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하와이
『일기시대』
오랜만에 가족과 해외여행을 떠났다. 엄마는 하와이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고, 언니와 나는 각각 하와이의 마우이와 빅아일랜드를 다녀왔으니, 일행 모두 가보지 않은 '오아후(Oahu)'를 방문하기로 했다. 여행 채비를 하며 카메라와 필름 그리고 여행지에서 읽을 책 한 권을 챙겼다. 평소엔 글보다 이미지를 읽는 편이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사진책이 아닌 에세이를 읽고 싶었다. 어떤 책을 고를까 고민하다가 문보영 시인의 『일기시대』를 가방에 넣었다. 좋아하는 에세이 장르인 데다 짤막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쉽게 읽을 수 있고, 틈날 때마다 볼 수 있을 것 같아 여행 내내 이 책과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해외여행이 제한되었던 때문인지, 떠나는 날의 인천 공항은 북적거렸다. 비행기 안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찼다. 식사를 하고 기내 제공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때우다, 모두가 잠들 무렵 『일기시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백색 소음이 가득한 공간에서 책에 집중해서 읽을 수 있는 시간에 감사했다.
여행을 다녀온 지금, 눈을 감으면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하나우마 해변에 스노클링 하러 갔을 때였다. 다 같이 해변가 목 좋은 곳에 자리를 펴고, 하와이식 주먹밥인 '무스비'로 배를 간단히 채우고 바다로 들어갔다. 바닷속은 생각보다 시야가 뚜렷하지 않았다. 산호초들도 제 색을 잃은 것 같았다. 그렇게 스노클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몸통이 전부 파란색인 물고기가 내 옆을 헤엄쳐 갔다. 놀라서 옆을 보니 또 다른 샛노란 물고기 여러 마리가 무리를 지어 지나갔다. 또 한 번 놀라는 중에 이번에는 보라색, 빨간색, 초록색, 무지개색 물고기가 사방으로 헤엄쳐 내 옆을 스쳐갔다.
놀라운 광경을 가족에게 알리고 싶어 해변으로 돌아갔지만, 가족들은 생각보다 시큰둥했고 언니만 스노클링 하던 장소로 같이 가줬다. 물이 따듯해 족히 2시간은 있었던 것 같다. 무거워진 몸뚱이를 이끌고 모래사장 쪽으로 나오니 관광객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을 비집고 살펴보자 몽크바다표범이 관광객들 사이에서 모여든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당당히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생소한 광경에 소란을 피웠지만, 해상 구조대는 별일 아니라는 듯 주변으로 3m 떨어진 곳에 삼각콘을 세워 몽크바다표범만의 사적 공간을 확보해줬다.
하와이에선 해변에 누워 태닝을 하면서 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달았다. 각자 좋아하는 책을 가지고 와 햇빛 아래에서 읽는 모습이 여유로워 보였다. 나도 해변에 나갈 때마다 자연스레 『일기시대』를 가져가 읽곤 했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처천재' 이야기다. 작가가 지은 '처천재'라는 별명도 재미있는 데다 그 일관적인 캐릭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생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지만 처천재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영어 선생님. 둘의 이야기가 사실적이라 흥미로웠다. 책을 읽는 내내 영민하고도 순수한 친구가 옆에서 재잘대는 것만 같았다. 마치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을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주변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재미있는 일상은 이야기로 남지 않고 사라져버리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가끔씩 『일기시대』를 펼쳐 본다. 책을 읽을 때마다 하나우마 해변의 그 공기, 바람, 냄새가 떠올라 기분 좋게 책장을 넘긴다.
*해란 8년 차 사진가. 유머와 사랑으로 인물을 담고, 노인과 가족, 고양이에 관심이 많다. 다큐멘터리 사진과 요가를 사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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