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읽기 전에 책 뒤에 있는 ‘시인의 말’을 먼저 읽는 편이다. 시인은 독자가 시를 모두 읽은 후에 풀어볼 마지막 선물로 남겨두었을지 모르지만 어쩐지 매번 그렇게 된다. 시를 해석하기 위한 힌트를 얻기 위해서는 아니다. ‘시인의 말’과 시들이 늘 호응하지는 않으며 그래야 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거기에는 시집에 담긴 시들의 의미를 감추거나 보태거나 밀어내면서 만들어지는 긴장 같은 것이 있으며 그 둘의 관계를 읽어내는 일이 즐겁다. 그 사이에서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기도 하고 반드시 그렇지는 않기도 할 텐데, 아무려나 좋은 일이다.
황인찬의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창비, 2019)의 ‘시인의 말’에 유독 눈에 띄는 구절이 있었다. “사랑 같은 것은 그냥 아무에게나 줘버리면 된다. 이 시집을 묶으며 자주 한 생각이었다.” 첫 번째 시집 『구관조 씻기기』 (민음사, 2012)에서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무화과 숲」)을 꾸었던 시인에게 사랑은 왜 ‘사랑 같은 것’이라는 이름으로 ‘그냥 아무에게나 줘버리면’ 되는 대상이 되었을까? 그러고 보니 이번 시집에 이런 구절도 있다. “나에게 사랑은 없고, 사랑 같은 것은 사실 관심도 없지만”(「우리의 시대는 다르다」). 사랑도 없고 사랑에 관심도 없어서 그냥 아무에게나 줘버린다니. 시인의 투정일까, 아니면 반어일까.
막상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사랑에 관한 말들로 가득하다. 끝이 보이는 바다를 보다가 멀미하는 연인의 등을 두드리면서 사랑이 계속되고 있음을 실감하고(「소무의도 무의바다누리길」), 더는 못 먹는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맛있는 고기를 먹으면서 사랑을 하고(「꽃과 고기」), “어제는 무릎으로 기어가 제발 사랑해달라고 빌었다”(「You are (not) alone」)고 말하는 마음들. 연인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때로는 제발 사랑해달라고 말하는 이 마음들을 읽고 있으면 어쩐지 애틋하면서도 다행스러운 기분이 든다. 사랑이 이런 것이라면, 마음이야 절박하고 드라마틱하지만 행위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이라면, 그래서 매일 반복될 수도 있는 것이라면, 사랑은 끝나지 않고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다.
그러나 사랑을 하는 연인에게는 중단하라는 명령이 개입된다. 2017년 4월 7일 성소수자 촛불문화제라는 맥락과 함께 읽히는 시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에서 연인은 종로삼가까지 가는 택시 안에서 서로의 손을 꼭 잡는다. 그리고 아마도 성소수자를 위한 행진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청의 밤거리를 함께 걷는다. “사람 아닌 것들과 함께//사람의 거리를 걷습니다 나에게 사랑은 없고, 사랑 같은 것은 사실 관심도 없지만//사람 아닌 자가 사람의 거리를 걷는다는 기쁨만으로/즐거움과 쾌감만으로/쾌감에 중독되어버린 사람의 비참한 황홀함으로//시청에서 다시 시청까지/밤에서 다시 밤까지//이것이 그저 형편없는 시이기 때문에/이것은 사람은 안 해도 될 말” 대통령이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동성결혼은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않아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이곳에서 어떤 사람은 사람 아닌 자로 분류되고 어떤 사랑은 사랑으로 ‘동의’되지 않는다. 사랑이 뭐길래.
결국 나는 “사랑 같은 것은 그냥 아무에게나 줘버리면 된다”는 ‘시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이것은 투정이나 반어라기보다는 바람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래,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사랑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어서,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을 꿀 필요도, 너희끼리는 하지 말라고 명령 받을 일도, 온 국민의 사회적 합의를 기다릴 이유도 없었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어서, 연인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사랑해달라고 말하는 일이 평범한 일상으로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시대는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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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위한 되풀이황인찬 저 | 창비
일상의 사건들을 소재로 하면서 평범한 일상어를 날것 그대로 시어로 삼는 황인찬의 시는 늘 새롭고 희귀한 시적 경험을 선사한다. 감각의 폭과 사유의 깊이가 더욱 도드라진 이번 시집은 더욱 그러하다.
인아영(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 비평집 『문학은 위험하다』를 함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