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언 칼럼] 천사와 괴물
여성은 광기의 경계선을 자발적으로 넘어버림으로써 울타리로부터 도망친다는 것, 평생 울타리에 머무르기보다 차라리 자신의 뇌 속에 갇히는 쪽을 선택한다.
글ㆍ사진 김용언(<미스테리아> 편집장)
2021.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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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자동인형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감정도 없는 기계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래서 제 입에서 제가 먹을 빵 조각을 빼앗기고, 제가 마실 생명수가 담긴 제 컵을 내던지는 일을 참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가난하고, 미천하고, 못생기고, 어리다고 해서 영혼도 없고 가슴도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저도 주인님 못지않게 영혼을 가지고 있고, 감정이 가득 담긴 가슴을 가지고 있습니다.”

-샬럿 브론테 『제인에어』 중에서 

19세기 중후반, 소설은 계속해서 새로워지고 분화되며 다양해졌다. 장르들은 세세하게 나뉘었고, 그저 ‘이야기’라고 모두 챙겨 읽는 것이 아니라 그중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종류의 이야기를 골라 읽는 ‘취향’의 독서가 보편화됐다. 어느 시점에는 고딕 소설이, 어느 시점에는 탐정이 등장하는 미스터리가, 또 어느 시점에는 SF가 독서 유행의 중심에 서며 픽션의 폭을 지속적으로 확장했다. 그러면서 이전까지 소설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종류의 이야기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중 영미권의 여성 작가들은 여성이 ‘집안의 천사’가 되어야 한다는 당대의 요구에 대한 반발과 분노를 적극적으로 작품 속에 표현하곤 했다. 19세기의 수많은 여성들은 착한 딸이자 상냥한 아내이자 자애로운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평생에 걸쳐 요구받았고, 여성 작가들은 그 ‘집안의 천사’들의 깃털 날개 사이에 어떤 날카로운 반항심이 숨겨져 있는지, 그 천사들이 무구한 표정 너머로 어떤 좌절감을 겪고 있는지 폭로했다.    

『작은 아씨들』의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은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가 출간된 지 약 20년 후, 『제인 에어』를 다시쓰기 하다시피 한 중편 「가면 뒤에서, 또는 여자의 능력」(『가면 뒤에서』 수록)에서 지체 높은 집안의 품위를 산산조각내는 가정교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1860~7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선정 소설(sensation novel)’ 장르―범죄가 등장하지만 탐정이 사건을 해결하는 미스터리 장르가 아니라, 범죄자/희생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사건을 실감 나게 전달하는 스릴러에 가까운 장르다―의 주요 작품으로 꼽히는 「가면 뒤에서, 또는 여자의 능력」은 대단히 인상적인 여성 악당을 창조하며 읽는 이들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다. 음모와 배신과 비밀과 욕망이 소용돌이치는, 자신이 꿈꾸던 삶을 쟁취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여성의 모험담은 지금 읽어도 놀랄 만큼 강렬하다. 



주인공 진 뮤어가 악당이라는 것은 초반부터 즉각 드러난다. 코번트리 집안의 어린 딸 벨라의 새 가정교사로 고용된 진은, 도착하자마자 병약하고 불평 많은 코번트리 부인과 순진한 벨라, 두 아들 제럴드와 에드워드, 그들의 사촌 루시아 앞에서 가차 없는 품평을 듣고 이것저것 해보라는 (그리하여 너에게 돈을 지불할 가치가 있는지 이 자리에서 입증해 보이라는) 요구사항에 응한다. 창백하고 수수한 진은 코번트리 집안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온화하고 가정적인 재능”을 내보이며 호감을 산다. 그리고 겨우 그들로부터 풀려나 자신의 새로운 처소에 들어서게 됐을 때, 진은 중얼거린다. 

“자, 이제 막이 내려갔으니 몇 시간은 내가 되어도 괜찮겠지. 여배우가 자신이 된다는 게 가능한 일이라면 말이지만.”

