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강화길의 새 단편집(아직 미출간)을 가제본으로 읽다가 밑줄을 박박 그었다. 별표는 3개 달았다. 작가가 2018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발표했던 「화이트 호스(white horse)」에 나오는 한 문장. “타인에 대한 판단을 끝낸 사람에게는 이런저런 설명을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작가는 비슷한 이야기를 「서우」라는 소설에도 썼다. “사람에 대한 선입견이 한번 생기면 거기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5년 전쯤인가 꽤 전문적인 심리 검사를 했다. 심리 테스트보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검사였던가? 결과는 단호했다. 나라는 사람은 타인, 즉 한 개인에 대한 평가를 잘 바꾸지 않는 성격이라고, 한 번 믿고 나면 한번 좋아하면, 쭉 믿고 쭉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결과지에 써 써있었다. 어쩔 수 없이 처절한 마음으로 동의했던 기억이다.
나는 금방 사랑에 빠지는 ‘금사빠’가 아니다. 굉장히 신중하게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한다. 나에게 실수를 했어도 악의가 없었다면, 싫어하지 않는다. 다만 좋아하진 않을 뿐, 거리감을 둘 뿐이다.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고 싶은 욕망, 나에게 잘하지 않아도 좋은 사람이라면 좋아하고 싶은 마음, 나는 이런 생각을 참 많이 하는 사람이다. 문제라면 누군가를 마냥 좋아하긴 어려운, 한 개인의 실체를 자주 목격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그 촉이 매우 발달했다는 점이다.
“사람은 이미지라니까! 다 이미지야! 내가 그를 좋아하겠다고 이미 결심해버리면 다 좋게 본다니까. 우리가 아무리 불편하다고 눈치를 줘도 소용없어. 이미 ‘좋아하겠다는’ 렌즈를 끼고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게임 오버지.” 두 친구는 내 말에 씁쓸하게 긍정했다.
내 주변에는 좋은 평판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이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좋아하는 사람들. 나는 동의하지 않는 어떤 평판. 하지만 “그 이미지, 다 허상이에요. 우리한테 이랬다니까요?”라고 말할 수 없다. 누군가를 어렵게 좋아한 그 마음을 어찌 버리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도 내가 만들어낸 단면의 페르소나가 있을 텐데, 그 페르소나로만 나를 파악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겠는가?
오싹하다. 서늘하다. 나의 실체를 못본 사람들이 나를 고평가할까 봐. 부러 하소연도 쓰고, 못난 모습도 보인다. 잘 알지 못하면서 누군가를 좋아하고 누군가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여전히 ‘잘 알고’ 좋아하고 싶은 욕망을 버리지 못하며 애면글면 살고 있다.
엄지혜
eumji0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