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를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창문 밖으로 공터가 있었고, 그곳을 오가며 지내는 고양이들이 있었고, '나와 눈이 마주치는 높이에서' 살아가는 그들을 지켜봤다. 2015년 5월, 작가 단단에게 벌어진 일이었다. 우연히 만난 어미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애미'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맺은 인연이었다. 애미는 공터에 자리를 잡고 두 마리의 새끼 고양이 '점순'과 '흰눈'을 낳아 키웠다. 시간이 흘러 점순과 흰눈도 엄마가 됐다. 고양이 3대가 삶을 이어가는 동안 작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고양이가 살아가는 '일'을 지켜보면서 그들을 더 잘 알고 싶어서 공부했다. 생태학, 동물 행동학, 동네 고양이 보호 활동과 사례 안에서 길을 찾았다. 고양이의 '일'과 얽혀있는 사람의 '일'도 목격했다. 사람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고민했다. 해야 할 일은 행동으로 옮겼다. 그렇게 고양이들을 살피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면서, 단단은 자신의 '일'을 계속했다. 고양이는 고양이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서로의 일에 충실하며 849일을 보냈다. 그 시간들이 『사람의 일, 고양이의 일』에 담겼다.
시각예술가이자 작가인 단단은 주로 공공 미술 작업을 한다. 특정 지역을 연구하고 지역 주민들과 미술을 매개로 소통하면서 시민 참여형 미술 프로그램을 개발해왔다. 30년을 산 방배동에서 불현듯 고양이 가족이 눈에 들어온 이후 동네 고양이를 돌보기 시작했다. 방배동 재개발로 이사를 한 다음 날부터 일주일에 세 번씩 경기도 김포와 서울 방배동을 오가며 여전히 고양이들을 살피고 있다.
고양이와 눈을 맞추면
7년 동안 길고양이를 관찰한 기록이 담긴 책입니다. 이 기록을 세상에 내놓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고양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그것만 잘 알아도 주위의 고양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고양이들이 열심히 사는 걸 지켜본 것 말고는 한 게 없어요. 그렇게 열심히 살고 치열하게 살고, 어떤 생명체도 그거 안 하고 살지 않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맨날 우리 삶만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고 우리 삶만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우리 삶이 빛나기를 바라는 일들만을 하고 사는데, 그게 아니라 내 삶과 그 옆에 있는 작은 삶들이 같이 부대끼면서 같이 살 수 있는 소소한 것들을 만들어 가는 게 되게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오랜 시간 인간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고양이 '애미'부터 시작해서 3대가 살아가는 거 보면, 우리 부모님이 나를 키울 때와 기본적인 틀은 똑같아요. 열심히 일하고 돈 벌어서 맛있는 거 먹이려고 하고, 어디 가서 내가 천대받고 오면 속상해서 대신 나가서 싸워주시려고 하고, 애미도 그런 거였잖아요. 방식이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것만 잘 보여줘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고양이들이 하는 일들, 그 이야기들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제목에 담긴 의미가 궁금합니다. ‘일’이라는 단어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어떤 때는 밥 먹는 것도 일이잖아요. 밥을 먹어야 사는 건데 그것도 일처럼 느껴질 만큼 중요하지만 되게 버겁기도 하고, 사는 일이라는 게 그런 것 같아요. 일을 직업으로만 생각하면 되게 협소하지만 한 생명체가 살아내기 위해서 하는 모든 활동의 총체로 볼 수 있잖아요. 그런 점에서 보면, '일' 대신에 '삶'이나 '이야기' 같은 다른 단어를 쓸 수도 있지만, '일'이 그 모든 걸 포괄하는 말이라는 생각을 해요.
『사람의 일, 고양이의 일』이라는 제목에서 '고양이의 일' 보다 '사람의 일'이 앞서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나요?
여기에서 사람은 인간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것을 뜻한다고 생각해요. 사람이라는 말 자체가 '살다'라는 동사에서 온 거니까요. 그중에 고양이의 일을 경유해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되돌아본 것 같아요. 책에 제가 실수했던 일들도 다 기록했는데, 인간의 장점과 단점을 다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런 지점들이 고양이의 삶과 대비됐을 때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들어가며」 꼭지에서 '눈높이'에 대해 말씀하셨어요. 함의하는 바가 많은 것 같습니다.