얼굴에 바른 연지를 닦아내고 머리채도 풀고 “진주처럼 반짝이는 이를 몇 개 뽑아내고 드레스까지 벗자 진짜 그녀, 초라하고 지쳐빠진, 적어도 서른 살은 되어 보이는 음침한 그녀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 혼자 남겨지자 그녀의 풍부한 표정이며 몸짓은 삶에 지친 사람의 고단하고 스산하며 생기 없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재능 있고 똑똑하지만 의지가지할 데 없는 가난한 젊은 여성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었던 가정교사는, 그만큼 고용주에게 있어 부리기 쉽고 요구할 것은 많으며 동시에 무시하기 좋았던 ‘아랫사람’이었다. 하인은 아니지만 주인 집안의 계층에도 섞이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홀로 늙어갈 수밖에 없던 독신 여성이 바로 이 시대 가정교사 대부분의 초상이었다. 

하지만 진 뮤어는 사람들의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진의 등장과 함께 평화롭고 권태롭기만 하던 코번트리 집안에 돌연 긴장과 설렘과 의혹이 감돌기 시작한다. 그는 코번트리 집안 사람들 각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존재에 정확한 ‘맞춤형’으로 연기하며 그들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출생의 비밀을 감춘 고귀한 여성, 아름다운 꽃다발과 맛있는 차를 만들 줄 아는 젊은 안주인 등으로 순식간에 휙휙 가면을 바꾸는 것이다. 혼자 강심제(일종의 마약)를 들이키며 “여자의 의지와 지략이 무력한 게 아니라면 이번에는 다시 실패하지 않을 테다!”라고 맹세한 뒤 그와 같은 ‘연기’의 삶이 얼마나 지치고 짜증스러운 것인지 웅변하며 쓰러져 잠들고는, 다음 날 아침 다시 꼭두새벽부터 꽃단장을 마치고 집안 곳곳을 누비며 밝고 화사한 분위기를 불어넣는 그의 모습은 이 모든 가부장제의 요구와 억압이 실로 우스꽝스럽고 부자연스러운 것임을 드러낸다. 즉 여성스러운 것, 여성적인 것, 여성이 그래야만 한다고 이야기되는 것들을 모두 (과장되게) 체현하면서, 그 과도한 여성스러움이 어느 순간 ‘괴물’이 될 수 있음을 입증한다. 



샬롯 퍼킨스 길먼의 단편 「누런 벽지」(『실크 스타킹 한 켤레』 수록)의 경우 고딕 호러와 페미니즘의 명백한 결합으로 연구되어온 작품이다. 「가면 뒤에서, 또는 여자의 능력」의 진 뮤어가 세상에 대한 분노를 안락한 보상으로 대체하기 위한 계략에 전력을 기울였다면, 「누런 벽지」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화자는 ‘집안의 천사’에 대한 기대를 견디지 못한 여성이 또 다른 방식으로 어떤 ‘괴물’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진 뮤어가 외부와의 투쟁을 나름대로 공들여 진행하며 ‘지체 높은 바보들’을 향한 조롱의 퍼포먼스를 쉼 없이 상연하는 인물이었다면, 「누런 벽지」의 화자는 투쟁의 무대를 내면으로 옮겨놓으며 끝없이 후퇴함으로써 세상과의 단절을 선언한다. 

화자는 의사 남편과 함께 시골 저택에 요양 왔다. 전문가의 위치를 획득한 남편은 아내가 “일시적인 신경과민성 우울증-약간의 히스테리 경향-이라고 장담”하며 “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일’을 하는 건 절대 금지”라고 선언한다. 아내는 그저 약을 챙겨 먹고 가벼운 운동을 하고 잘 먹고 잘 자면 된다. “존은 무척이나 세심하고 사랑이 넘쳐서 자신의 특별한 지시 없이는 내가 꼼짝도 못하게 한다. (…) 그런 그의 수고를 높이 사지 않으면 내가 너무 배은망덕한 인간으로 느껴진다.”



