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작업실
정재은 영화감독의 작업실 -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
<말하는 건축가>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혹은 시간이 지나도 답을 얻지 못한 질문을 품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글: 박소미
2025.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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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은 감독이 정기용 건축가의 생과 업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는 2012년 작품이다. 정기용 건축가는 더 이상 세상에 없고, 정재은 감독은 <말하는 건축가>와 함께 건축 3부작으로 묶이는 <말하는 건축 시티:홀>, <아파트 생태계> 이후에도 <고양이들의 아파트> 작업을 이어가며 한국 다큐멘터리 판에 하나의 흐름을 만들었다. 그리고 2025년 정재은 감독은 과거 정기용 건축가와의 작업에 관해 쓴 에세이이자 다큐멘터리론이자 회고록이기도 한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을 출간했다. 책을 읽으며 가장 미스터리 했던, 그래서 매혹적이었던 점은 책 속의 목소리가 너무도 생생해 종종 이것이 그의 현재 진행 중인 작업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13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말이다. 이상한 시차였다. 


어쩌면 질문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질문이란 대게 무언가를 기다리는 처지이니 마침표와는 거리가 멀고, 그래서 아직 종결되지 않은 시간에 가까우므로.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에는 많은 질문들, 의문형으로 끝나는 많은 문장들이 등장한다. 어떤 질문은 과거를 현재로 호출하고 있었고, 어떤 질문은 앞으로의 작업을 향해 있었고, 어떤 질문은 후회였고, 어떤 질문은 다짐이었고, 어떤 질문은 곱씹음이었고, 어떤 질문은 그리움이었고, 어떤 질문은 숙고였고, 어떤 질문은 대화였고, 어떤 질문은 탄성이었고, 어떤 질문은 감독 스스로를 향했고, 어떤 질문은 동료들과 나누고 싶은 생각처럼 보였고, 어떤 질문은 후배 감독들을 위한 자리인 듯했고, 어떤 질문은 읽는 이의 몫이기도 했고, 어떤 질문은 그저 그 자체로 살아가는 게 불가피해 보이는 질문이었다.


아마도 내가 다큐멘터리를 만들 일은 평생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은 내게도 일종의 작업서처럼 읽혔다. 한 명의 직업인으로서 책을 덮으며 바라본다. 닳아서 매끄러워진 문턱의 시간일지라도 닫아두지 말자고. 그리하여 질문을 통해 어느 날 낯선 바람이 드나들 수 있기를.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 작업을 마친 후기를 들려주세요. 

책이 출간되어야만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군산북페어에 참가해서 사인회도 했습니다. 북토크도 참여해 보면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영화감독으로 해왔던 일들과 상당히 다르지만, 또 어찌 보면 비슷한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북페어에서는 영화제를 떠올리고 북토크를 하면서는 영화 개봉 후 하는 게스트 토크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책 출간이 영화를 공개하는 일보다 조금은 더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책은 영화보다 작가가 숨을 구석이 더 없는 듯합니다. 영화가 포함하고 있는 타인과의 협업이라는 화려한 양산이 없이 태양에 홀로 노출된 느낌입니다. 하지만 어떤 떳떳함을 배워나가는 시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한편, 매우 가깝게 독자들을 만나는 느낌이 들어 좋습니다. 개성이 강한 작은 책방에서 책방 주인들을 똑 닮은 독자들과 책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혼자 이런 생각에 빠져들곤 합니다. “아...책방 문을 잠그고 이 대화를 끝없이 이어가고 싶다…이 대화의 끝이 있다면 그곳은 어디일까?” 긴 영화를 보는 것도 힘들어하고 같이 본 영화에 대해 길게 말하는 것도 정말 힘들어하는 편인데요. 이상하게 책방에서의 대화라면 조금 길어져도 괜찮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서문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만들기에 처음으로 도전하면서 느꼈던 마음의 갈등들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책에는 많은 질문들, 의문형으로 끝나는 많은 문장들이 등장합니다. 정기용 선생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가장 오랫동안, 어쩌면 현재까지도 품고 있는 질문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정기용 선생님이 평생 고심한 주제는 건축의 공공성과 공공건축입니다. 나는 정기용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 이러한 주제를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정기용 선생님은 건축의 공공성이 단지 공공의 발주에서 이루어진 결과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질을 향상시켜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을 하셨습니다. 개인 소유의 부동산일지라도 건축은 우리 모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공유된 가치라는 생각을 배웠습니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매우 중요한 자산을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나 드라마 영역에서 창작자는 공공성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는 즐거움을 위한 엔터테인먼트 산업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같이 폭주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창작자들도 이제는 공공성에 대한 마인드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작가로서 공적 지원을 요구할 때 나와 내 작품이 사회를 위해 어떤 방식으로 어떤 기여를 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큐멘터리가 논픽션인 동시에 픽션이기도 하다는 점을 생생하게 들려주셨습니다. 글쓰기 역시 실제 경험을 다루더라도 픽션의 세계에 발 걸치고 있을 텐데요, 이번 책을 쓰면서 픽션의 근육을 사용하고 있어 자유롭게 느껴진 순간이 있으실까요? 

