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면에 쓰는 마지막 원고다. 2018년 5월에 받았던, <채널예스> 편집자의 연재 제안 메일을 다시 찾아보았다. ‘기간 약 일 년’이라는 문구가 보였다. 이렇게 일 년이 지났다. 2018년 6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열 두 번의 원고를 쓰는 동안 내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 두 어 개의 그릇을 깨뜨렸고, 체중이 2kg쯤 늘었으며, 중편소설 한권을 출간했다. 초고를 재작년 여름에 써놓았으므로 출간이 가능했다. 한 해 동안 거절의 편지를 열 번쯤 썼고 수락의 편지는 거의 쓰지 못했다. 거절의 이유로 작용했던 새 장편의 진도는 지지부진했다. 지난 일 년 간, 새로운 거라곤 거의 아무 것도 시도하지 못했기에 별일이 일어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사이 책을 유난히 많이 샀다. 평소, 언제 주로 책을 사는 지에 대해선 딱히 할 말이 없지만 언제 책을 사지 못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말할 수 있다. 정신없이 바쁠 때다. 일상생활을 영위할 여력 없이 몹시 바빠 허덕일 때. 지난 일 년 간 그런 순간이 드물었다는 뜻이다. 며칠 전, 거실 탁자에 높다랗게 쌓여 몇 개의 산을 이룬 책무더기를 바라보다가 문득 자각했다. 어쩌면 지금 나는 꽤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저 어지러운 10층 책탑들은 지난 일 년 간 내가 제대로 ‘일을 해 내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명백한 물증이었다. 쓰지 못하는 작가에게 ‘읽는 일’만큼 남의 눈 속이기 좋은, 안전하고도 옹색한 도피 수단은 또 없을 테니.
특히 논픽션-르포르타주를 더욱 열성적으로 찾아 읽은 건 도피자로서의 알리바이를 구축하기 위해서라고 고백할 수 있겠다. 내게 논픽션은 오랫동안 애정과 경외를 품어온 동경의 대상이다. 몇 년 전 한 인터뷰기사에 ‘장래희망이 르포라이터’라고 소개된 적이 있었다. 핵심 단어는 ‘장래희망’, 그 앞에 빠진 수식은 ‘영원히 이루지 못할 것이 확실시되는’이다. 훌륭한 논픽션-르포를 푹 빠져 읽으며 감탄을 반복하는 일은, 먼 하늘의 무지개를 따라 뛰는 아이의 마음과 닮은 듯도 하다. 당시 좋아하는 르포르타주를 추천해라는 요청을 받고는 두 배가 넘는 후보작 리스트를 늘어놓은 채 한참 머리를 싸맸던 기억이 난다. 그 중 아직도 종종 꺼내 읽는 몇 권과, 각각의 첫 두 문장들을 적어본다.
『인 콜드 블러드』 , 트루먼 카포티 : ‘홀컴 마을은 캔자스 서부, 밀을 경작하는 높은 평원 지대에 있다. 캔자스의 다른 지역 사람은 거기 바깥이라고 부르는 외딴 지역이다’
『적』 , 엠마뉘엘 카레르 : ‘1993년 1월 9일 토요일 아침, 장클로드 로망이 자기 아내와 아이들을 죽이고 있는 동안, 나는 아내와 함께 큰아들 가브리엘의 유치원 학부모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다섯 살인 가브리엘은 장클로드 로망의 아들 앙투안 로망과 같은 나이였다.’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 레베카 스클루트 : ‘내 방의 벽에는 찍어진 왼쪽 귀퉁이를 테이프로 붙여놓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어떤 여인의 사진이 붙어 있다. 잘 다린 정장 차림에 진홍색 립스틱, 양손을 허리에 걸쳐 올린 채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웃고 있는 사진 속의 여자.’
『1913년 세기의 여름』 , 플로리안 일리스 : ‘1월 히틀러와 스탈린이 쇤브린 궁전 공원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마주친 달이요, 토마스 만이 커밍아웃할 뻔하고, 프란츠 카프카가 사랑 때문에 미칠 뻔한 달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소파에 고양이 한 마리가 기어든다.’
『안나와디의 아이들』 , 캐서린 부 : ‘2008년 7월 17일 뭄바이 자정 무렵 외다리 여자는 참혹하게 불탔고 뭄바이 경찰은 압둘 부자를 잡으러 출동했다. 국제공항 옆의 빈민촌 오두막에서 압둘의 부모는 전에 없이 말을 아끼며 결정을 내렸다.’
아직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 ,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등을 만나기 전이다. 지금이라면 어떤 책들로 나만의 목록을 만들 수 있을까. 알렉시예비치의 여러 저작들 중 무얼 넣어야 할지 오래 고민할 것은 분명하다. 국내 저자의 책으론 아들이 쓴 아버지 박태원의 이야기 『소설가 구보씨의 일생』 을 포함시키고 싶다. 가장 최근, 페이지가 줄어드는 걸 진심으로 아까워하며 단숨에 읽었던 커크 월리스 존슨의 『깃털도둑』 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오늘, 서점에서 『진짜 이야기를 쓰다_하버드 니먼재단의 논픽션 글쓰기 가이드』 라는 책을 발견했다. 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하버드 대학 부속 니먼재단은 매년 천명 안팎의 내러티브 작가들을 초대해 컨퍼런스를 열고 있다고 한다. 그 강의와 워크숍, 토론회 등을 정리한 결과물이 이 책이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보았다. ‘문학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은 사람들의 불신을 잠시 내려놓게 하는 것이다. 독자들은 자신들이 기차나 의사의 진료실에 있거나 또는 아이를 돌보고 있다는 걸 잊어버리고 이야기에 들어간다.’(284쪽) 캐릭터에 관한 존 프랭클린의 조언이다. ‘나는 내 등장인물을 또 다른 한 인간으로 충분히 이해함으로써 독자들이 그의 마음속을 읽게 할 수 있다. 이런 이해의 수준에 도달하려면 철저한 취재가 필요하다. (중략) 작가는 인물의 진지한 초상화를 그러야 하지만 결코 완벽한 것 일수는 없다. 어떤 작가도 한사람의 모든 모습을 포착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병렬적이면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수많은 이야기에 관련되어있다. 나는 작가이며 교사이고 정원사에 아버지, 개주인, 남편이다. (중략) 작가는 무엇이 중요한지 선택한다.’(285쪽)
어, 이거, 소설 얘기잖아? 자세를 고쳤다. 덮어두었던, 쓰다 만 내 소설 속 인물이 갑자기 사무쳤다.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음을 그렇게 알았다.
정이현(소설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수상작품집)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풍선』『작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