물리적 조건을 무시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길에서 고양이들을 마주칠 때는 거의 다 내려다보는 시선이다 보니까 고양이들이 우리를 올려다보지 않으면 눈빛이 마주치지 않잖아요. 그리고 올려다보는 눈빛에는 이미 평등한 느낌이 없죠. 누군가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면, 그런 마음을 품었느냐 안 품었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그 물리적 위치가 이미 모든 걸 확정해 버릴 때가 있는데, 고양이와 제가 수평적인 공간 안에서 마주쳤을 때 이미 그 관계가 달라지는 거예요. 그런 물리적인 조건과 그 안에서 움직이는 시선의 수평성이 기존에 사람들이 동물을 대할 때 가졌었던 태도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하는 조건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고양이가 도시에서 인간하고 살 때 시선을 맞출 수 있는 구조적인 도시 형태는 뭘까'를 상상해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의인화를 계속 경계하셨어요. "내가 고양이들의 행동 양식을 지나치게 의인화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됐다"고 쓰셨죠.
고양이들을 지켜보면서 인간이 동물을 바라볼 때 얼마나 인간을 기준점으로 두고 있는지 느꼈어요. 저 역시도 고양이들을 바라보면서 계속 갈등한 게 바로 그 지점이었던 것 같아요.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럴 것 같아'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빗나갈 때가 있는 거죠. 예를 들면 어미 고양이가 다른 고양이들한테서 새끼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하는 위험한 장면을 볼 때 너무 안타까우니까 나가서 도와준단 말이죠. 그런데 고양이들은 저한테 전혀 관심이 없는 거예요.(웃음) 그럴 때마다 느끼는 거죠. '우리도 우리 얘기만 하고 사는데 왜 고양이가 우리 얘기를 해야 돼? 고양이도 고양이들 얘기하면서 살겠지.'
그러니까 제가 고양이들을 바라볼 때 우리랑 되게 비슷하다고 느끼는 건, 의인화일 수도 있지만 정말 우리랑 되게 비슷한 거예요. 어떻게 보면 의인화가 아닌 거죠. 결국, 나의 흔들림이 의인화라는 말에 대한 도전을 계속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각인시키고 싶었던 게 있었어요. '당신은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점으로 고양이를 해석하는 거다, 그게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거에 너무 전적으로 매달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죠.
또 경계하신 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제가 항상 사람들한테 이야기하는 게 '우리 주제 파악 좀 하고 살자, 주제 파악을 잘해야 실수 안 한다'는 거예요. 매사에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예요. 그걸 못할 때 모든 문제들이 발생한다고 생각해요. 결국, 제가 해야 될 일은, 고양이들이 불쌍하다고 자꾸 고양이 일에 개입하는 게 아니라, 고양이가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인간끼리의 싸움에 전념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고양이가 아니고 인간이잖아요. 일단 그게 제 주제예요. 실제로 고양이들끼리의 관계에서 생기는 일들은 고양이들이 알아서 다 해결을 해요. 해결하려는 능력이 필요하고요. 제가 개입한다고 될 일이 아니거든요. 저는 인간이니까, 제가 할 일은 인간들이 고양이 못살게 굴면 막고, 인간들이 불법 저지르는 거 해결하고, 인간 사회에서 고양이도 같이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생명체라는 걸 주장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주제를 파악하는 게 제일 중요하고, 경계해야 되는 것도 제가 주제 파악 못 하게 되는 순간들인 것 같아요.
이 책은 '애미'한테 주고 싶어요
모든 일은 ‘애미’와의 만남에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겠죠?
그렇죠. 엄밀히 말해서 애미의 첫 자식, 제가 처음 마주친 애미의 자식들 '방자'와 '네로'의 죽음이었죠. 그전까지는 고양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몰랐죠. 그렇게 쉽게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전혀 몰랐어요. 방자랑 네로가 죽는 걸 본 후부터는 고민이 되기 시작했어요. '이렇게는 좀 아닌 것 같다.' 그러다가 애미가 흰눈이랑 점순이를 데리고 다시 나타났을 때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걸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본격적으로 하게 됐어요. 그런데 밥 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는지 몰랐으니까, 그래서 인터넷도 엄청 뒤지고 도서관에 가서 자료도 막 찾아보고 그랬어요.
