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몇 주에 걸쳐 소설 쓰기 모임에 참석했다. 열 명 남짓 모인 습작생들이 매주 서로의 작품을 성실하게 읽어 와서 정직한 조언을 건네주는, 진지한 모임이었다. 나는 몇 년 전에도 소설 쓰기 모임에 한 번 나간 적이 있고, 그때는 작품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한 채 모임을 마쳤지만, 이번엔 달랐다. 모임의 후반부에 나의 원고를 올리게 되었을 때, 다른 참여자 모두가 마감 기한에 맞추어 자신의 작품을 올렸기 때문에 도저히 못 하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내 생애 첫 단편 소설을 완성했다. 이리저리 끙끙대다가 마감이 닥친 주말 내내 책상에 앉아 초고를 완성하던 순간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만 같다. 원고지 100매로 마무리한 나의 첫 소설은, 아마도 우리 모임을 제외한 어느 누구에게도 읽히지 못할 것이지만.
나는 왜 소설 쓰기를 그렇게 갈망했을까? 이제는 누군가 돈을 주지 않는 글은 쓰지 않는다. 지금 쓰는 이 글도, 다른 매체에 정기적으로 싣는 칼럼도 원고료를 받고 쓰며, 법원에 제출하는 서면이야말로 의뢰가 없다면 쓰지 않는다. 가끔씩 올리는 SNS 글은 변호사로서의 나를 돋보이도록 하는 글이거나 외부에 발표한 칼럼을 홍보하는 용도이기 때문에 돈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모임 동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습작을 시도한 것에는 등단이란 목표가 없었다.(다른 동료들이 나보다 훨씬 진지하게 글을 써왔고 더 좋은 작품을 모임에 제출했기 때문에, 치기 어린 내 작품을 읽힌 것이 지금도 미안하다)
이 고백은 어쩌면 나의 습작이 너무나 형편없는 것임을 내가 잘 알기 때문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조지 오웰이 이렇게 말했던가. 똑똑해 보이고 싶고, 죽은 후에도 기억되고 싶은, 순전한 이기심이 글을 쓰게 한다고. 이 순수한 마음을 벗어나 무언가 진지한 글을 쓴다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
변호사가 법원이나 수사 기관에 제출하는 ‘서면’(준비 서면, 의견서, 변론 요지서 등으로 불린다)은 오직 단 한 사람을 위한 글이다. 그리고 오직 그 한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온 힘을 쏟을 때에만 온전한 의미를 갖는다. 다른 모든 이에게 인정받는 서면이라고 하더라도, 그 단 한 명의 독자인 법관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에는, 아무리 유려하고 명징하게 작성된 것일지라도 가차 없이 무용한 것으로 낙인찍힌다. 소송에서 패소하는 것이다.
그 중차대한 목적을 갖는 서면에는 문장과 구성에서 엄격한 형식적 요건을 갖출 것을 요구받는다. 처음 로펌에 입사했을 무렵, 내가 쓴 서면은 선배 변호사에 의해 글의 모든 것이 첨삭의 대상이 되었다. ‘사건 개요와 변론 요지, 각 쟁점에 대한 의견, 입증 계획, 결어’로 이어지는 무미건조한 소송 서면들. 심지어 서면에 쓰이는 문장은 통상적인 주어, 술어, 목적어 순서가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다. 이른바 ‘주 - 시 - 상 - 목 - 행’이 그것이다. 로스쿨에 다닐 때, 현직 법원의 판사님이 법률 실무 과목에서 강조한 것이기도 한데, 법률 문장의 순서는 주(어) - 시(일) - 상(대방) - 목(적) - 행(위)를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규칙이다. “영호는 2022년 8월 1일 미현과 아파트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였다.”는 문장이 올바른 문장이다. 계약 체결일을 강조하기 위해, 가령 “영호와 미현이 아파트 임대차 계약을 체결한 것은 2022년 8월 1일이었다.”라고 쓴다면 이것은 이미 법률가의 문장이 아니다.
