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팡이처럼 감각할 수 있다면
지난겨울에는 잠들기 전마다 곰팡이에 대한 책을 읽었다.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라는 책이었다. 읽다 잠들고, 읽다 잠들고 하다보니 464쪽을 읽는 데 한 달이 걸렸다. 오해할까봐 덧붙이자면 나는 이 책을 정말 좋아했다. 밑줄을 수백 번은 긋고 독서노트를 따로 만들어 문장들을 옮겨 적었다. 특별히 좋았던 책에만 붙이는 별표도 다이어리에 붙였다. 곰팡이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인간사의 여러 복잡한 문제가 잊히므로, 책을 읽으며 평화로워진 기분으로 잠들기 좋았을 뿐.
정해진 출퇴근이 없는 프리랜서에게 제때 잠드는 일은 중요한 문제다. 원한다면 매일매일 새벽 다섯 시에 잠들 수도 있지만, 그러면 언젠가 큰 대가를 치르고 만다. 올빼미 생활을 하다가 정신 차리기를 여러 번, 이제는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늦어도 새벽 두 시에는 작업실에서 퇴근할 것. 잠들기 전 휴대폰은 ‘포레스트’ 앱을 켜고 저 멀리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둘 것. 가만히 누워 있는 게 따분하다면 차라리 책을 읽을 것.
그러다보니 주로 잠들기 전에만 읽는 책이 생겼다. 선정 조건은 꽤 엄격하다. 일단, 너무 흥미진진해서 책장을 덮을 수 없는 책은 안 된다. 해가 뜨기 전에는 잠을 자야 하니까. 하지만 너무 재미없는 책도 곤란하다. 조금의 흥미조차 끌지 못하면 휴대폰을 멀리 두겠다는 원칙이 산산조각 나므로(원칙이라는 게 이렇게 부실하다니……). 따라서 적당히 흥미롭고 적당히 다음 내용이 궁금한, 중간에 덮고 다음 날 다시 열어도 얼마든지 이어 읽기 좋은 책들 ― 대개 과학이나 인문사회 분야의 논픽션―이 최적이다. 종이책보다는 전자책을 주로 고른다. 자꾸 그림자가 지는 독서등을 이리저리 비춰볼 필요도 없고, 밑줄을 잔뜩 긋기도 편하다. 곰팡이에 대한 책은 적당히 흥미로우면서도 가만히 다음 날을 약속하기에도 좋은, 최고의 수면 메이트였던 셈이다.
다시 곰팡이 얘기로 돌아가자면, 작년 여름에 우연히 <환상의 버섯>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것이 몇 달간 이어진 곰팡이 탐구의 시작이었다. 버섯, 정확히는 균류가 내레이션의 주인공인 이 다큐멘터리는 지구 어디에나 존재하는 곰팡이와 버섯들, 그들의 생태적 역할을 소개한다. 그런데 도중에 갑자기 초점이 바뀌어서, 환각버섯을 먹고 초월적인 체험을 했다는 간증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환각버섯을 찬양하다시피 하는, 약간의 광기 어린 다큐멘터리의 후반부는 좀 당황스러웠지만 그 앞의 균류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진진했다.
다큐멘터리를 흡족하게 보고는 언젠가 곰팡이가 세상을 지배하는 이야기를 써봐야지, 마음먹던 차에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를 알게 됐다. 독서인들의 흔한 패턴대로 일단 책을 사자 약간 흥미를 잃어 읽기를 미루려다가, 유튜브에서 책의 저자 멀린 셸드레이크가 출간된 자신의 책에 버섯을 키워서 요리해 먹는 영상을 보았다. 멀린, 당신은 진정한 버섯 애호가로군요. 균류 전문가들은 다 어딘가 좀 이상한 것인가. 균류의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나. 기대감을 품고 독서를 시작했다.