그런데 길고양이, 특히 한국, 서울이라는 곳에 사는 길고양이의 생태를 이해하는 데 참고할 만한 자료는 거의 없었어요. 그게 이유가 돼서 계속 기록하게 됐던 것 같고요. 도시 고양이의 생태에 관해서 참고할 만한 자료를 찾기 어려울 때 생물학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생물학책들을 보면서 연구자들이 동물을 대할 때의 태도나 방법론 같은 경우를 참고하면서 고양이를 보기 시작한 거죠. 어떤 태도를 가지고 고양이와 관계를 유지해 나갈 것인지 알아가는 데 유용한 틀이 됐던 것 같아요. 제일 좋았던 건 역시 칼 세이건의 사고방식이었어요.
칼 세이건이요?
『에덴의 용』 같은 책은 과학을 기반으로 한 엄청난 상상이잖아요. 상상한다는 게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우리는 (실제로는) 없는 것들을 상상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자원이 많아야 구체적으로 상상을 해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고양이한테 밥을 주면서도 고양이가 뭘 할 수 있는지, 어떻게 사는지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고양이에 대해서 상상해볼 수 있는 생물학적 근거들을 조금씩 모으면서 '그러면 고양이의 저 행동은 이런 의미로도 읽을 수 있어'라고 상상하게 되는 거죠. 최대한 자원을 많이 끌어모아서 행위의 의미들을 더 세분화시키고 구체화시키는 과정에서 칼 세이건의 도움을 받았던 것 같아요.
'애미'는 정말 현명하고 차분하고 통찰력 있는 고양이예요. 근엄한 ‘듀터로노미’ 같은 느낌이랄까요.(웃음)
(웃음) 정말 그래요. 고양이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렇고, 그 의미를 뒤늦게야 깨닫는 경우가 정말 많았어요. '애미가 이래서 끝까지 버텼구나', '애미가 이래서 그랬구나'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되는 경우가 되게 많았고, 애미를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애미의 삶이 정말 녹록치 않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사실 이 책은 애미한테 주고 싶은 거예요. 어딘가 살아있다면. 물론 이제 살아있지 않을 텐데... 인간이 아닌 다른 종의 생명체를 통해서도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걸 배울 수 있구나, 깨달았어요.
'애미'가 보여준 공생의 태도가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딸 '점순'이 그 태도를 그대로 배웠죠.
맞아요. 점순이가 애미랑 똑같이 구는 걸 보면서 놀랄 때가 많았어요. 점순이는 애미를 너무 좋아했어요. 우리 집 창문 너머에 앉아 있다가 어딘가를 보면서 울음소리를 낼 때가 있었어요. 왜 저러나 하고 보면 그쪽으로 애미가 지나가고 있는 거예요. 애미를 보고 너무 좋았던 거죠. 그러면서 애미한테 막 달려가요. 애미는 꼬리를 탁탁 치면서 저리 가라고 귀찮다고 그랬었는데...(웃음) 떠나기 직전 겨울에 점순이가 애미를 끌어안아주고 있는 걸 보면서, 그때 (애미가 떠날 거라는 걸)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마 애미도 이제 떠날 때가 됐다는 걸 알아서 그랬던 것 같아요. 저였으면 그렇게 먹고 살기 편한 환경이면 안 갔을 텐데, 그런데 애미는 자기가 고생할 걸 아는데도 가잖아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점순'은 참 사랑이 많은 고양이예요. 자매인 '흰눈'에게도 헌신적이었고 '흰눈'의 자식들한테도 좋은 이모였죠.