사실 앞의 두 문장은 공통적으로 대법원 규칙인 ‘법원사무관리규칙’을 위반한 사실도 있다. 즉 2022년 8월 1일을 ‘2022. 8. 1.’로 온점으로 표기해야 맞는 표현이며, 이것은 다음과 같이 명확히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법원사무관리규칙 제10조 제3항 (문서 작성의 일반 사항) 문서에 쓰는 날짜의 표기는 숫자로 하되, 연·월·일의 글자는 생략하고 그 자리에 온점을 찍어 표시하며, 시·분의 표기는 24시각제에 따라 숫자로 하되, 시·분의 글자는 생략하고 그 사이에 쌍점을 찍어 구분한다. 다만 특별한 사유로 인하여 다른 방법으로 표시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
변호사가 쓴 글이 꼭 널리 읽혀야만 그 본연의 운명을 제대로 찾아간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변호사가 쓰는, 단 한 사람을 위한 서면이 역사를 뚫고 나와 긴 생명을 갖게 되는 경우에 우리는 약간의 경이로움을 갖고 그 글을 대할 수밖에 없다. 조영래 변호사님의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에서 보는 서면들은 참으로 그러하다.(조 변호사님은 과거에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 전태일 평전』을 발표한 작가이기도 하다)
1980년대 중반에 여성 조기 정년제가 사건의 쟁점이 되었던, ‘이경숙 사건’에서 쓴 조 변호사님의 문장은, 당시 법률 문서 스타일을 따라 만연체로 쓰여 있음을 감안해도 통렬하다. 이경숙 씨는 당시 24세의 나이로 중소기업 영업부 사원으로 근무하다가 교통사고로 다리를 크게 다쳐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는데, 그녀가 가해자를 상대로 낸 손해 배상 청구 소송에서 1심 법원이 “여성은 평균 26세에 결혼을 하고 퇴직 후 가사 노동에 종사한다.”는 판결에, 조 변호사님이 반박하며 낸 서면은 다음과 같다.
판결의 사회 지도적 기능을 감안할 때, 법원의 활동은 법률 적용의 분야가 아닌 사실 인정의 분야에 있어서까지도 언제나 이른바 객관적·몰가치적 판단의 성역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이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또 실제로 그와 같이 머물러 있지도 아니하다는 데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줄 압니다. (중략) 이렇게 볼 때 위 원고(이경숙)가 근무하던 회사에 기혼 여성이 없다는 등의 사유만으로 가볍게 위 원고의 결혼 퇴직을 예언한 원판결의 위 입론의 근저에는 아무래도 기혼 여성의 취업을 백안시하고 가사 노동 전념을 미덕으로 보는 전통 시대적·남성 지배적 편견과, 대등한 사회 참여를 통하여 경제적 독립, 인격적 통합, 인간적 존엄을 획득하고자 하는 다수 여성들의 절실한 염원에 대한 몰이해가 은연중에 자리 잡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으며, 사회 여론이 원판결에 대하여 사법부에 의한 결혼 퇴직제의 정당화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는 것을 단순한 문외한의 오해라고 돌려버릴 수 없는 소이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
의견서는 1985년 6월 19일이 제출 일자로 되어 있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여성의 경우에는 회사를 다니다 결혼을 하면 퇴사를 하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법원 역시 그것을 당연한 전제 사실로 보고 판결을 하고 있었다. 조 변호사님은 그것이 잘못임을 지적하며, 판결이 사실 인정에 있어서도 사회를 선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조 변호사님의 흔적은 2022년 대한민국의 어디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을까. 지금 인터넷에서 바로 검색해 보자. 법률 중에서도 제법 길고 멋진 이름을 가진 법률,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은 고 조영래 변호사님의 글에 티끌만큼이라도 빚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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