‘픽션의 근육’이라는 표현이 흥미롭네요. 네. 맞습니다. 이번 책을 내면서 수십 년간 픽션의 근육을 키워온 보람을 느꼈습니다. 보통의 에세이와 달리 구성에 있어서 시간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응용한 것이 그것입니다. 책을 읽을 때 마치 한편의 영화적 시간을 경험하듯 읽히기를 바랐습니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전개의 축을 의식하며 에피소드를 전개했습니다. 이런 방식의 글쓰기는 어쩌면 에세이보다는 소설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 생각도 했습니다. 다음에는 소설도 한번 써보고 싶습니다. 그동안 영화를 만들기 위한 목표에 경도된 글쓰기에 오랫동안 매달려 왔습니다. 이제는 좀 더 자유롭게 쓰고 싶네요.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사건의 불균질함’(153쪽)에 관해 말한 뒤, ‘정기용 선생님이 무주로 가는 입석 기차에서 책을 읽다 자리를 양보 받으며 생긴 에피소드’(154쪽)가 등장하는 부분입니다.(꼭 전문을 읽어 보시길!) 책이기에 가능한 방식으로 정기용 선생님의 대사와 감독님의 고민, 다큐멘터리 작업과 책 집필이 교차하는 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영화적인 동시에 너무도 활자의 방식이랄까요. 활자 작업이어서 이전과는 다른 각도에서 정기용 선생님을 마주하고 있다고 느낀 장면이 있으실까요?

의도를 알아봐 주는 독자들과 즐거움을 공유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번에 책 작업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나에게 정기용 선생님과 관련되어 떠오르는 기억은 전부 영화로 이미 촬영된 이미지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표정이 많이 떠오르고는 하는데요. 촬영 후 몇 번씩이나 돌려보던 영상들이 결국 내 기억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책을 쓰면서는 촬영되지 않았던 혹은 촬영하지 못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덕분에 다시 기억을 찾아낸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억들은 대부분 표정이 아니라 서사로 남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정기용 선생님 세대의 분들이 기억하는 방식이 그래서 우리 세대의 것보다 더 서사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촬영을 하지 않고 들었던 이야기들을 정리둔 메모들이 불완전한 것이긴 한데 내 기억에는 더 선명하게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기억을 더 잘하려면 무조건 촬영부터 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촬영해 둔 데이터들에 대해서는 촬영해 두었으니깐! 이러면서 더는 그것에 대해 곱씹어보거나 기억하려 들지 않는 것 같아요. 

 

다큐멘터리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타인의 삶에 대한 개입’의 문제를 책 전반에서 다루고 계십니다. 다큐멘터리 작업자로서, 경험적으로 점점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 태도나 작업 방식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다큐멘터리 작업을 이어오면서 서사의 압박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를 찾은 느낌입니다. 서사의 압박이야말로 문학적 서사 기반의 작업자들이 앓고 있는 고질병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서사를 위한 서사가 나를 지치게 했던 것 같습니다. 서사에 대한 압박은 결국 왜곡된 결과를 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작업을 이어가면서 서사에 대해 조금씩 새로운 시도를 해보게 된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집니다. 그런 시도에 도움을 주는 것은 관찰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면서 매 순간 어떤 창작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관찰의 태도가 몸과 마음에 베어 있는 것 같습니다. 





작업을 하는 동안 가장 의지한 반려 [ _______ ]

건강상의 문제로 몇 년 전부터 커피를 줄이고 다양한 차를 즐기게 되었습니다. 티백보다는 주로 잎차를 마시는데 차의 다양하고 깊은 맛에 매료되는 중입니다. 차를 어떻게 마실 것인가의 문제는 나에게 많은 질문들을 주곤 합니다. 차에 관한 여러 선택의 순간 들에 적정한 방식으로 차를 생활화하기 위한 나의 길을 찾는 중입니다. 혼자 혹은 누군가와, 집에서 혹은 다른 어떤 곳에서, 짧게 혹은 길게. 뜨겁게 혹은 차갑게, 진하게 혹은 여리게, 대화와 함께 혹은 침묵 속에서. 


 

작업실을 소개해 주세요. 