맞아요. 그리고 (점순이가) 자기 자식을 낳았을 때 엄청 애지중지했어요. 그런 아이의 자식들을 제가 포획해서 떼어놨으니... 그때는 제가 모든 게 다 처음이었으니까, 나보다 먼저 경험했던 캣맘들이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해서 그 의견들을 받아들이고 갔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상황이 아니었잖아요. 되게 고민을 많이 하게 됐어요. 누군가가 더 많이 알 거라고 함부로 생각하지도 말고 그들의 신념을 너무 따라가지도 말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내가 흰눈이랑 점순이랑 겪으면서 쌓아온 시간이 있는데, 세상 모든 고양이는 몰라도 그 아이들만큼은 다른 사람보다 많이 알았을 텐데, 다른 사람의 말을 더 들었다는 게 너무 미안한 거죠. 인간사에서도 많이 벌어지는 일이잖아요. 권위 있어 보이는 사람이 더 많이 아는 것도 아니고 전문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 잘 아는 것도 아닌데, 사회적으로 역량이 있다고 생각하면 괜히 내 생각이나 발언에 위축되면서 나의 신념이 와르르 무너져버리는. 그 경험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많이들 경험하실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약속이 가능한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흰눈'이 낳은 새끼 고양이 '장군'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흰눈'에게 남다른 미안함, 애틋함을 갖고 계신가요?
당연히 있죠. (누군가) 아프면 구조해서 치료해주는 게 나쁜 마음은 아니지만, 그걸 상대가 이해할 수 없을 때는 얼마나 폭력이 될 수 있는지, 장군이 때 아주 뼈저리게 느꼈어요. 그때 장군이가 죽고 흰눈이가 새끼가 머물렀던 데만 찾아다니면서 있는데... 진짜 너무 미안한 거예요. 차라리 내가 포획을 안 했으면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 자체가 달라질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들고... 나로 인해서 폭력에 의해 자식이 죽은 걸로, 그 상황에 어미가 자식을 지켜주지 못한 사건으로 종결된 거잖아요.
안 해도 됐을 일인데. 그리고 책에도 썼다시피 장군이가 마지막 순간에 '엄마가 나를 지켜주지 않았어'라는 마음의 상처를 갖고 있었을 수도 있잖아요. 알 수는 없지만. 그 가능성을 제가 만들어 놓은 거잖아요. 그래서 흰눈이한테는 미안한 마음이 항상 있죠.
‘흰눈’을 포획했다가 돌려보내신 적도 있어요. ‘점순’의 자식들을 임시보호처에 맡겼다가 다시 방사하셨고요. 일부 캣맘들은 ‘그러면 안 된다, 왜 그렇게 했냐’고 말할 수도 있는데...
정말 그랬어요.
그럼에도 솔직하게 쓰신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흰눈이를 포획했다가 12시간 만에 방사할 때, 사실 제가 고양이를 포획해본 적이 없었던 상태였어요. 보통 포획을 하면 대형 케이지에 가두어서 '적응시킨다' 또는 '순화한다'고 하는데, 사실은 포기의 상태가 될 때까지 가둬두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그 과정을 안 거치고 바로 방에다 풀어줬어요. 흰눈이는 너무 무서우니까 천장으로 뛰어오르고 벽지가 찢어지고 컴퓨터가 엎어지고 난리가 났죠. 그게 문제가 아니라, 흰눈이가 구석에서 동공이 커진 상태로 '나한테 왜 이러냐'고 말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거예요.
이건 제 개인사하고 맞물려 있는데, 저는 아홉 살에 친족에 의한 성폭력을 당했어요. 제가 어린 나이에 하지 말아 달라고 울면서 매달릴 때 성폭력을 당했기 때문에, 흰눈이를 보면서 그 상황이 트라우마처럼 올라왔어요. 내가 당한 것은 폭력이었고 내가 흰눈이한테 하는 건 폭력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나의 의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저쪽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한 거니까요. 내가 아무리 흰눈이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도 흰눈이는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고,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를 넘어간 일인 거예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전까지) 내가 받은 가해의 사실에 대해서 분노할 줄만 알았는데, 그 순간에 내가 그 가해자와 동일해질 수 있다는 걸 느끼게 됐어요. 인간이 어떤 동물인지에 대해서 각성하게 한 중요한 사건이었어요.
'흰눈'도 작가님도 힘든 시간을 보내셨을 것 같아요.