곰팡이는 여러모로 우리의 이해 범주를 넘어서는 존재다. 우리 인간은 개체성을 중시하며 각자의 뇌를 애지중지하는 반면, 곰팡이에게는 개체성도 없고 뇌도 없다. 곰팡이는 그물망 같은 가닥을 이루며 부분 부분 떨어져 있지만 또 전체로 연결되어 있고, 뇌와 심장 같은 중심이 없는데도 이상하게도 지능 비슷한 것을 지녔다. 단일한 개체라는 개념을 무너뜨리는 특성이 계속해서 관찰된다. 계속해서 끝에서 갈라지고 또 갈라지면서 땅속으로 퍼져나가는 서로 연결된 균사체 네트워크는, 집단일까 아니면 하나일까? 통제 기관이 없는 곰팡이가 대체 어떻게 네트워크 안에서 서로 신호를 보내고, 커뮤니케이션하고, 외부 환경을 구분하고 감각하는 것처럼 보일까? 아직은 잘 모른다. 겨우 이 년 전 출간된 이 책은 그에 대한 여러 가설을 소개해주면서도 사실은 우리가 아직 곰팡이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아는 것이 별로 없다고 인정한다. 이 년이 지난 지금도 그다지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원제 『Entangled Life(뒤얽힌 생명)』는 이 책의 중심 주제를 좀 더 분명하게 보여준다. 식물-곰팡이, 인간-미생물, 조류-균류의 공생체인 지의류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서로 뒤얽혀 있는 생물들, 어쩌면 그 관계 자체가 핵심이다. 특히 지의류는 생물에 대한 통념을 뒤집는 존재다. 지의류는 곰팡이와 조류(algae) 또는 박테리아의 공생체로, 분류학적으로는 거리가 먼 유기체가 한데 얽혀 생겨났다. 원래 따로는 광합성을 하거나 바위를 뚫거나 할 수 없었던 생물들이 공생을 통해 새로운 기능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지의류라는 이 생물이 완전히 없던 형태의 삶은 아니다. 인간의 몸에 공생하는 박테리아는 몸 자체를 이루는 세포 수보다 훨씬 더 많다. 박테리아는 몸 안에 작은 바이러스를 갖고 있고, 그 바이러스는 또 안에 더 작은 바이러스를 갖고 있다. 숲에서 식물들의 뿌리는 대부분 존재하지 않으며 늘 곰팡이와 뒤얽힌 균근을 가진다. 이때 인간과 박테리아를,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를, 식물과 곰팡이를 엄밀하게 분리해 각각의 개체로 다루는 것이 가능할까. 공생이 자연의 중심 원리라면, 개체는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서 끝나는 것일까. 이런 연구를 하던 과학자들도 꽤나 혼란을 겪었는지 결론은 기이한 질문 앞에 다다른다. 우리가 현대성의 상징으로 믿어온 ‘개인’, 개체성이라는 것이 실은 명확하게 존재한 적 없었다면?
자, 이제 우리는 무엇으로 정의될 수 있을까? 아니면 이 모든 정의가 전부 적용될까? (중략) 사이보그cyborg가 살아 있는 유기체와 기술적 장치의 융합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다른 모든 생명 형태처럼 심보그symborg, 또는 공생적 유기체symbiotic organism다. 생명을 공생의 관점에서 본 한 독창적인 논문의 저자들은 이 점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표명했다. 그들은 이렇게 선언했다.
"개체는 존재했던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의류입니다."
_멀린 셸드레이크, 「낯선 자의 친밀함 – 개체는 존재한 적이 없다」,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 김은영 옮김, 아날로그, 2021.
