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아은의 인생책] ‘신의 딸’에게 사랑받았던 남자의 일생 - 『장성택의 길』
『장성택의 길』의 미덕은 사적영역인 로맨스와 공적영역인 정치를 근사한 비율로 섞어 흡입력 있게 보여주는 데 있다.
글ㆍ사진 정아은(소설가)
2021.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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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으로 어학연수를 갔던 20대의 일이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에게 휩싸여 지내던 어느 날, 이런 질문이 날아왔다. “넌 노스 코리아에서 왔니? 사우스 코리아에서 왔니?”  들어본 적이 없던 질문에 당황했던 나는 “여기에 온 거 보면 모르겠어? 당연히 사우스에서 왔지!” 라고 퉁명스레 대꾸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치기어린 자존심 때문이었으리라. 내가 북한에서 온 걸로 보인다고? 국민들이 굶든 말든 제 영달만 추구하는 독재자가 통치하는 나라에서 온 걸로 보인다고?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고, ‘잘 사는 나라의 국민’이라는 데 자부심을 가졌던, 철없고 편협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 뒤로도 자주 비슷한 질문을 받았다. “노스 코리아 사람들하고 만나본 적이 있느냐? 노스 코리아에 가본 적이 있느냐? 혹시 그곳에 남아 있는 친인척이 있느냐?” 호기심으로 점철된 질문들에 응수하면서 나는 알았다. 내부에 있는 이들은 북한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으며 살아가지만 외부인들은 ‘한국인’을 늘 북한과 묶어서 생각한다는 걸. 외부인들에게 코리안은 노스 코리안이나 사우스 코리안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걸. 

숨겨 놓았던 언니나 동생을 만난 느낌이었다. 나와 피를 나눈 동기 간이 이 세상 어디엔가 있었고, 나를 제외한 모두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시종일관 내가 그 동기간과 비교 당해왔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알게 된 듯한 느낌. 반공 교육을 받으며 자란 1970년대생에게, 반공 포스터 그리기 대회에서 적대감이 넘쳐나는 그림을 그려 상을 받은 경험이 있는 우물 안 영혼에게, 북한이 실은 대한민국과 동기간이며, 대한민국을 이루는 많은 부분이 북한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 전에도 물론 교과서를 통해 북한이 우리의 주적임과 동시에 동기간이라는 개념을 마르고 닳도록 배웠다. 그러나 그런 말들은 그다지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서 북한은 그저 이상하고 괴물 같은 나라, 나와는 별 관련이 없는 머나먼 이국이었다. 한반도 북쪽 땅에 대한 고정관념을 크게 뒤흔들어 놓은 외국체류 경험 덕에, 북한은 내게 뜨거운 화두가 됐다. 그 후로 나는 북한과 관련된 모든 종류의 인쇄물을 읽었고, 영상을 보았으며, 전해오는 이야기에 커다랗게 귀를 벌렸다.



라종일의 『장성택의 길』은 그렇게 만났던 수많은 북한 관련 책들 중 하나이다. 관련 분야에 종사했던 사람이 쓴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구해서 읽었다. 막상 구해서 펼쳐든 책은, 예상과 달랐다. 북한 관련 정세와 권력의 흐름을 보여주는 정치 에세이일 거라 생각했던 그 책은 정치물이라기보다 로맨스물이었고, 역사 평설이었으며,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비범한 인물에 대한 문학적인 평전이었다. 

책은 장성택이 김일성의 딸에게 폭풍 같은 사랑을 받았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장성택이라는 뛰어난 인재가 당시 북한의 ‘인신’이던 수령의 딸의 눈에 들면서 갑작스레 권부의 핵심으로 들어가게 되는 과정을, 그 과정에서 맞게 되는 희로애락을,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시선을 곁들이며 유려하게 그려나간다. 장성택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조명하되, 그의 인생 한순간에 찾아온 사랑에 초점을 두고 그 여파를 중심으로 그려나가는 것이다. 딱딱할 거라 생각했던 책에서 갑자기 달달한 로맨스가 튀어나왔을 때의 놀라움이란! 북한 관련 이야기만 해주어도 감읍하며 읽을 참인데 애정사라니, 와우, 내게는 그보다 더 흥미로운 조합이 있을 수 없었다.

