 싶었던 거죠. 그리고 그것은 결국 인간과 사랑이라는 주제와 연결되는 것이었어요. 거기에서 파생되는 문제들을 이해하고 싶고 용서하고 싶은 거죠. 용서의 문제와 창조의 문제거든요. 제가 감히 다다르고 싶은 보편성은 말하자면 질문을 하고, 이해를 하고, 용서를 하는 거예요.”

 

이와 같은, 비범한 각성을 통해 그녀가 얻은 건 ‘건강한 관능’으로 보인다.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읽어왔던 여자 시인이나 소설가의 작품에서 나는 상처를 관능이라고 이야기하는 화자들을 자주 만났다. 그녀들은 상처를 관능으로 드러내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 내가 만난 김이듬 시인은 반대로 관능이 상처의 전거일 뿐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상처가 관능이 아니라. 관능이 상처의 예비적 징후로서 눈부시게 피어 있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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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이듬은 진주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하여 부산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경상대학교 국문학과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1년 『포에지』로 등단하여 네 권의 시집 『별 모양의 얼룩』, 『명랑하라 팜 파탈』, 『말할 수 없는 애인』, 『히스테리아』과 장편소설 『블러드 시스터즈』를 발간했다. 제1회 시와세계작품상(2010)과 제7회 김달진창원문학상(2011)을 수상했다. 경상대, 경남과학기술대 등에 출강하며 진주 KBS라디오 ‘김이듬의 월요시선(月曜詩選)’을 진행 중이다. 201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파견 작가로 선정되어 독일베를린자유대학에서 한 학기 간 생활했다. 2013년 여름부터 석 달 간 아이오와 대학 국제창작프로그램(IWP)에 한국작가로 참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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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언 | 이흥렬(사진)

김도언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후 여섯 권의 소설책과 세 권의 산문집, 한 권의 평전을 펴냈다. 지금은 문학적 관점을 다양한 형식의 글쓰기, 시각적 이미지 작업과 연계해 세계와 타자를 읽어내는 실험을 하고 있다. 좋은 인터뷰는 인터뷰이의 실존적 조건에 대한 통찰과 아울러 삶의 총체성에 대한 상상력과 감수성이 들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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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렬(사진)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와 밀라노 IED 사진학과 졸업. 인물사진과 나무사진을 주로 찍고 있으며 최근의 작업은 '푸른 나무(Blue Tree) 시리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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