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처녀 정명공주, 연하남 홍주원과 혼인하다
당시 양반들이 정명공주를 며느리로 들이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정명공주가 공주이기 때문보다는 나이가 너무 많아서였다. 정명공주가 21살이므로 그녀의 배필이 되려면 20살 내외가 되어야 하는데 그 또래의 남자들은 대부분 혼인한 상태였다.
글ㆍ사진 신명호
2015.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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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화정>속 홍주원과 정명공주

 

 

노처녀 정명공주의 혼인을 서두른 인목대비

 

친정문제가 대략 마무리되자 인목대비는 정명공주의 혼인을 서둘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정명공주는 이미 21살이었다. 당시로서는 노처녀 중의 노처녀였다. 그런데 조선시대 공주의 혼인절차는 일반적인 혼인절차와 달랐다. 흔히 시집간다는 말로 표현되듯 사가에서는 신부가 시댁으로 가는 것이 혼인이었다. 따라서 중매를 통해 양가의 혼인이 성사된 후 혼인의식은 신부 집과 시댁을 왕래하면서 진행되었다. 신부의 혼인을 주관하는 주혼(主婚)은 물론 신부의 아버지가 담당했다. 하지만 공주의 경우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신하의 입장에서 왕에게 중매를 서겠다고 나서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다. 또한 궁중에 사는 왕이 딸을 혼인시키기 위해 주혼이 될 수도 없었다. 이런 사정으로 공주는 중매가 아니라 간택을 통해 부마가 결정되었으며, 왕을 대신해 종친 중의 한명이 주혼을 맡았다. 또한 공주는 혼인 후 시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별도로 궁방(宮房)이라고 하는 살림집을 장만해 그곳으로 갔다.


정명공주, 연하남 홍주원과의 혼인이 성사되다  정명공주의 혼인 역시 간택, 궁방 마련, 유교식 혼례 절차 등에 따라 거행되었다. 이 중에서 시작은 부마간택이었다. 인조반정이 성공하고 사흘 후인 3월 16일에 예조에서는 정명공주의 부마간택을 속히 거행하자는 요청을 하였다. 인조가 허락함으로써 정명공주의 혼인이 본격화되었다. 8월쯤에 혼례를 거행하기로 함에 따라 우선 부마단자(駙馬單子)를 받기로 하였다.


그런데 기한이 되어도 단자를 내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한양과 지방을 통틀어 겨우 9명만이 응모했을 뿐이었다. 당시 양반들이 정명공주를 며느리로 들이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정명공주가 공주이기 때문보다는 나이가 너무 많아서였다. 정명공주가 21살이므로 그녀의 배필이 되려면 20살 내외가 되어야 하는데 그 또래의 남자들은 대부분 혼인한 상태였다.

 

이에 따라 정명공주의 부마단자를 접수하는 기한을 늦추는 한편 부마 후보자의 나이도 대거 낮추게 되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8월 11일에 초간택을 하고 9월 12일의 재간택을 거쳐 9월 26일에 홍주원이 정명공주의 부마로 최종 선발되었다. 정명공주와 홍주원의 혼례는 12월 11에 거행되었다. 혼례 당시 홍주원은 18살로 정명공주보다 3살이나 연하였다. 영안위(永安尉)에 책봉된 홍주원은 노론 명문가인 풍산 홍씨 출신이었다.

 

 

정명공주에게 안국동 신혼집을 마련해 준 인조 


인조는 정명공주의 신혼 살림집을 안국동에 마련해 주었다. 안국동은 창덕궁과 경복궁 사이에 있으므로 입궐하기에 편리했다. 인조는 정명공주가 자주자주 인목대비를 찾아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정명공주의 안국동 살림집은 궁궐처럼 거대하고 으리으리했다. 그 집은 원래 중종의 부마 광천위가 살던 집터로, 예전에는 300칸이 넘는 건물이 들어섰던 곳이었다. 정명공주가 하가할 당시에는 이전에 비해 건물이 줄었다고 해도 집터는 여전히 넓었고 건물도 아직 많았다. 인조는 인목대비 김씨에 대한 자신의 효성을 과시하기 위해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정명공주의 살림집을 호화롭게 만들었다. 본래 조선시대 공주의 살림집은 50칸을 넘지 못하도록 규정되었는데, 인조는 100칸 이상으로 확장했다. 인조는 1624년에 200칸을 증축하는데 필요한 재목과 기와 등을 정명공주에게 주기도 하였다. 당연히 물의가 분분하게 일어났지만 인조는 요지부동이었다. 인목대비에 대한 효심으로 합리화했던 것이다.


실제로 인조는 정명공주에게 거대한 재산을 주었다. 그런 재산에는 노비와 토지뿐만 아니라 광대한 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명공주에 대한 인조의 지나친 배려와 지나친 비호는 인목대비 김씨가 살아있는 동안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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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공주와 혼인한 홍주원의 친필 문서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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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 정명공주신명호 저 | 생각정거장
요즘 드라마 〈화정〉으로 인해 17세기 조선왕실의 역사가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당대 여성 최고의 서예가로 평가될 만큼 뛰어난 필체로 남자보다 더 기개 있는 작품을 후대에 남긴 정명공주. 파란만장한 그녀의 일대기를 통해 17세기 혼란의 조선, 궐에서 일어난 음모와 암투의 역사를 살펴보고 어떻게 위기를 이겨냈는지 역사 속 이야기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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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화정 #정명 #정명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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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

1965년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 농사꾼 아들로 태어났다. 역사를 특히 좋아하셨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역사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강원대학교 사학과에서 한국사를 공부했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조선시대 왕실사를 전공하여 『조선초기 왕실편제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선임연구원과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를 거쳐 현재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