그날은 아주 밀도 높게 힘들었어요... 내 실수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누구나 다 이럴 수 있어요. 그리고 누구나 다 착각하면서 이 일을 해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아이도 있고 정말 죽어도 못 받아들이는 고양이도 있어요. 개체마다 다르다고 하는데, 흰눈이는 못 받아들이겠다는 거였죠. 그때 마음먹었어요. 앞으로 내가 흰눈이 네가 살고 싶은 방식으로 살게끔 네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까지만 다가가겠다고.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나에 대한 약속이에요. 내가 세상에서 받고 싶은 약속이고. 그런 약속이 가능한 세상에서 내가 살고 싶었던 거예요. 한 번도 살아보지 못했으니까.
재개발로 인해 방배동을 떠나셨는데, 아직도 일주일에 세 번씩 찾아가시잖아요. 흰눈이와 하신 약속 때문인가요?
그런 이유죠. 사실 매번 좌절감을 느껴요. 계속 (그곳에) 살게 하고 싶은데, 떠나게 해야 되는 순간이 결국 올 건데, 그 순간에도 절대 놓지 말아야 된다는 생각으로 가는 거예요. 결국, 이 모든 이야기는 고양이 이야기이지만 제가 썼기 때문에 제 이야기인 거예요.
책의 끝에서 이렇게 같이 쓰셨습니다. "사람들은 묻는다. 왜 이 일을 계속하느냐고. 고민 끝에 찾은 답은 하나다. 고양이에게 밥을 안 줘도 되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서다.", "정확히는 사람이 밥을 주지 않아도 고양이가 고양이답게 지내며 밥을 먹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그런 세상을 만드는 일이 작가님에게 왜 중요한가요?
내가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내가 너무나 원하는데... 아마 캣맘들 대부분은 고양이를 통해서 사람한테 얻지 못하는 걸 얻고 있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걸 거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분들은 세상에서 얻지 못한 걸 고양이한테서 얻고 있어요. 그래서 이 일을 하는 거예요. 사람이 사람을 통해서 끝내 얻을 수 없는 뭔가가 있고, 그걸 가장 천대받는 동물한테서 받고 있다면, 한 번쯤 이 세상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거 아닐까요?
혐오는 너무 게을러요
전국적으로 '길고양이 중성화(TNR) 사업'이 시행되고 있는데요. 이 책을 읽으면 '길고양이 중성화만이 정답인가' 생각해 보게 돼요.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질문인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어떤 세계관을 갖고 고양이를 바라볼 것인가’ 생각했을 때, 진화론의 입장을 정확하게 따라가기로 했어요. 진화론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인간이 주도적으로 고양이의 성생활을 좌지우지하는 건 되게 문제적인 행동이라고 봐요. 우리는 유전자를 통하지 않고서도 지식을 축적해서 전달할 수 있지만, 그럴 수 있는 동물은 지구상에서 우리가 유일해요. 나머지 동물들은 유성 생식을 통해서 정보를 전달해야 돼요. 그러니까 중성화 수술을 시켜버리면 되게 무책임한 일인 거죠.
제가 계속 이야기하는 건, 개체 수가 많다고 종이 멸종되지 않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생명체의 한 종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으면 멸종돼요. (현재 상황은) 사람 친화적인 아이들은 거의 다 포획돼서 중성화가 돼요. 사람을 멀리하는 아이들일수록 (중성화가 되지 않아) 살아남아서 종을 번식시킬 수 있고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냐면, 도시에서 사람하고 유대를 형성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는 고양이들을 멸종시키고 있는 거예요. 집에 있는 고양이들 다 중성화시켰잖아요.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는 '길고양이 중성화'가 필수인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어요.
결국 불안 때문이에요. 고양이들이 사람들한테 학대 받을까 봐 겁나서, 불안하니까 중성화를 시키고 '그래서 (중성화시키려고) 밥 주는 거예요'라고 변명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제가 밥을 줬는데도 새끼 고양이들은 죽어요. 그 사실을 인식하지 않는 것 같아요. 인간은 지구상에 있는 동물들 중에 상당히 체격이 큰 동물에 속해요. 토끼나 고양이는 체구가 작죠. 큰 체구의 동물과 작은 체구의 동물은 기본적인 생리 기능이 달라요. 수명도 다르잖아요. 토끼 수명은 2년, 고양이는 10년 전후밖에 안 돼요. 그렇게 짧은 수명 안에서 많이 번식하는 방식으로 진화한 동물들이에요.
