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데뷔 14년 차에 접어든 중견 밴드 페퍼톤스는 언제나 좋은 멜로디 진행을 선보여 왔다. 2005년 첫 정규작
이번 음반은 바로 그 지점을 메운다. 유사한 구조로 전체의 얼개가 허술했던
단단히 결심이라도 한 듯 꽉 채운 사운드가 몰입을 높인다. 디스코그래피 전체를 통틀어 가장 박진감 넘치는 「도망자」는 1분 15초간의 도입부를 거쳐 시원하게 부서져 내리는 일렉트릭 기타와 베이스, 드럼, 한 번 더 덧입혀진 기타 솔로로 벌써부터 뜨거운 여름날의 콘서트를 상상하게 하고, 따뜻한 어쿠스틱 기타로 시작하는 「새」는 실로폰과 트럼펫 계열의 악기 플뤼겔호른으로 서정적인 감상을 제공한다. 이 외에도 ‘아니요 전 춤 못 쳐요, like this’라는 가사 후 바로 댄스를 위한 브레이크 타임을 구성한 「Camera」는 그룹 특유의 위트가 느껴지는 트랙이다.
다만 호기로운 시작에 비해 그리 풍족한 여행담은 아니다. 한참 만에 돌아온, 눈을 감고 떠올린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이 도시에서 내 낡은 가방 가득히 담아온 긴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던 「긴 여행의 끝」으로 개막된 영화제는 업템포의 「카우보이의 바다」 「도망자」를 거쳐 「할머니와 낡은 로케트」 「Camera」의 아기자기한 흐름 이후 그대로 웅장한 여정의 끝으로 향한다. 각각 빠르고, 부드럽고, 감성적인 역할 분담을 칼같이 떠맡은 탓에 감정의 충분한 사유가 이뤄지기 전 마무리가 되어버렸다. 몇 개의 내막과 사연이 더 있을 법도 한데 유사성의 경계 때문인지 앨범은 빠르게 마지막 장을 덮는다.
하지만 음반이 단단하고, 곡들이 더욱 유색유취 해졌음에 변함은 없다. ‘우울증을 위한 뉴테라피 2인조 밴드’에 머물러 있던 그들이 성장의 아픔과 그리움의 감정을 적기 시작했고 이로써 여전히 건재한 싱그러운 베테랑의 저력을 과시한다. 본인들이 떠안아 온 한계를 스스로 인지하고 그 해법을 풀어놓은 음반은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놨고 이제 새로운 쟁점은 그 세상을 얼마나 풍요롭게 구현해내느냐에 달렸다. 수록곡이 적다고 투정을 부리기는 했지만 「노를 저어라」에서 이어지는 후반부 세 곡은 지는 해인지, 뜨는 해인지 모를 태양 빛의 아름다움을 품었다. 다시 돌려 보고 싶은 영화이자, 다시 펼쳐보고 싶은 사진첩 같은 페퍼톤스 식 앨범이 탄생했다.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