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우리 서점엔 판타지 장르 책이 거의 없다. 서점 자체가 판타지 세계이어서인지 판타지 소설에 오히려 무감하다. 세계를 쌓아 둔 서점, 그 자체가 거대한 판타지이며 오직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세상이다.
- 윤성근, 『서점의 말들』 중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이가 쓴 책방 이야기를 보다가 위 문장들이 와닿아 반복하여 읽었다. 서점에 한 세계가 쌓여 있다. 그것을 쌓은 내가 그것에 싸여 있다. 내가 만든, 나만을 포옥 품어 안고 있는 책장이 빈틈없이 벽을 메운 풍경을 상상했다. 마치 살갗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 사람의 오늘과 내일을 묶어 담은 주머니이자, 밖의 비바람에서 생과 꿈을 지켜내는 보호막이자, 다른 이와 스치고 그에 비치고 때론 베이는 표면이기도 한 살가죽으로서의 가게를 생각했다.
가게가 살갗 즉 외화(外化)된 나라는 말을, ‘나는 가게라는 몸에 들어앉아 있다’, 아니 아예 ‘나는 하나의 가게다’라는 말로 바꾸어 본다. 사는 일은 곧 나라는 상점을 꾸려나가는 일이라고 생각해 본다.
새벽을 여는 사람들 사이에 나란히 섞여
이젠 너무도 익숙한 일터의 작은 문을 연다
아주 어렸을 적을 생각하면 부푸는 마음
엄마의 걱정만큼이나 커진 괜한 책임과 성실함
희망이란 명패를 달아 나의 등에 새기고
청춘이란 굴레를 쓰네 세 평 남짓한
나의 가게 안에서
- 혹시몰라, ‘상행’ 중에서
고속도로 상행선 휴게소의 한 상점 주인 청년에게 바쳐지는 이 노래에서, 화자는 새벽 한가운데에다 작은 가게를 연다. 가게 문을 여는 일은 곧 바깥 세계를 향해 자기 자신을 부려놓는 일이다. “희망이란 명패”가 새겨진 등을 등째로 남들에게 내보이는 일이다. 부려놓은 자신을 부리기 위해 “청춘이란 굴레”를 씌우고는 가게인 나, 나란 가게를 끌며 하루를 걸어가는 일이다. 나는, 나의 가게는 길가에 던져진 채, 다른 가게들과 같이 혹은 따로 시간 속을 걷는다.
음악을 틀어놓고 무아지경으로 청소를 하다 보면 창밖에서 ‘똑똑똑’ 소리가 날 때가 있다. 지나가던 단골손님이 유리창을 두드리며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것이다. (중략) 그 순간이 나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이 이방인의 도시에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들어 온 존재에게 아주 잠시라도 작게나마 자리가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 이미연, 『카운터 일기』 중에서
다른 가게들과 같이 당당히 거리 안에 녹아 있는 듯하지만, 문장 속의 단어들이 그렇듯 여차하면 다른 가게들로 갈아 끼워질 수 있음을 생각하니 지극히 홀로이고 연약하다. 대체될 수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닦고, 내보이고, 팔면서 존재의 의미를 연장하고 확장하는 수억의 상점들 속에 수억의 ‘나’들이 들어 길 곁에 앉아 있다. 이국에서 카페 일을 하는 바리스타는 저녁 창밖을 즉 살갗을 두드리는 단골의 모습을 보며, 이 순간 도시 속에서 자신이 길가에 펼쳐내고 있는 의미를 되뇐다. 주어진 작은 자리를 어루만진다.
몇 해가 지나가고 많은 일이 있었고
여기 그 자리를 지킨 가게가 있다
도심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많은 시간들을 지켜본 곳
그 안엔 가게만큼 오래된 주인이 있다
아, 이 한결같은 사람
(중략)
그러나 왜 그라고 한결같았겠는가
아, 이 한결같은 사람
- 김목인, ‘한결같은 사람’ 중에서
세상 위로 하나의 결을 일어내며 각자의 하루하루를 경영(競泳)하듯 경영(經營)하는 우리이지만 그 모습들이 영원히 한결같을 수는 없다. 다만 하나의 결을 그려내고 또 넓혀내려 애쓰는 한에는, 스스로의 결단으로 벗어나지 않는 한에는 애쓰는 만큼 얻으며 살 수 있기를 빌며 지낼 뿐이다. 코로나 19 사태로 공연이라는 가판대가 부서진 상황에서, 음악가인 필자는 어떻게 하면 계속 애쓸 수 있을지를, 애쓰는 힘을 어떻게 잃지 않을지를 고민한다. 찾아오는 손님이 적어진 음식점 주인처럼, 어떻게 해야 사람들의 귀로 노래를 하나라도 더 배달해 돈을 벌지 궁리하고 또 궁리한다. 많은 이들이 비슷할 것이다. 쉽지 않은 시절, 모두가 각자의 몸을, 삶이라는 가게를 굴리려는 힘을 잃지 않고 거리 속에서 함께 의연하게 헤엄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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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현(뮤지션)
음악가. 1인 프로젝트 ‘생각의 여름’으로 곡을 쓰고, 이따금 글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