그런 이해 없이 고양이가 새끼를 많이 낳는다고 말하는데, 10년밖에 안 사는 동물이 그렇게 번식을 안 하면 개체 수 유지가 안 되는 거예요. 새끼 고양이는 태어나자마자 죽는 애들도 있고 (생후) 1년을 못 넘기는 애들이 태반이에요. 그런 사실들을 고려하지 않고 고양이가 새끼를 많이 낳는다고 반응하는 건 극히 인간적인 기준인 거죠. 문제 설정을 제대로 하지 않고 현상에만 집착해서 방법을 내놓은 게 중성화인 거예요. 고양이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우리가 불편한 걸 고양이가 다 감수해야 되냐고요. 그것도 이상하잖아요.
고양이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캣맘들도 중성화를 하고 싶지 않을 거예요. 캣맘들에게는 '길고양이를 혐오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가'가 영원한 숙제인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사람들과 관계 안 맺어요. 혐오밖에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과 왜 관계 맺어야 돼요? 혐오는 너무 게을러요. 아무것도 안 하면서 자기가 '싫어!'라고 하면 다 해결되는 줄 알잖아요. 정작 캣맘들은 공부하고 책도 쓰고 제도도 바꾸고 되게 바쁜데, 그 사람들은 아니잖아요. 그 사람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제도를 바꾸려고 하는 거예요.
캣맘들이 '을'이 될 때가 많잖아요. 캣맘 혐오가 길고양이 학대로 이어질까 봐 무서워서, 고양이를 혐오하는 사람한테도 좋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하고요.
이미 법이 있잖아요. 캣맘들이 정말 온 정성과 에너지를 쏟아가면서 활동을 하는데, 법이라도 활용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법에 길고양이가 명시돼 있어요. 법적인 정식 명칭이 '길고양이'예요. 길고양이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례까지 나와 있어요. 길고양이의 관리 주체는 정부예요. 시민이 아니고요.
그런데 대부분의 캣맘 활동가들은 이걸 활용하지 않아요. 저도 가장 먼저 했던 일이 동물 보호법을 찾고, 그 안에서 길고양이가 어떻게 보호받을 수 있는지 확인하는 거였어요. 그리고 (동네의 길고양이가 살고 있는) 공원 부지의 관리 주체가 누구인지도 확인했어요. 서초구가 관리 주체라면 서초구에 민원을 넣으면 돼요. 거기 살고 있는 (고양이 혐오하는) 사람들과 일일이 싸울 필요가 없어요. 공무원들이 그 사람들을 계도하거나 공원 부지에서 어떤 일이 이뤄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어야 되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거잖아요.
지금 방배동 고양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요. 고양이들을 돌보면서 작가님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실 것 같아요.
지난 겨울에 가장 힘들었고, 갈 때마다 마음이 너무 무거운 때가 있었어요. 고양이들이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있다 보니까 추위를 이겨낼 방법이 없어서 자꾸 빈집에 들어가거든요. 그런데 재건축 지역의 공가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고양이들이 갇힌 걸 확인하지 않은 상태로 밖에서 문을 잠가버리는 거예요. 아이들이 그 안에 갇히는 거죠. 전화해서 고양이 좀 꺼내달라고 하면 되게 시큰둥하거나 귀찮아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지나가는 아저씨들을 붙잡고 문 좀 열어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여자들이 전화를 하면 캣맘이라고 생각하고 다 귀찮아하니까요. 재건축 지역에는 공가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있고 안전요원들이 따로 있어요. 한 번은 공가 관리하시는 분들이 빈 건물에 고양이 밥자리 있으면 다 빼라고 해서 빼고 있는데, 안전요원들이 CCTV로 저희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다가 달려와서 나가라고 윽박지르더라고요. 제 머리 위에 드론까지 띄우면서 못 오게 하는 거예요. 그때 되게 충격을 받았죠.
고양이들은 건물에 갇혀 있는데, 문을 안 열어주면 어떻게 하라는 거죠?
