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지인 경희 씨(가명)가 안타까운 이야기 하나를 전해주었다. 자신에겐 존경하는 선생님이 한 분 계셨는데 긴 세월 동안 연락이 끊겼다 최근에야 이어졌다고 했다. 그런데 오해로 인해 다시 연락이 끊겼다는 것이다. 선생님도 매우 반가워하시면서 만날 약속을 잡았는데 약속 날짜와 장소를 설명하는 문자에 오타가 있어서 하루 전에 약속 장소로 나오신 거였다. 옛 제자를 만난다는 기대 속에서 여름날 힘든 여정으로 움직이셨던 터라 실망이 크셨나보다. 선생님 연세가 이미 100세에 가까우시단다. 경희 씨는 살면서 큰 의지가 되었던 정신적 지주였던 선생님과 허무하게 연락이 끊긴 것이 마음 아프다고 했다.
중요한 분이신데 왜 그렇게 오랫동안 연락을 끊었냐고 물었더니 자신에게 기대가 많았던 선생님 앞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나타날 수는 없었다고 했다. 생각만 해도 부끄러웠다는 것이다. 경희 씨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았지만,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면서 사회적으로 안정된 자리를 갖기까지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긴 과정을 우울과 두려움 속에서 외롭게 보냈다. 주변에 가족과 친구들이 없지 않음에도.
필자에게도 이전에 비슷한 분석 사례가 있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지만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고, 그 일을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분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조건뿐 아니라, 일상의 평범한 일들이 자꾸 발목을 잡아 끌었다. 문제는 그런 현실 속에서 우울증적 증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층 암울해진 상황 속에서 자꾸 움츠려 들고 외부와의 관계도 점점 단절되었다.
이런 사례들을 전하면 사람들은 흔히 그럴수록 더 기운을 내서 이런저런 활동을 하고, 가까운 사람들도 만나 위로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당신은 소중하니까. 포기하지 말고 자존감을 높이라고 한다. 그리고 찾아보면 주변에 도움을 줄 사람이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 우울감과 두려움의 밑바닥에는 앞서 경희 씨가 말했던 부끄러움, 수치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전염병이라고 할 정도로 흔해진 소위 ‘우울증’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 중에는 의외로 삶에 대한 열정이 큰 사람들이 많다.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사회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자 하는 소망을 품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 하지만 현실의 조건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경희 씨나 필자의 상담 사례와 관련해서라면 수치심을 언급할 수 있겠다.
수치심은 좀 더 다양하고 깊은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겠지만 그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깊이 뿌리박혀 있는지를 간단하게라도 되새겨보고자 한다. 그것은 강한 의지로 마음을 다잡고 기운을 북돋운다고 쉽게 물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수치심은 현대에 새롭게 나타난 감정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 늘 있어왔던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삶의 조건이 그것을 증폭하거나 다른 방식의 결과를 만들어낸다. 수치심은 ‘타인이 아는 것’과 ‘타인이 보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타인의 앎과 시선에 늘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노출이란 것이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이중화 되어 있다.
정신분석에서는 수치심이 인간의 조건과 관련된 근본적이고 무의식적인 감정이라고 한다. 프랑스 정신분석가 장-리샤르 프레이만은 무능력하고 나약한 존재로 태어난 아기가 아직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자기 주변으로 ‘움직이며 돌아다니는 거대한 덩어리들(어른들)’을 본 기억이 무의식에 남아있다고 설명한다. 그 외에도 어린아이가 성장하면서 겪는 경험 속에는 자기보다 나은 존재들과의 비교가 연속된다. 그들에 대한 선망이 크면 클수록 좌절도 커진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나약함과 결핍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어린 시절 그것은 단지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아이의 삶 자체를 위협하는 치명적인 요소이다. 그래서 그런 열등함을 감추어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 삶을 이어가는 조건이 된다. 자세히 관찰해보면 우리 사회의 많은 요소들과 디테일들은 그런 폭로를 막기 위해 고안되고 활용되어왔다. 부족함, 비어 있음, 갖고 있지 않음 등을 가릴 수 있는 장막이나 베일의 역할을 하는 것들.