나는 이 책이 철저히 인간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책이어서 좋았다. 약간은 아쉽지만 다른 많은 자연과학 책들이, 자연의 놀라운 현상이나 원리에서 인간적 교훈을 추출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곰팡이뿌리에서의 식물과 균류 사이 공생 관계를 살펴보고는, ‘자연이 공생으로 유지되는 것처럼 인간 사회도 공생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교훈을 도출한다던가 하는 식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너무 중요한 존재로 여기는 나머지, 별들이 주인공인 것이 분명한 밤하늘을 보면서도 인간을 생각하고, 개성 넘치는 생물로 가득한 심해를 보면서도 인간을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은 ‘공생은 어디에나 있다’라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쉽게 인간적 교훈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공생을 통해 우리에게 마음 따뜻해지는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고집해왔던 범주를 내려놓고, 우리의 통념을 무너뜨려야만 그들을 겨우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한참 하다보니, 데뷔한 이후로 꾸준히 들어왔던 말 하나가 떠올랐다.
“이 소설은 결국 인간 이야기다.”
결국 인간 이야기. 요즘 과학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꽤 자주 듣는 일종의 칭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과학 용어가 많이 나오고, 차가운 기술 이야기 같지만, 결국은 이 소설도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고. 대개 SF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다른 독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혹은 SF라는 장르에 편견을 가지고 읽었던 독자들이 ‘의외로 좋았다’라는 의미에서 쓰는 표현이기에 나도 대체로 ‘좋은 말’로 생각하는 편이다. 영화 <인터스텔라>가 웜홀이니 상대성 이론이니 해도 결국은 아빠와 딸에 대한 이야기, 단편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언어에 대한 가설이나 (영화에서는 생략된)페르마의 원리 등을 주요하게 다뤄도 결국은 엄마와 딸에 대한 이야기. 그렇게 말하면 진입 장벽도 낮출 수 있고 어쩐지 친근하게 느껴지니까. 다들 SF를 편하게 생각하고 많이 봐주면 어쨌든 좋은 거 아닌가.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하기에는…….
모든 소설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일까? 그러면 SF도 마찬가지로 ‘결국은 인간 이야기’로 수렴되는 것일까? 그 말에는 ‘꼭 그렇지는 않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원래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쓰려 했는데, 그래도 대부분의 SF가 인간 독자를 고려하고 있는 건 사실이니 확언은 어려울 것 같다. 내 견해는 동의와 반박, 그 사이 어디엔가 놓인다.
소설은 인물과 배경, 사건으로 구성된다. 소설에는 독자가 이입할 만한 인물 혹은 유사 인격체가 필요하다. 설령 식물이나 동물이나 외계생물이 이야기를 끌고 가더라도 그들의 행위나 생각이 인간 독자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한 소설적 통역 과정이 필요하다. 엘리자베스 문의 장편소설 『잔류 인구』는 개척 행성에 홀로 남기로 결심한 노인 오필리아가 주인공인데, 어느 날 오필리아가 자기 혼자 남은 줄 알았던 행성에 실은 인간이 아닌 생명체들이 잔뜩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야기는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소설 중간중간 행성의 자생종 생물이 자기들끼리 대화하는 장면이 이런 식으로 나온다.
대기에서 낯선 연기의 냄새가 났다. 저 멀리 불탄 풀밭에서 연기 기둥이 둥지들을 애도하는 것처럼 피어올랐다. 풀들은 되살아나 헐벗은 땅을 숄처럼 덮겠지만, '종족'은 흉터가 생긴 곳들을 언제까지고 잊지 않을 터였다. 이 냄새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패배다, 오른손 북 치기였다. 패배가 아니다, 승리다. 왼손 북 치기였다. 그들은 사라지고 우리가 남았으니까. 오른손이 하나둘씩 다른 곳을 향했고 마침내 왼손 북 치기에 '종족'의 힘이 모두 실렸다.
높은 하늘에 생긴 꼬불꼬불한 흰색 줄무늬. 괴물이 날아오면서 대기에 낸 흉터. 오른손은 수 세대 전 먼 남쪽에서 그런 줄무늬들이 목격된 적 있다고 상기시켰다. 왼손 북 치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 승리, 승리, 안전, 피난처, 복귀.