계획에 없던 경기도민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일산으로 이사 온 지 일 년 하고 한 달이 지났습니다. 서울에 살 때는 주로 광화문에 있는 작업실에 나가거나 동네 카페를 다니면서 작업을 했습니다. 느닷없이 살게 된 일산에서 광화문 작업실까지는 너무 멀었습니다. 그러다 발견하게 된 곳이 ‘ㅇㅇ도서관’입니다. 집에서 걸어서 십 분 거리에 위치해 있고 한 달에 한 번 정기 휴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오전 9시부터 6시까지 문을 엽니다. 도서관으로 매일 출퇴근하면서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를 썼습니다. 1층과 2층에는 나지막이 공간음으로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나는 카페에서 작업할 때는 소음에 둔감하지만 이상하게 도서관에서는 소음에 예민해지곤 합니다. 다행히도 3층에는 음악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 도착해 노트북 컴퓨터를 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앞으로도 집중력 있게 글을 써야 할 때는 그러할 것입니다. 세금 내는 것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적극 이용하고 있습니다. 자동차들이 다니지 않는 산책로에 위치해 있어 도서관 주변은 여유롭고 쾌적합니다. 당연히 살기 좋은 곳을 알아보는 눈썰미가 탁월한 길고양이들이 터를 잡고 살고 있습니다. 날씨가 좋은 날은 그네 타는 고양이를 볼 수도 있습니다. 


 

마감 후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인가요?

일산에 살다 보니 서울에서 살 때와 다르게 취향에 맞는 좋은 강좌를 접하기가 어렵습니다. 서울에서 늦게 일정이 끝나면 집에까지 또 언제 가나 한숨이 쏟아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일산에 사는 몇몇 분들과 서울까지 가지 않아도 되는 지역 스터디 모임을 하자고 도원결의하였습니다. 

 

우선은 책도 같이 읽고 영화도 같이 보는 스터디 모임을 하자. 그리고 자리가 잡히면 좋은 강좌를 일산으로 유치하자는 야심 찬 꿈을 꾸고 있습니다. 아직은 다들 서울로 돈 벌러 다니느라고 시작은 자꾸 밀리고 있지만 곧, 꼭, 해내고 싶은 일 중 하나입니다. 

 

할 일이 있을 땐 그것 빼고 모두 재밌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작업 중 특히 재밌게 본 타인의 작업은 무엇인가요? 

할 일이 있을 때는 할 일을 빨리 하는 걸 제일 재밌어 합니다. 작업할 때는 거의 한눈팔지 않고 목표를 향해 직진하곤 합니다. 목표를 향해 직진하다가도 가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글이 잘 안 풀릴 때는 만들어질 책을 상상하면서 유사한 주제를 다룬 책들을 읽었습니다. 책의 구성은 어떠해야 할지, 목차는 다들 어떻게 만들었는지 편집자의 자세로 들여다보았습니다. 에세이를 써보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예술 관련 에세이를 여러 권 읽으면서 내 생각을 찾아 나갔습니다. 『상황과 에세이』, 『에세이즘』, 『픽션의 가장자리』 등이 책을 쓰면서 재밌게 읽었던 책들입니다. 그리고 진짜 진짜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읽는 책으로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1, 2』가 있습니다. 그걸 읽으면 머리가 텅 비워집니다. 아무 데나 펼치고 읽어도 좋습니다.

 

 


서로 강력하게 거절하다 보니 싸움처럼 돼 가지고 모든 손님들이 우리 둘을 지켜보고. 결국 내가 져서 자리에 앉았는데 이번에는 그가 팔걸이에 나처럼 걸터앉는 거라. 너도 당해봐라 이거였나 싶고 신경이 쓰여서 결국 일어나려고 하는데 그가 문 쪽으로 가버리더라구. 그냥 자리에 앉았는데, 그 사람이 다시 오더니 귓속말을 하는 거야. 원래는 부산까지 간다고 했거든. 나는 천안에서 내린다 가는 데까지 잘 가라. 주변 승객들이 다들 그 사람이 무슨 말 했는지 궁금해하고. 어쨌든 나는 영동까지 좌석에 앉아서 갈 수 있었네. 통로 저쪽에 서 있던 승객이 결국 못 참고 뭐라고 했어요 물어서. 뭐라고 말할까 하다가 나도 가만있었어. 궁금해하라고.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 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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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

<정재은>

출판사 | 플레인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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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미

뒷모습이 담긴 사진이나 그림을 보면 쉽게 눈을 떼지 못하고 저장해 둡니다. 그 사람들...어떤 얼굴 하고 있을까요? 그래서 읽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