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다은의 엉뚱한 장면 : 작품의 완성도 혹은 작품 전체에 대한 감상과는 무관하게 특정 장면이 엉뚱하게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그 순간은 대개 영화의 큰 줄기에서 벗어난 지엽적인 장면이 관람자의 사적인 경험을 건드릴 때 일어나는 것 같다. 영화의 맥락에 구애받지 않은 채, 한 장면에서 시작된 단상을 자유롭게 뻗어가 보려고 한다. |
한밤의 거리가 술에 잔뜩 취한 중년 남자들로 시끌벅적하다. 그들은 한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들이지만, 지금은 철없는 어린애들 같다. 비틀거리며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걷기도 하고 그 광경에 함께 낄낄대기도 하고 용쓰며 힘을 겨뤄보기도 한다. 바로 앞선 장면에서 이들이 ‘혈중알코올농도 0.05 퍼센트 가설’(인간을 좀 더 느긋하고 개방적이며 대담하게 만든다는 혈중알코올농도)을 논하며 토로하던 일상의 권태감과 비루함은 오간 데 없다. 어둠 속에서 그들은 의미 없는 몸짓만으로 그저 신난 상태다. 토마스 빈터베르의 <어나더 라운드> 도입부에 등장하는 이 짧은 대목은 술기운에 젖어도 삶의 그림자를 떨쳐내지 못하는 다른 장면들과 달리 깃털처럼 가볍다. 네 사람이 다시는 되돌아가지 못할 쾌활하고 천진하게 술 취한 밤. 이 밤은 어째서 사라지고 만 것일까.
이 영화의 비극은 엄밀히 말해 술 자체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술은 ‘적당히’ 마셔야 한다는 당연한 말을 ‘당연히’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탓할 일도 아니다. 문제는 “알코올 섭취가 최적의 직업적, 사회적 수행 능력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논리다. 이들은 이 견해에 심취해 자신들의 육체를 걸어본다. 술꾼들이 중독을 합리화하기 위해 동원한 말장난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 주장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 술을 생산력과 결부시키며 술의 생산성을 기대하는 태도. 그러니까 술을 통해 무언가를 ‘하려는’ 자세. 이것이 이들을 나락으로 몬 진짜 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술의 진정한 효용이란 아무런 효용이 없다는 데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왜 떳떳하게 향유하지 못했을까.
물론 알코올 기운으로 생산력을 고무하는 사례는 낯설지 않다. 특히 예술가들이 술 마신 채 작품을 창작했다는 이야기에는 어쩐지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구석마저 있다.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쓴 소설, 알코올에 고양돼 녹음한 음악, 술 마시며 행한 연기, 술에 취한 붓질로 완성한 그림. 나 또한 술과 창작의 필연적인 고리를 과시하는, 일견 허세 섞인 각양각색의 전설(?)들에 흥미를 느끼지만, 솔직히 술과 생산력의 긴밀한 관계를 믿지 못한다. 그런 경험이 없다는 게 정확한 말이겠다. 몇몇 동종업계 종사자들로부터 알코올로 말랑말랑해진 마음이 막힌 글을 술술 풀리게 한다는 고백을 들은 적은 있지만, 불행히도 내게는 통하지 않는 방법이라는 걸 안다.
요컨대 이런 경험은 요즘도 한다. 도무지 글의 진도가 나가지 않아(아무리 엉덩이 힘으로 버텨도 안 되는 날은 그냥 안 되는 거다) 다 접고 술이나 마시던 중, 갑자기, 의도치 않게, 기막힌 문장들이 떠오르는 순간. 마치 천재가 된 기분으로 그 문장들을 메모하며 의기양양해진다. 그러나 다음날 술에서 깨어 보면 그중에 쓸만한 문장은커녕, 아이디어 부스러기도 없다. 젠체하며 휘갈긴 필체와 자기연민으로 낯뜨거운 문장들에 기가 찰 뿐이다. 그럴 때는 인정한다. 알코올을 장작으로 삼아 예술혼을 불태우는 대신, 그저 마감 후 맥주가 목을 타고 넘어갈 순간만 고대하며 말짱한 정신으로 일과를 버티는 나는 역시나 예술가는 결코 못 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어나더 라운드> 속 중년들이 짠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그들이 알코올의 힘을 빌려서까지 여전히 자신의 생산력에 대한 환상을 체념하지 못해서다. 그러나 학교라는 제도 안에서 합리와 이성과 규율로 점철된 노동의 시간을 반복해온 그들에게 정작 필요한 건 에너지를 비축하고 생산하는 일이 아니라, 말끔히 소모하는 일이다. 제대로 버려야 제대로 다시 채울 수 있다. 수면이, 운동이, 연애가 노동의 시간과 단절하는 방법이 되듯, 술에도 그 힘이 있다. 네 남자는 안타깝게도 자신의 일상에 술이 절실한 이유를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것이다. “알코올 섭취가 최적의 직업적, 사회적 수행 능력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주장 대신, ‘알코올 섭취가 일상의 긴장을 완전히 텅 빈 상태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말을 신봉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술은 무엇에도 쓸모없으므로, 바로 그 이유로 마시는 액체라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였다면 적어도 소박하게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규칙적으로 술 마시는 사람들이 나오는 영화에는 일단 호의를 갖는 편이지만, 그중에서도 <패터슨>(2016, 짐 자무시) 속 패터슨의 일과는 언제 떠올려도 좀 뭉클하다. 그는 낮에는 버스를 운전하고 시를 쓰고 밤에는 강아지와 산책하다 어김없이 혼자 바에 들러 무표정한 얼굴로 맥주를 마신다. 근면한 노동 후 그 노동의 잔상을 완전히 털어버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의미를 차단하고 비우는 그 시간의 패턴과 태도가 있기에 다음 날 아침이 다시 밝는다. 늘 과음에 허우적대는 음주자들에게 이처럼 산뜻하고 우아하게 반복되는 알코올의 시간은 어쩌면 영화에서만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술꾼들에게는 이 환상이 술에서 생산력을 찾는 환상보다 훨씬 더 청명하고 무엇보다 이롭다.
‘생산적인 술.’ 돌이켜보면 20대의 내가 연애할 때마다 피로할 정도로 상대에게 강조하던 ‘발전적인 연애’라는 말 만큼이나 어딘지 강박적이고 억지스러운 조합의 말이다. 사랑이 무슨 진화하는 유기체도 아니고. 술이 무슨 자동차 휘발유도 아니고. 술 영화를 논하다가 뜬금없이 웬 부끄러운 고백인가 싶지만, 요지는 이거다. '생산'이나 '발전' 같은 뻣뻣한 말로 머리를 굴리며 허비해서는 안 되는, 그저 본능적으로 충실히 소모하며 지켜야 하는 어떤 세계도 있다. 사랑은 그냥 하라고, 술은 그냥 마시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너무도 명쾌하고 단순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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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은(영화평론가, 매거진 필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