_엘리자베스 문, 『잔류 인구』, 강선재 옮김, 푸른숲, 2021.
대단히 어렵지만, 어쩐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오른손 북 치기와 왼손 북 치기는 무언가 다른 의미를 띠는 토론의 방식이고, '종족'은 그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이며, 어떤 전투의 결과에 대해서 서로 논의하고 있는 것이겠지. 오필리아의 시점에서 자생종 생물들의 대화는 “시끄러운 소리”, “주전자 물이 끓기 직전에 나는 듯한 소리”, “요란스러운 소리”로 들려온다. 하지만 이 자생종들이 주전자 물 끓는 소리로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작가는 인간 독자에게도 넌지시 알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소 낯설지만 여전히 익숙한 언어로, 그 자생종들이 어떤 존재이고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중력의 임무』에는 중력이 매우 강하고 납작하게 찌그러진 모양의 행성에서 살아가는, 납작한 전갈처럼 생긴 ‘메스클린인’이 등장한다. 이 외계생물들은 겉모습은 물론이고 문명의 형태도 인간과 다르다. 그렇지만 어쩐지 메스클린인들은 인간과 어느 정도 비슷하게 감정을 느끼고 말하고 행동하므로, 우리 인간 독자도 메스클린인들의 이야기를 큰 무리 없이 따라갈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거의 대부분의 SF가 인간 주인공 또는 인격체를 등장시킨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그건 소설을 읽고 쓰는 우리가 인간이니까, 아무리 애써봐도 야자수나 갯지렁이, 외계인의 관점으로 세계를 파악할 수는 없기 때문이겠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들을 ‘결국은 인간 이야기’로 요약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잔류 인구』는 가장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던 노인 오필리아가 인류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는 이야기인 동시에, 이 개척 행성의 원래 주인공인 자생종들, 인간과 대화할 수 있고 교감할 수도 있으나 결국 인간과는 다르게 북을 치고 독특한 집단을 만드는 존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오필리아만의 이야기로 보는 건, 소설의 중요한 축 하나를 완전히 누락하는 셈이다. 『중력의 임무』의 중심은 역시 괴상하게 생긴 외계종족, 그리고 이 낯선 행성 메스클린 자체다. 메스클린인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지만, 심지어 소설 속에서 지구인과 교류하지만, 어쨌든 소설의 초점은 메스클린의 기이한 생물과 행성에 맞춰져 있다. 실제로 할 클레멘트는 ‘작가의 말’에서 몇 페이지를 할애하여 이 가상의 행성에 대한 이야기만 열띠게 하고 있다. 오직 행성 이야기만. 그에게 지구인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SF는 인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그 사실을 무척 좋아한다. 개별 작품마다 좀 더 인간에 치우치거나 비인간에 치우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SF에서 비인간 존재들―자연, 우주, 행성, 테크놀로지, 동물, 식물, 외계생물―은 인간만큼이나 중요하다. 나는 이 행성의 꽤 많은 사람이 비인간 존재들에게 마음을 뺏기고 만다는 사실을, 또 그들 중 (그리 많지는 않지만)일부가 SF를 읽고 쓴다는 사실을 좋아한다.
어쩌면 유독 인간 바깥의 무언가에게 이끌리는 사람들이 SF의 세계에 푹 빠져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곰팡이가 미로를 피해 균사를 뻗치고 개미를 조종할 때, 꼭 거기서 어떤 인간적인 교훈을 추출해내지 않더라도, 그냥 곰팡이가 그런 존재라는 게 재미있는 사람들. 때로는 우리가 개별적 개체에 갇혀 전체를 사유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곰팡이처럼 감각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운 사람들. 그럼에도 우리가 상상하고 지각할 수 있는 세계 바깥에 무수히 많은 세상이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가슴 벅차게 설레는 이들이라면.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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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
소설가. 1993년생. 포스텍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생화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2017년 「관내분실」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대상과 가작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쓴 책으로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원통 안의 소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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