그런 문제가 너무 많이 벌어지니까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그 동네에 살던 캣맘들한테 연락해서 구청에 민원을 넣어달라고 부탁했어요. 한 번은 제가 구청 공무원과 통화를 하는 중에 지나가는 아저씨한테 문 좀 대신 열어달라고 했는데 그 이야기를 공무원이 듣고 있었거든요. (이런 상황이)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구청에서 협조를 해주기도 했고요. 캣맘 중에 구의원이 친척인 분이 계셔서 도움을 청하기도 했어요. 조합에도 푸쉬가 들어갔고요. 이후로는 캣맘들 활동에 대해서 더 이상 터치를 안 하게 됐어요. 그런데 그렇게 되기까지 겨울에 제가 묻어준 아이들이 여럿이에요.
작가님께도 트라우마로 남았을 것 같은데요. 방배동 가는 길이 싫으실 것 같아요.
그때 많이 힘들었는데, 안 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갈 때마다 '제발 오늘은 아무 일도 없기를, 아무도 안 죽었기를, 아무도 건물 안에 안 갇혀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돌아오는 겨울이 또 걱정이죠. 이제 주민들은 거의 다 떠났고 가을부터는 쓰레기를 치울 것 같은데, 가림막을 칠지 안 칠지 알 수가 없거든요. 가림막을 치면 본격적인 철거에 들어가는 건데, 그러면 고양이들은 다 이주를 해야 돼요.
그것도 큰일이지만, 가림막을 안 친 상태로 밥을 줘야 하는 상황이면... 올겨울에도 죽어나가는 고양이들이 있을 거예요. 아이들은 추위를 피할 데가 없으니까요. 제가 돌보던 지역에 스물네 마리가 있었는데 지금은 열여덟 마리 정도밖에 없어요. 이번 겨울을 또 그렇게 나야 한다면, 한 1/3은 사라지게 되는 거예요. 재건축이 사람한테나 주거 환경 개선이지, 살아가는 다른 생명들한테는 그냥 전쟁터인 거예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 없으세요?
고양이와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참고한 게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이었어요. 『쇼리』라는 소설이 있는데, 주인공 '쇼리'가 흡혈귀예요. 말 그대로 사람의 피를 먹어야 살 수 있는데, 소설에서 이야기하기를,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착취적인 관계는 아니라고 해요. 흡혈하는 과정에서 피를 빨리는 사람이 점점 더 젊어지고 잘 늙지 않거든요. 그래도 흡혈귀의 입장에서는 인간을 착취할 수 있는 건데, 공생하기 위해서 되게 노력해요.
옥타비아 버틀러의 사랑은 거기에 있어요. 역량의 차이가 착취가 아니라 사랑이 되려면 어느 지점을 봐야 되는지, 세세하게 잘 그려내요. 제가 이 글을 쓸 때 가장 염두에 뒀던 것, 실제로 고양이와 관계 맺는 상황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게 그거예요. 쇼리는 인간이 동의하지 않으면 절대 흡혈을 하지 않아요. '나는 이런 존재고 너와 다르다, 네가 동의한다면 (흡혈을 통해) 젊어지고 원하는 걸 하면서 살 수 있지만 이런 단점이 있다' 하면서 설득하는 과정이 있어요. 나는 고양이한테 그럴 수 있는가. 우리가 동물한테 그럴 수 있는가. 우리가 정말 뛰어난 존재라면 그렇게 해야 하지 않나. 이 책을 통해서 그 이야기를 가장 하고 싶었어요. 저도 항상 그 지점에서 고민하고요.
*단단 시각예술가. 주로 공공미술 작업을 한다. 특정 지역을 연구하고 지역 주민들과 미술을 매개로 소통하면서 시민 참여형 미술 프로그램을 개발해왔다. 30년을 산 방배동에서 불현듯 고양이 가족이 눈에 들어온 이후 동네고양이를 돌보기 시작했다. 밥자리를 마련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고양이들의 행동과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관찰과 기록에 시간을 쏟았다.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방배동 재개발로 이사를 한 다음 날부터 일주일에 세 번씩 경기도 김포와 서울 방배동을 오가며 여전히 고양이들을 살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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