장성택은 준수한 외모에 지성과 언변, 흥을 즐길 줄 아는 끼를 타고난 인물이었다. 그가 참가한 자리는 어디든 웃음꽃이 피어났고, 생기 넘쳤으며, 그와 만난 이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호감을 품었다. 동성인 남성은 물론이고 이성인 여성에게도 인기가 있었던 장성택은 급기야 ‘위대한 어버이 수령’의 딸인 김경희의 사랑을 받기에 이른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융단 폭격에 가까운 수준의 사랑을. 왕조시대의 왕보다 더한 절대 권력을 가진 북한 일인자의 여식이 쏟아내는 활화산 같은 사랑을, 그는 피해가지 못했다. 

한반도 북녘에서 김일성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던 김경희는 반대하는 아버지의 뜻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가 유배 보낸 장성택을 찾아 평양에서 원산까지,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험준한 마식령을 넘어 매 주말마다 찾아간다. 한 인간의 깊은 내면에서 분출하는 활화산 같은 사랑은 마침내 부친의 의지를 꺾고, 오빠인 김정일을 제 편으로 만들어, 김경희는 마침내 장성택을 배우자로 삼는데 성공한다. 그렇게 장성택은 김일성 일가에 발을 걸치면서 급속히 권부로 편입해 들어가게 된다. 

그는 평생 동안 2인자로 살면서 권부의 핵심에 섰다가, 한순간 1인자의 눈 밖에 나서 ‘혁명화’에 처해졌다가, 다시 권부로 돌아오는 패턴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혁명화’는 남한을 비롯한 전세계 언론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된 비참한 죽음이었다. 어린 처조카에 의해 잔인하게 총살형을 당해 시신조차 찾지 못하게 되는 마지막을 맞는 것. 그리고 작가는 말한다. 장성택의 운명은 김경희의 눈에 들었던 젊은 날부터 일찌감치 예정되어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여러 국가기관들에 소속되어 일한 뒤 주영대사와 주일대사를 지냈던 저자가 풀어놓는 이야기 보따리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권력’이라는 덩치 큰 짐승에게 성큼 다가서는 느낌을 받게 된다. ‘아마도 힘이 세겠지’ 정도로만 생각했던 짐승이 얼마나 잔인하고 매정하며 조금의 인간미도 허용하지 않는지, 몸서리치며 실감하게 된다. 책은 그런 권력의 문지방에 서서 그 안쪽에도, 바깥에도, 완전히 자리 잡지 못했던 한 사람의 극적인 일생을 조명한다. 또한 권력의 심장부에서 한 평생을 보낸 김정일, 김정은 부자의 비극도 또렷하게 보여준다. 정통성 없이 권좌에 오른 인물이 겪게 되는 내면의 황폐화와 끝없는 불안을, 국제정세와 북한 내부정세라는 큰 그림과 함께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게 묘파해낸다. 

분량은 주로 장성택이 한참 활동하던 시절, 서로 좋은 합을 이루었던 김정일과 장성택에게 할애된다. 보기 좋은 외모와 풍채로 대중에게 신화로 군림했던 아버지와 달리 김정일은 스스로 ‘난쟁이 똥자루’같다고 말할 정도로 외모가 볼품없었다. 또한 독립운동이라는 뚜렷한 업적이 있었던 아버지와 달리 권좌에 대한 알리바이로 내세울만한 과거가 없었다. 거기에 국제 정세까지 나빠져, 김정일이 물려받은 나라는 사회주의 국가들로부터도 고립된 채 지상의 최빈국으로 전락하는 중이었다. 수많은 국민이 아사하는 빈한한 국가에서 혈연을 이유로 물려받은 권좌를 지켜내는 것은 녹록한 일이 아니었고, 그 어려운 일을 해내야 하는 김정일에게 장성택이라는 걸출한 인물은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었다. 용모, 능력, 인간미 등 여러 측면에서, 장성택은 김정일이 갖고 있지 않은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을 하나밖에 없는 누이의 배필로 삼아 측근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김정일에게 할애된 최고의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 