방 밖으로 나가기보다 방에 머물며 잘 쉬라는 진단 때문에, 화자는 거의 계속 방안에 틀어박혀 누렇게 바랜 괴상한 벽지를 노려본다. “벽지에는 부러진 목처럼 축 늘어진 무늬와 툭 튀어나온 두 눈이 거꾸로 노려보는 모양이 반복되는 부분이 있다.” 이 벽지 속 무늬는 한없이 뻗어 나가다가 갑자기 전혀 다른 방향으로 틀고, 어떤 규칙도 없이 제멋대로 움직이면서 보는 이들에게 불안한 동요를 일으킨다. 화자는 점점 이 벽지 아래에 또 다른 벽지가 발라져 있다고 생각하고, 아래 벽지에 그려진 어떤 형체가 점점 뚜렷한 모습을 갖춰간다고 확신한다. 그건 어떤 여자다. 그 여자는 낮에는 숨을 죽이고 꼼짝 안 하다가 밤이 되면 벽지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겉 벽지의 무늬가 창살이라도 된 것처럼 마구 흔든다.

「누런 벽지」 마지막 장면의 싸늘한 전환은, 아마 당대 독자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안겨주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집안에만, 남편이 제공하는 안락한 울타리 안에만 머무르기를 강요당하던 여성이 결국엔 그 울타리가 제공하는 환상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부당한 것이었는지 깨닫는다. 그리하여 여성은 광기의 경계선을 자발적으로 넘어버림으로써 울타리로부터 도망친다는 것, 평생 울타리에 머무르기보다 차라리 자신의 뇌 속에 갇히는 쪽을 선택한다. 자신이 원하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누리기가 불가능하다면, ‘인간이 아닌 무언가’의 상태로 적극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루이자 메이 올컷의 「가면 뒤에서, 또는 여자의 능력」과 샬럿 퍼킨스 길먼의 「누런 벽지」 모두 그렇게, 우아하게 소름 끼치는 결말을 맞는다. 자신들이 기대했던 아름답고 유순하고 정상적인 여성이 아니라 순식간에 낯설게 변해버린 존재를 마주했을 때 경악과 분노과 공포를 금치 못하는 시선 앞에서, 각각의 주인공들은 태연하게 반문한다.   


“마지막 장면이 첫 번째 장면보다 낫지 않은가요?” (「가면 뒤에서, 또는 여자의 능력」)

“그런데 저 남자가 왜 기절을 했지?”(「누런 벽지」)



실크 스타킹 한 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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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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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자 메이 올컷 저 | 서정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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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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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8

소개해주신 책이 다 흥미롭지만 저는 가면 뒤에서가 가장 끌리네요.
본모습을 감추고 상대에 따라 이상적인 사람을 연기하면서 여러 개의 가면을 썼다, 벗었다 하는 모습이 기괴하면서도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어요.
주인공 정도는 아니지만, 사회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사회생활용 가면을 많이 쓰잖아요. 저 또한 원래 성격이랑 다른 사회생활용 가면을 쓰고 다니거든요. 잔뜩 지쳐서 집에 와서 씻고, 짬이 좀 생기면 현타가 올 때가 있는데 주인공이 자신의 처소에서 본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 꼭 현타가 온 제 모습 같아서 공감이 갔네요.
초반부터 주인공이 악당이라는 것이 드러난다고 하는데 제가 쭉 읽어본 바로는 악당으로 느껴지지 않아서 직접 읽어보고 판단하고 싶어요. 간만에 흥미로운 책을 만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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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k10230

2021.04.28

그 당시 소설들이 현대 소설 기법들이 등장하던 시발점이라고들 하는데 이런 해석도 가능하군요. 덕분에 다른 소설들에는 어느 장치가 숨어있나 흥미가 생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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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am

2021.04.28

재능 있고 똑똑하지만 의지가지할 데 없는
의지할 데 없는 아닌가요?
(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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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언(<미스테리아> 편집장)

미스터리 전문지 『미스테리아』 편집장. 『범죄소설』, 『문학소녀』 등을 썼고, 『코난 도일을 읽는 밤』, 『죽이는 책』 등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