하지만 현대로 넘어오면서 그런 베일들이 벗겨지기 시작한다. 초현대적인 기술 발달의 영향이 당연히 크지만 일단 여기선 접어두기로 하고, 그런 노출을 야기하는 것 중에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가치가 있음을 간과하지 않았으면 한다. 부족하다거나 갖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그저 편견에 의한 오해일 뿐이라는 생각. 말하자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 물론 이상과 가치의 수준에서 보자면 당연히 추구되어야 하는 바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문제는 현실의 한계이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 그리고 최근의 사회 양태를 보면 그런 괴리를 사라지게 하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골이 점점 더 깊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소설들은 이에 대한 저자의 경험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지옥. 작품 『부끄러움』은 어린 시절 목격한 한 사건(아버지가 어머니를 칼로 죽이려 함)이 그때까지는 그럭저럭 가려져 있던, 자기 삶의 민낯을 폭로하면서 수치심이 몸에 직접 새겨지는 경험을 이야기한다. 자신이 기숙학교의 다른 학생들이나 부모들과는 다른 계급에 속하고, 전혀 다른 세상 속에 살고 있었다는 건 새로운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모른 척 덮어둘 수 있는 한, 그것이 삶을 통째로 흔들지는 않는다. 문제는 그것이 더이상 감출 수 없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누구에게? 바로 자기 자신에게다. 자신이 그것을 보고 만 것이다.
우리는 자기 눈에 새겨진 장면을 다른 사람의 눈에서 보게 되어 있다. 또한 내 눈을 통하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보기도 한다. 나와 다른 사람의 눈엔 서로의 눈이 반사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마자린 팽조의 말처럼 “내가 내게 불법적으로 보이고”나면 우리는 존재의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 사건 이후로 아니 에르노는 “유년기 시절 무심히 지나갔던 거리를 처음으로 묘사하려다 보니 그것은 그 거리들이 내포하고 있었던 사회적 계급을 보다 명백히 드러내는 일이 되었다”고 말하고, “하루하루가 집단이나 가족의 관습, 라디오 방송에 의해 구분되는 날로 쪼개졌음”과 “우리는 싸움하지 않고 시내에 갈 때마다 정장을 하는 정상적 사람들의 범주에 더 이상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나는 사립학교, 그곳의 품위와 완벽함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부끄러움 속에 편입된 것이다”라고 고백한다. 이후 부모나 자신의 옷차림이나 말투, 거동 등 자기 삶에 속한 모든 것이 수치심을 고착 시키게 된다. “잠옷이 존재하지 않는 나의 사고 체계 속에 살면서 부끄러움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 수치심의 가장 끔찍한 측면은 아니 에르노의 말처럼 자기 혼자만이 느낀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내가 속해 있던 두 세계에 사는 사람 중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것이 된다.”
현대의 우울증엔 이런 종류의 수치심의 역할이 있다. 폭로된 수치심. 개념적으로 그리고 표면적으로 평등이 실현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다양한 방식으로 노출되게 된다. 더 많은 사람들이 묶이고 섞이게 된다. 그것 자체로는 우리가 나아갈 방향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사람들이 더 많이 비교되고, 더 많이 좌절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를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떤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면 과연 그것이 그들의 자존감이 약하거나, 사회적인 조건들에 지나친 가치를 부여해 거짓된 열등감에 시달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숙고해 보아야 한다. 사회적인 조건들은 단지 외관일 뿐이고, 그것이 인간의 진짜 가치를 높여주거나 훼손하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정말 그렇게 된다면 좋겠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은 과도기에 있는 듯이 보인다.
아니 에르노가 지식, 문화, 예의와 교양으로 이루어진, 부모와 다른 세상에 발을 디디면서 수치심이라는 홍역을 치룬 것처럼 현대사회의 우리도 모순이 되는 가치들이 공존하는 과도기를 살아내면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 속에 수치심과 그로부터 시작된 우울감이 있다.
수치심을 정신분석에서 설명하듯, 모든 인간이 필연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무의식적 작용으로 본다면, 그래서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스스로의 결핍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사회가 아직 다 성숙하지 않은 과도기에 사는 사람들로서 적어도 그것을 폭로해서 공개하지만은 않도록 서로가 애를 써주면 어떨까. 수치심에 휩싸인 사람들이 외롭게 숨을 수밖에 없는 것은 타인들이 알면 알수록, 타인들이 보면 볼수록 수치심이 깊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그것을 보거나 아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본인에게 알려주고 고쳐주려는 사람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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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련(정신분석학 박사)
한스아동청소년상담센터에서 정신분석 임상을 실천하고 있다. 『잃어버리지 못하는 아이들』을 썼고, 『자크 라캉 세미나 11』, 『정신분석』 등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