북한이라는 가깝고도 먼 나라의 권부에 있었던 이들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상황을 개연성 있게 그려낸 이 책을 읽다보면 독자는 세상에 독재자만큼 불행한 인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책 전반에 걸쳐 북한을 탈출해 다른 나라로 망명하는 김정일 측근들의 이야기가 계속 흘러나오는데, 이것만 보아도 독재자인 김정일이 얼마나 외롭고 가엾은 인간이었는지가 가늠된다. 독재자는 자신이 아닌 사람과 마음을 나눌 수 없다. 세상 누구에게서도 ‘진심어린 마음’을 받을 수 없다. 독재자가 손에 쥔 권력이 정당하지 않기에, 지상에서 누리는 권위가 하나같이 도둑질에 기반한 것이기에,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악취와 추악함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인간의 얼굴을 한 누구도 독재자에게 진짜 마음을 줄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 내가 아닌 다른 존엄한 생명체의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마음을 받는 것만큼 가슴 벅찬 일이 또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권력을 탐내거나 부에 집착하는 것도 기실, 그러한 조건을 달성하면 따라오리라 예상되는 타인의 ‘마음’을 획득하기 위한 것일 뿐, 권력과 부 자체에는 인간의 마음을 저릿하게 하는 행복 유발 요인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독재자는 이러한 기쁨, 즉 타인과 마음을 주고받는 기적적인 행위에서 철저히 열외가 된다. 과거에도 열외였고, 현재에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영원히, 제 영혼 안에 고립되어,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며 매분 매초를 살다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이 책은 그러한 독재자의 상황을, 독재자와 그 주위 영혼들이 괴기스럽게 변해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장성택의 길』의 미덕은 사적 영역인 로맨스와 공적영역인 정치를 근사한 비율로 섞어 흡입력 있게 보여주는 데 있다. 북한이라는 국가, 탄생의 순간부터 대한민국과 밀접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던 동기간이자 주적인 나라가 걸어온 길을 김정일 일가와 그 주변인물들을 통해 거시적이면서도 세세하게 그려낸다. 

마지막 쪽에서 작가는 장성택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뒤 북한에서 돌았던 소문을 소개한다. 당시 북한 주민들은 장성택이 실은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며, 김경희는 이미 죽었다고 숙덕거렸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한순간 아연해졌는데, 그것이 능력 있고 총명했지만 부당하게 희생을 당한 이와, 수령의 딸로 태어난 것 외엔 별다른 능력을 갖고 있지 않았던 인물에 대해 사람들이 품었던 내밀한 바람이었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소문의 발원지가 부당한 일을 바로잡으려는 소망일 때도 있지 않은가. 

극적인 소문을 소개한 뒤 작가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에 관한 기억은 그가 지은 건물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의 인간성과 정열, 남자다운 매력, 낭만과 로맨스 그리고 마지막까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주변을 위해 무엇인가 이루려 했던 노력들을 기억할 것”이라고.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북한이라는 황폐한 국가의 권부에서 제한적으로라도 무언가 해보려는 의지를 가졌던 한 인물을 조명하려는 의도의 산물이었다. ‘신의 딸’에게 간택되는 순간부터 비극적인 말로를 예약해 놓은 셈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 내장된 강점을 활용해 저와 제 주변 사람들을, 제가 속한 공동체를 바꾸기 위해 용썼던 한 유한한 인간의 행적을 기리는 헌사였다. 

 


장성택의 길
장성택의 길
라종일 저
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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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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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30

로맨스와 정치가 공존한다니 대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요. 제목만 봐서는 로맨스의 ㄹ도 없을 것 같은데 말이죠.
책 제목처럼 장성택이라는 사람의 인생을 활자의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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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k10230

2021.05.30

예전에 장성택의 잔인한 처형 소식을 뉴스로 접했을 때에는 세상에 이렇게 끔찍한 일이 21세기에 있을수있나 싶어 두렵기만 했는데 이글을보니 어려모로 복잡미묘한 관계와 가정이 있었군요. 우리가 그 자세한 내막을 알수있는 길은 당장 없겠지만 언젠가 자유로운 왕래와 정보공개가 허용된다면 그 진실이 무언인지 확인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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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hk322

2021.05.30

뭐 권력이라는 것이 자신을 부유하고 만들어주는 동시에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양면성을 지닌 존재지요. 장성택 역시 그 마수를 피할수 없었던 것 뿐이고요. 장성택이 북한이라는 감옥에서 무언가를 바꿔볼 불씨가 될수 있었다는 관점은 신선하지만 그 역시 부당한 권력을 실컷 누릴만큼 누렸으니 그의 최후에는 인생무상 외에는 별다른 감정이 떠오르질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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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은(소설가)

장편 소설『잠실동 사람들』등과 에세이 『엄마의 독서』,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